讀/삼국유사읽기

내용과 줄거리- 검색에서-

oldhabit 2010. 2. 22. 11:41

내용

     제 1의「왕력편(王曆篇)」은 신라시조(新羅始祖) 혁거세(赫居世)로부터 후삼국(後三國)의

    고려 태조 통일에 이르기까지의 왕대(王代)와 영표(年表)를 도표식(圖表式)으로 정연하게

    보이고 있으며, 그 위쪽과 말미(末尾) 부분에 중국의 역대 왕조와 연호(年號)를 표하여

    시대적인 준거가 되게 하고 있다. 왕력(王曆)은 현재의 『삼국유사(三國遺事)』에서는

    편(篇)으로 처리되어 있지 않지만 이는 부록으로써 단순한 연대표가 아니다. 즉 이에는

    각 왕의 대수(代數), 즉위 연대, 존위년수(在位 年數), 릉(陵)의 명칭, 소재(所在), 화장기사

   (火莽記事), 왕모(王母)에 대한 기록, 왕비(王妃)에 관한 기술, 연호(年號)의 사용, 준국과의

    교섭관계, 국호(國號)에 대한 설명, 사찰 건립, 수도(首都)의 옮김, 축성(築城), 제방(堤防),

    시장(市場)에 대한 기록, 외침(外侵) 기사 등, 국가적인 중대 사건이 기록되어 있어 단순한

    연대 대조표가 아니라 일연의 선대(先代) 역사에 대한 지식과 관점을 알 수 있는 한편의

    저술이라 할 것이다.

      제 2의「기이편(紀異篇)」은 고조선 이래로 후백제까지 이르는 우리 고대사의 광범위한

    영역을 신이(神異)를 바탕으로 하여 1, 2권에 걸쳐 59항목으로 다루고 있다. 권 1은 단군조

    선(檀君朝鮮)의 고대사(古代史)로부터 신라의 통일 전인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대에 이

    르기까지의 요사(要史) 및 질문(秩文)을 왕조 중심으로 모은 36항목의 내용이 들어 있다.

    권 2는 문호왕법민(文虎王法敏)에서 가락국기(駕洛國記) 등 통일이후 국망(國亡)까지의

    신라를 중심으로 하여 백제와 후백제 및 가락 등에 대한 것을 권1의 예에 따라 수록한 23항

    목이 들어 있다. 특히, 가락국(가야)의 역사는 삼국유사 이외의 다른 사서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것이다.

      제 3의「흥법편(興法篇)」은 삼국(三國)에서 불교가 공인되기까지의 불교 전래에 대한

   기술로, 이에는 사실적인 내용이 주를 이루고 있다. 여기도 설화적인 내용이 일부 들어 있

   지만 대부분 문헌자료에 의거한 것이다.

      제 4의「탑상편(塔像篇)」은 불교신앙의 대상인 석탑(石塔), 범종(梵鐘), 불상(佛像),

   사찰(寺刹)에 대한 기록이다. 이는 불교문화사(佛敎文化史)에 대한 것으로 기왕의 고승전

   (高僧傳)에 없는 내용이다. 여기에도 설화(說話)로 전하는 영험적인 내용을 일부 전하고 있

   으나 사지(寺誌), 금석문(金石文) 등을 통하여 비교적 구체성이 있는 내용을 전해주고 있다.

     제 5의「의해편(義解篇)」은 불교 교리(佛敎 敎理)에 능통한 승려에 대한 전기이다. 그러

   나 종교적(敎宗的)인 철학에 능통한 자만이 아니라 이미 도에 통하여 시간과 공간에 구애

   받지 않고 자유롭게 행동한 고승 이야기, 공예(工藝)에 신통한 양지(良志)의 전기,

   신이(神異)를 일으킨 고승의 영험 등이 다루어졌다. 고승전에서 자료를 취하면서도 설화를

   함께 실었다.

      제 6의「신축편(神呪篇)」은 고승들의 신통한 신술력(神術力)에 대한 설화를 모은 것이

    다. 이는 「기이편(紀異篇)」과 더불어 신이적(神異的)인 내용을 가장 많이 담고 있다.

    하지만 「기이편(紀異篇)」이 왕(王)에 대한 설화가 주(主)라고 한다면 「신축편(神呪

    篇)」은 승려의 신이(神異)에 대한 설화가 주(主)를 이루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제 7의「감통편(感通篇)」은 지극한 신심(信心)이 인간적인 능력의 한계를 뛰어넘는

   설화를 다룬 것이며 이 편(篇)도 신이(神異)로운 내용으로 일관되고 있다.

