<자기신뢰> 랄프 왈도 에머슨
이 책은 얇다. 그러나, 깊다. 에머슨의 통찰은 놀랍다. 어찌보면 초절주의자로 불리는 그는 유심론자이다. 그 정도로 자기 자신을 믿고 자신에게 귀를 기울이라고 역설한다. 아메리카라는 대자연에 직면한 미국적 각성자라고 할까?
이 책을 읽으면 젊은 소로오가 에머슨을 왜 그렇게 따랐고, 또 숲 속에 오두막을 짓고 혼자 사는 실험을 감행할 수 있었는지 이해가 갈 것이다.
아쉬운 점은 그의 이 책이 다른 이름으로 중복 번역되어 있다는 것이다. 위 두 책은 내용이 겹친다. 양은 뒤의 책이 한 편 많지만, 문장은 앞의 책이 훨씬 좋다. 개인적으론 앞의 <자기 신뢰>를 추천하겠다.
아래는 책을 읽으며 인상적인 부분을 옮긴 것이다.
= 발췌 =
어린 것을 바위에 던져라.
늑대의 젖꼭지를 빨게 하고
매와 여우와 더불어 겨울을 나게 하라.
힘과 속도가 그의 손이 되고 발이 되리라.
마을속에 숨어 있는 확신을 소리 내어 말하라. 그러면 그것이 보편적인 의미를 갖게 될 것이다.
사람은 온 마음으로 일에 몰두하고 최선을 다할 때 활기를 얻고 즐거워진다. 하지만 말과 행동이 그렇지 못할 때는 마음의 평안을 누리지 못한다. 그것은 아무것도 낳지 못하는 해산이다. 마음에 없는 일을 하게 되면 재능이 그를 버리고, 뮤즈도 그의 곁을 떠나버린다. 창조도, 희망도 사라진다.
사회는 구성원 한 사람 한 사람이 가진 인간다움을 빼앗으려 음모를 꾸민다. 사회는 일종의 주식회사이다. 그 속에서 각각의 주주들은 자신이 먹을 빵을 더 확실히 보장받는 대신, 그 대가로 자유와 교양을 넘겨주기로 합의한 셈이다.
거기서 우선적으로 요구되는 덕목은 순응이다. 자기신뢰는 혐오의 대상이다. 사회는 본질과 창조성이 아니라 명목과 관습을 사랑한다.
나에게는 내 본성에서 나온 율법 이외에는 어떤 것도 신성하지 않다. 선과 악은 단순히 이름에 지나지 않는다. 그래서 선이 악으로, 혹은 악이 선으로 쉽게 바뀔 수 있다. 오직 하나 옳은 것은 내 본성을 따르는 것이고, 오직 하나 그른 것은 내 본성에 반하는 것이다.
내 천성이 나를 부르면, 나는 부모도 아내도 형제도 멀리한다. 나는 문설주에 ‘기분 내키는 대로 Whim'라고 써놓을 것이다.
타고난 재능이 거의 없고, 설령 있더라도 하찮은 것에 지나지 않는다 해도, 나는 확실히 나 자신으로 존재하고 있다. 나 자신을 납득시키기 위해, 또 주위 사람들을 납득시키기 위해 이차적인 증명은 필요하지 않다.
인간을 자기신뢰에서 멀어지게끔 위협하는 또 다른 요인은 우리가 가진 일관성이다. 우리는 과거에 했던 말과 행동을 지나치게 중시한다.
내맡겨라. 당신의 이론에서 벗어나라. 요셉이 음탕한 여자의 손에 옷을 남겨두고 달아났듯이. 그렇게 평소 지론에서 벗어나라.
아무리 훌륭한 배라도 항해 도중에 이리저리 방향을 바꾸기 때문에 지그재그 모양으로 운항하게 된다. 충분히 거리를 두고 배가 지나간 물길을 바라보면, 한 방향으로 움직이는 직선 형태를 나타낼 것이다. 성실하게 행동하면 그 행위는 스스로 해명될 것이고, 당신이 행한 다른 모든 성실한 행동들도 자연히 설명된다.