      제 8의「피은편(避隱篇)」은 세속적인 부귀를 탐내지 않고 초연히 벗어날 수 있는 사람

   에 대한 기록으로, 여기에는 승려에 국한시키지 않고 화랑이나 일반 사람도 주제로 포함되

   어 있다. 기본사상은 모두 세속사(世俗事)를 영원한 것, 절대적인 것으로 보지 않는 불교의

   가르침과 일치함을 강조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마지막의 「효선편(孝善篇)」은 가정의 기본 윤리인 효가 불교에서도 존중되는 덕목이라

    는 것과 불교적인 선과 연결되는 것이 더욱 값지다는 점을 보여주는 내용이다

 

삼국유사 줄거리 

 

 

  삼국유사는 처음 고조선의 이야기를 다룬다.그리고 마한,부여,가야등의 고대의 여러 나라와 고구려,백제,신라등의 삼국의 여러 가지 설화를 소개한다.

  먼저 고조선의 이야기에서는 단군신화가 나온다.  천상(天上)의 상제의 아들인 환웅이 태백산에  내려와 세상을 다스리기 시작했다. 이 때 곰과 호랑이 한 마리가 찾아와  사람이 되고 싶다고 하자  참을성이 강한 곰을 여자로 만들고 그녀의 아들이 단군왕검이 되었다.  그리고 그는 나를 열어 조선이라 불렀다.  이것이 우리 민족 최초의 나라인 고조선이다. 과학적인 것만이 인정되는 현대에서는 위의 단군신화는 너무나 허무 맹랑한 것이지만 그 깊은 내면적 의미를 통찰해야 한다. 먼저 천상의 아들이 우리 민족의 시조라고 한 것은 우리 민족은 자주적인 민족이고 자랑스런 민족이라는 것을 알리려는 작자 일연의 의도가 숨어있다.

 

  위의 단군신화는 다음과 같이 해석할 수 있다. 그 당시에는 사람들이 산림 지대에 거주하며 농경을 하고 있었는데 그들 중 환웅부족이 태백산을 중심으로 세력을 확장하고 주위의 다른 부족들을 통합하며 지배한 것이다. 그리하여 곰을 숭배하는 부족이 결혼을 통해 환웅 부족과 연합하고 호랑이를 숭배하는 부족은 연합에서 배제된 것이다. 그리고 자신들이 하늘의  자손임을  내세워 그들 부족의 우월성을 과시하다 보니 그들의 이야기가 고려시대 까지 구전되며 과장되어 위와 같이 된 것이다.

  마한과 동부여,북부여의 이야기는 간단히 나와 있다. 그러나 북부여의 시조는 용이 끄는

수레를 타고 내려와 나라르 열었다든지, 북부여에서는 돌 밑에서 금빛깔의 아이가 자라서

금와태자가 되었다는 등 믿기 어려운 이야기이기는 단군신화와 마찬가지이다. 하지만 이렇

게 고대의 역사가 허무맹랑한 경우는 흔히 있는 일이고 하물며 설화와 야사를 적은 삼국

유사는 심하다해도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럼 고구려의 건국신화인 동명신화를 보자. 동부여의 금와가 왕위에 오른뒤 우발수 강

가를 지나다가 아리따운 한 젊은 여인을 만났다. 그녀는 물의 신 하백의 딸인 유화인데 천

재의 아들 해모수에게 사통(私通)을 당해 부모의 미움을 사서  그곳에 귀양 오게 되었다고

했다. 금와는 유화를 데리고 가서 으슥한 방에 가두어  두었더니 햇빛이 비추어 그녀는  잉태하게  되었다. 다섯달이 지나 유화는 알을 낳았고 그 알에서 나온 아이가 주몽이다. 주몽은 어려서 부터 재주와 힘이 뛰어나며 사람들이 주몽을 잘 따랐으나, 이 에 왕의 자리를 빼앗길 까봐 두려운 왕은 그를 없애려 하고 그 낌새를 알라차린  주몽은 평소부터 길러둔 말을 타고 도망쳤다. 그래서 주몽은 졸본주(卒本州)  그곳을 도읍으로  나라를 열어 국호를 고구려(高句麗)라고 했다.

 

 고구려를 세운 사람은 북부여의 유민이라는 것을 위 이야기에서 알 수 있다.또한 단군 신

화와 주몽 신화는 두 신화의 기틀은 흡사하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단군의 탄생이 천재의 아들과  웅녀와의  신혼(神婚)으로 이루어진데  반해 주몽은 유화가 낳은 알에서 깨어 나왔다는 점에서 두 신화의 다른점이 있다. 또한  주몽이 말을 타고 도망 온 것을 볼때 그들이 유목민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동부여에서의 갈등과 불화를 박차고 나와 새 왕조를 새운 것은 힘차고 씩씩한 고구려인의 기상을 잘 보여주는듯 하다.

 

  진한 땅에는 옛날에  여섯 마을이 있었다. 하루는 여섯 마을의 우두머리들이 각각 그 자제를 데리고 알천 냇가에 모였다. 그들은 그들을 다스릴  군주가 없음에 대해 논하고 있었다.그 때,남쪽으로 서기가 보였다.  그리고 그 서기가 드리워진 곳에 흰 말 한마리가 알에  절을 하고 있었다.그 알에서 아이가 나와서 동천샘에 데리고 가서 목욕을 시키니 몸에서 광채가 나서 하늘과 땅이 울렁이고 해와 달의 빛이 더욱 청명해졌다. 그래서 그를  혁거세왕(赫居世王)으로 불렀다. 또한 같은 날, 알영정 우물가 에서 한마리 계룡이 나타나 옆구리로 계집아이 하나를 낳았는데 그의 입술이 닭의 부리 같았다. 목욕을 하나 부리가 빠지며 입이 나와 이름을 발천(發川)이라 했다. 그리하여 남산에 궁궐을 지어 신성한 두 아이를 받들어 길렀다. 혁거세는 박 같은 알에서 태어났다고 성을 ‘朴’이라 하고 여자아이의 이름은 우물의 이름을 따서 閼英이라 했다. 이 들이 열살이 되던해에 혁거세는 왕으로 알영은 왕후로 추대 되어 국호를 ‘서라벌’이라 했다. 이 신화는 신라의 개국신화로서 그 시조 역시 하늘의 자손임을 알 수 있게 해준다.하늘로 부터 서기가 드리워 진다든지 그곳의 백마가 알에 절을 하고 알에서 아이가 나온다든지 모두 혁거세가 하늘의 인물임을 드러낸다. 그리고 그 왕후까지 신성한 인물로 묘사한 것이 철저한 남존여비의 시대였던 그 당시의 사회상으로 비추어 볼때 좀 특이하다.

 

  이 박혁거세 신화 외에도 탈해왕 신화라든지 알지왕 신화등 많은 신라왕의 신화가 삼국유사에 실려있다. 이것으로 일연의 삼국유사는 상당히 신라를 예찬한다고 생각한다.

그 이유는 이 삼국유사가 쓰여질 당시의 역사적 상황을 보면 이해가 된다. 그 당시 고려는 중국 원나라의 지배하에 있었다. 그래서 삼국을 통일하고 당의 세력까지 축출한 신라의 자주정신을 본받기 위해 신라를 강조한 것이라 생각한다.

 

  연오랑과 세오녀의 이야기도 눈여겨 볼 만하다. 동해 바닷가에 연오랑,세오녀 부부가 살고 있었는데 어느날 바위 하나가 해초를 뜨고 있던 연오랑을 싣고서 바다를 건너 일본의 바닷가에 도착했다.그 나라 사람은 그를 신비롭게 여겨 왕으로 추대했다. 세오녀는 남편이 집에 돌아 오지 않자 바닷가에 나가 보니 다시 그 이상한 바위가 나타나 세오녀를 싣고 일본으로 갔다.그리하여 연오랑과 세오녀 부부는 다시 만났으나 신라에선 해와 달이 빛을 여겼다.그래서 신라 왕은 사신을 보내 그 부부를 돌아올 것을 권하였으나 연오랑은 세오랑이 짠 명주를 주었다.그것을 가져와 하늘에 제사를 지내니 다시 해와 달이 빛을 찾았다. 일본으로 간 연오랑은 우리나라가 일본으로 가서 앞선 문화 수준으로 일본을 다스렸음을 의미한다.그래서 왕까지 되고, 신라에게 명주를 주어 해와 달의 빛을 되찾게 한것은 신라와 상호 협조하였음을 의미한다.이 부분에서도 우리민족의 우수성을 발견할 수 있다.