인간 행동의 배후에는 반드시 그 행동의 원인이 된 위대한 ‘사상가’와 ‘행위자’가 있다, 참된 인간은 어떤 시대, 어떤 장소에도 속하지 않고 만물의 중심이다.
참된 인간이 있는 곳에는 자연이 있다. 그는 당신을, 모든 사람을, 그리고 모든 사물을 재는 척도이다.
대개 이 사회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다른 어떤 것이나 다른 어떤 사람을 연상시킨다. 하지만 인격과 실체는 어떤 것도 떠올리게 하지 않는다. 인격과 실체는 우주 전체를 대신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자신을 둘러싼 환경의 차이를 하찮게 만들어비릴 정도로 거대한 존재가 되어야 한다.
‘신뢰받는 자’는 누구인가? 보편적 신뢰의 근거가 되는 본래의 ‘자신’이란 무엇인가?
과학을 당혹스럽게 하는 저 별, 독립심이 조금이라도 담겨 있으면 사소하고 불순한 행위에까지 아름다움의 빛을 쏘는 별, 시차도 없고 측정 가능한 요소도 없는 별의 본질과 힘은 무엇인가?
이 물음을 따라가면 재능과 덕과 생명의 본질, 우리가 ‘자발성’ 또는 ‘본능’이라고 부르는 근원에 닿게 된다. 후천적으로 배신을 우는 교육과 대비시켜 우리는 이 근원적 지혜를 ‘직관’이라고 한다. 그 심오한 힘 속에, 분석이 불가능한 궁극적인 사실 속에, 모든 사물의 공통된 근원이 있다.
왜 그런지는 모르지만 조용한 시간이면 인간 영혼의 내부에서 존재의 감각이 솟아오른다. 그 감각은 사물, 공간, 빛, 시간, 인간과 구별되는 별개의 것이 아니라 그것들과 함께 있다. 그 감각은 또 생명과 존재가 연유한 바로 그 근원으로부터 나온다.
우리도 처음에는 만물의 근원인 생명을 공유한다. 그런데 그후 인간 이외의 것은 자연 현상으로 보기 때문에 자신도 동일한 근원에서 생겨났다는 것을 잊어버리고 만다.
지각은 기분 내키는 대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숙명적으로 일어난다. 만약 내가 어떤 특성을 깨닫는다면, 내 아이들도 그것을 깨달을 것이며, 시간이 지나면 온 인류가 깨달을 것이다.
신을 알고 있으며 신을 말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나타나, 어딘가 다른 세계에 있는 오래된 나라의 용어를 써가며 당신을 과거로 이끌려고 해도 그 사람을 믿지 말라.
세월은 영혼의 건전함과 권위를 침해하는 음모자이다. 시간과 공간은 우리의 눈이 만들어낸 생리적 색채이지만, 영혼은 빛 그 자체이다. 빛이 지금 있는 곳은 낮이고, 예전에 있었던 곳은 밤이다. 그리고 역사는 나의 현재와 미래에 관계된 유쾌한 교훈담이나 우화에 지나지 않으며, 그 이상이면 주제넘고 해로운 것이다.
사람들은 풀잎이나 활짝 핀 장미 앞에 서면 부끄러움을 느낀다. 내 방 창문 아래 피어 있는 장미는 예전에 피었던 장미나 자기보다 더 아름다운 장미를 마음에 두지 않는다. 장미는 있는 그대로 그저 피어 있을 뿐이며, 신과 함께 오늘을 살고 있다. 장미에게는 시간이 없다. 단지 장미로 존재할 뿐이다.
욕정을 초월한 곳에서 영혼은 동일성과 영원한 인과관계를 바라본다. 그리고 ‘진리’와 ‘정의’가 어디에도 의존하지 않고 그저 스스로 존재함을 인식하고, 모든 일이 순리대로 진행되는 것을 깨닫고 평온해진다.
어디에도 의지하지 않고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이 ‘만물의 근원’이 가진 속성이다. 그 속성의 하위 형태인 만물의 가치는 그 속성을 얼마나 갖추고 있는지에 따라 결정된다. 다시 말해, 존재하는 모든 것은 내포하고 있는 만큼의 덕에 따라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이다.