 

  당시 주변국가와 신라와의 관계를 보여주는 또 한 이야기가 있다. 신라 17대왕 내물왕때,왜왕은 백제의 죄과를 신라에 성토하기 위해 성의를 보여달라고 하였다.  그래서 내물왕은 세째 왕자 미래를 보냈으나 일본은 그를 볼모로 잡아 30년의 세월이 흘렀다.내물왕의 아들 맏아들 눌지왕은 고구려와 화친의 표시로 그의 동생 보해를 고구려로 보냈다. 그러나 고구려 역시 보해를 볼모로 잡고 10년이 흘러 눌지왕은 깊이 심려되었다.그래서 재상을 시켜 고구려로 모래 잠입시켰다.  그 재상은 보해를 만나 몰래 고구려의 바닷가를 빠져 나왔다.그 때 추격하던 고구려 군사들은 평소 보해를 사모했음으로 그를 살려보내었다.보해가 돌아오자 눌지왕은 왜구에 잡혀있는 미해가 걱정되었다.그러자 재상은 일본으로 가서 몰래 미해를 만나 탈출을 시키고 자신은 시간을 벌기 위해 일본에 남었다. 왜군에 붙잡힌 재상은 자신이‘왜군의 신하다’ 라고 말하면 푸려날 수 있었지만 끝내 충절을 지켜 죽게 되었다.

 

  이 이야기는 유교적 사상에 비추어 볼때 정말 대단한 충신전(忠臣傳) 이다. 그러나 내 생각에는 잠시 굴복하는 척하다가 기회를 틈타 신라로 탈출 했을것이다. 그 때 굴복하여도 신라에 아무런 해가 되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고국에 있는 가족들의 생각도 중요하고 무었보다도 본능적으로 살고 싶은 욕구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것은 나같은 범상한 사람들의 생각일뿐 이 재상은 그런  모든것을 초탈하여 충절을 지킨것이고 그런 선조들이 있기에 20세기 초에 일제 치하에 있을때 목숨을 바쳐 독립운동을 한 열사들이 나올 수 있었을 것이다.

 

   또 한가지 주목할 것은 고구려와 왜국에 볼모로 잡혀 있는 보해와 미해를 국가의 권위로써 떳떳히 데려올 수 없었던 것은 당시 신라의 국세(國勢)가 약했음을 드러낸다. 실제 내물왕과 눌지왕 시절 즉,4~5세기는 각각 백제와 고구려의 전성기였다. 그러나 국가의 힘은 약했으나 그 잠재적인 힘인 개인들은 용감했고 슬기로왔다. 그것이 신라가 삼국을 통일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삼국유사에는 우리민족의 풍습의 유래도 나와 있다.보름 약밥의 유래가 그 한예이다. 신라21대 왕 비처왕 때의 일이다. 어느날 왕은 천천정(天泉亭)에 거둥했다.

 

그 때,까마귀와 쥐가 나타나더니 쥐가 사람의 말로 까마귀가 날아가는 곳을 찾아가 보라고 했다.왕은 까마귀가 날아간 곳을 기사를 시켜 따라가 보게 했더니 한 노인이 못 속에서 나타나 편지 한 통을 주어 편지를 보니 겉봉에 이렇게 써있었다. ‘이 편지를 열면 두 사람이 죽을것이요,열지 않으면 한 사람이 죽을 것이다’.  이에 비처왕은 두 사람이 죽는것 보다는 한 사람이 죽는 것이 낫겠다고 열지 않으려 했다. 그러자 일관이 열지 않아 죽는 한 사람이 왕일 것이라고 했다.그러자 왕은 편지를 열어 보니 ‘거문고 갑을 쏘아라’라고 써있었다.그래서 화살로 거문고 갑을 쏘게 했더니 그 안에서 온갖 불사를 맡아 하는 중이 궁주와 몰래 간통하고 있다가 죽었다. 그 때 부터 매녀 정월달의 첫 해일(亥日), 첫 자일(子日), 첫 오일(午日)에는 백가지 일을 삼가 함부로 행하지 않으며 정월 보름날을 오기일(烏忌日)이라 해서 찰밥으로 찰밥으로 까마귀에게 제사를 지내는 등의 풍속이 생겨서 지금까지 행해지고 있다.

 