지금 우리는 어리석은 대중에 불과하다. 인간이라는 존재에 대해 경외심을 품지 않는다. 자신의 재능을 믿고 집에 머물면서 내면의 큰 바다와 교류하지 않고, 밖으로 나가 남의 항아리에서 물 한 잔을 구걸한다. 우리는 혼자서 가야 한다.
나는 예배가 시작되기 전의 고요한 교회를 좋아한다. 어떤 설교보다 그것이 더 좋다.
우리는 사랑하는 것을 가지고 있지만, 욕망 때문에 그 사랑을 잃는다.
우리가 진실을 좇아 살아간다면, 그 진실이 결국에는 우리를 지켜줄 것이다.
특정한 이익을 구하는 기도는, 모든 사람들에게 선이 되지 않는 어떤 것을 구하는 기도는 사악하다. 기도는 가장 높은 관점에서 현실을 내려다보며 조용히 생각하는 것이다. 그것은 인생을 바라보며 기뻐하는 영혼의 독백이다. 기도는 또 자신의 과업을 선이라고 선언하는 신의 영혼이다.
신의 숨은 뜻은 우리의 노력 속에 있다. 용기야말로 우리에게 최고의 신이다. - 존 플레처
성스러운 신은 불굴의 인간에게 질풍과 같이 강림한다. - 조르아스터
교양 있는 사람들이 아직껏 ‘여행’이라는 미신에 매혹당하는 것은 자기수양이 부족한 탓이다.
하지만 인간의 내부에서 힘이 넘쳐 오르면, 그는 자신의 의무 속에서 자신이 있어야 할 장소를 발견하게 된다.
여행은 어리석은 자의 낙원이다. 한번이라도 여행을 떠나보면, 어디에 가더라도 그곳이 그곳을 뿐, 그다지 차이가 없다는 점을 깨닫게 된다.
여행을 열망하는 것은 지적 활동 전체에 영향을 주는, 한층 깊은 불건전함을 보여주는 징후이다. 지성이란 본래 방랑자처럼 정처 없이 떠돌아다니는 것인데, 현대의 교육제도 탓에 불안정한 성격이 더욱더 강해졌다.
육체가 집에 머물러 있어야만 할 상황일 때, 우리의 마음은 여행을 떠난다. 그래서 우리는 모방한다. 그 모방이란 바로 정신의 여행이다.
당신의 삶의 소박하고 고결한 영역에서 살아가라. 마음의 목소리에 복종하라. 그러면 당신은 태초의 세계를 다시 이 땅 위에 창조할 수 있을 것이다.
사회는 결코 전진하지 않는다. 한 부분이 진보하면 즉시 다른 부분이 후퇴한다. 사회는 쉴 새 없이 변화한다. 미개한 사회가 문명화하고, 크리스트교로 바뀌고, 풍요로워지고, 과학적으로 변화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런 변화는 개선이 아니다. 무언가를 얻을 때는 무언가를 빼앗기는 법이다.
사회가 새로운 기술을 습득하면 예전의 본성을 잃어버린다.
재산에 의지하는 것, 혹은 재산을 보호해주는 정부에 의지하는 것은 자기 자신에 대한 신뢰가 부족하다는 뜻이다.
사람은 오랜 세월 자기 자신에게서 눈을 돌려 외부의 사물만을 바라보았고, 그 결과 교회와 학교, 사회제도를 재산의 보호자로 생각하게 되었다. 이런 조직들에 대한 공격을 강하게 비난하는 것도 그것을 곧 자신의 재산에 대한 공격으로 느끼는 탓이다.
세상 사람들은 인격이 아니라 소유하고 있는 것을 기준으로 상대방의 가치를 평가한다. 하지만 교양 있는 사람은 자신의 본성을 가장 존중하므로 재산을 부끄럽게 여긴다.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힘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 가치 있는 것을 자신의 외부에서 찾았기 때문에 약해지고 말았다는 사실. 이것을 깨달은 사람은 주저없이 자신의 생각에 몸을 던지고, 곧장 바른길로 돌아가 우뚝 선 채 자신의 손과 발로 기적을 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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