   또 신라 25대 왕 사륜왕때에 도화랑이라는 아주 아름다운 여인이 있었다. 왕은 그녀를 궁으로 불러들여 사통을 요구했다. 그러나 그녀는 한 여자가 두 지아비를 섬길 수 없다며 지아비를 두고는 죽어도할 수 없다고 했다. 그러자 지아비가 없어진다면 어떻겠냐고 왕이 묻자 그녀는 되다고 하였다. 왕은 그녀를 돌려 보내고 그 해에 죽었다. 사륜왕이 죽은 후3년뒤,도화랑의 남편도 죽었다. 남편아 죽은후 열흘후 밤에 사륜왕이 생시의 모습으로 도화랑의 방으로 찾아와 도화랑에게 남편이 죽었으니 사통할 것을 요구했다. 이에 도화랑은 이일을 부모에게 의논하여 허락을 받아 사륜왕은 7일간 도화랑의 방에 머물다가 사라졌다. 도화랑은 임신을 하여 사내아이를 낳으니 이름을 비형이라고 지었다.당시의 임금은 그 비형을 데려다 길렀다.그런데 비형은 밤만되면 밖에 나가 도깨비들과 놀다오곤 했다. 이 사실을 안 왕은 그를 불러 도깨비들 가운데 정사를 도울 만한 자를 물으니 비형은 길달이라는 자를 추천하였다.그리하여 왕은 길달에게 벼슬을 주고 임종에게 양자로 삼게 하니 임종은 길달을 양자로 삼았으나 어느날 여우로 변하여 도망갔다.비형은 도깨비들을 시켜 기달을 죽이게 했다.그 뒤 도깨비들은 비형의 이름만 듣고도 도망가게 되었다.

 

  도화녀와 사륜왕의 이야기에서 신라인의 정조를 대하는 태도를 알 수 있다. 지아비가 살아 있느한 여자는 왕에게도 몸을 허락할 수 없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지아비가 죽으면 가능하다는 것은 과부의 재혼이 가능 했다는 것이다.  도화랑이 부모에게 사륜왕과의 동거를 허락을 받고 한것을 보면 재혼이 완전히 자유로운 것은 아니나 어느정도 가능했을 것이다.또 도화랑의 방에 찾아온 사륜왕은 진짜 사륜왕이 아닌 다른 사람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비형의 영특함에 후세에 구전되며 도화랑의 재혼의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해 그랬을 것이다.그러나 이것은 전통적인 유가 사상이 과부의 재혼을 절대 금지하는 것에 비하면 매우 이채로운 것이다.결국 우리의 전통적인 정조관은 신라인의 것처럼 자유로왔을  것이다.

  그리고 또한가지 이 이야기의 발단은 도화랑이 오직 아름답다는 것에서 비롯된다는 점에서 신라인들은 신체(身體)의 미(美)를 중요시 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것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공통적인 일이 아닌가 한다.

 

  김유신은 신라 제2의 관등인 이간(伊干)을 지낸 무력의 손자이자 각각 서현의 손자로 진평왕17년에 태어났다. 그는 어려서 부터 검술이 능하여서 화랑이 되었다.당시 그는 백제와 고구려와의 전쟁문제로 고심하고 있었는데 백석이란 자가 고구려로 잠입해서 내정을 살피자고 하여 길을 떠났다. 가던 도중 밤에 그들은 여자로 분한 세 신령을 만났다.그들은 백석이 적군이라고 유신 한테만  말하자 유신은 핑계를 데어 다시 집으로 돌아가 백석을 결박하고 문초하였다.  그러자 백석은 김유신이 원래 억울하게 처영당한 고구려의 복술가 추남이 다시태어난 것이라는 대신의 말을 듣고 복수의 화신인 김유신을 죽이러 왔다고 했다.김유신은 백석을 죽이고 신령들에게 감사의 뜻으로 큰 제사를 올리었다.고구려에서 김유신을 죽이려 한것은 그가 신라 군의 핵심적 인물로 위협을 느꼈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첩자를 보내  그를 유인해서 죽이려 했던 것이다. 그리고 김유신이 추남이 다시 태어난 것이라는 것에서 불교의 윤회사상을 느낄 수 있다.

 

  김유신과 친구지간이자 처남이된 김춘추의 이야기는 유명하다. 김춘추 역시 귀족출신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문흥대왕으로 추봉된 용수이고,  어머니는 진평대왕의 딸인 천명부인이었다. 김유신과 김춘추가 출세할 수 있었던것은 출신성분이 좋았기 때문일 것이다.그리고 귀족은 귀족끼리 결혼했음을 김유신의 누이 문희와 김춘추의 이야기를 통해알 수 있다. 문희의 언니 보희는 어느날 서악(西岳)에 올라가 방료를 하니 온 서울에 오줌이 가득한 꿈을 꾸고 그 예기를 문희에게 말했다. 문희는 그 꿈을 비단 치마를 주고샀다. 그 유신과 춘추가 공놀이를 하다가 춘추의 옷고름이 떨어져 유신의 집으로 갔다. 유신은 보희에게 옷고름을 꿰매달라고 했으나 문희는 그런 사소한 일로 귀공자를 가까이 할 수 없다하며 거절하였다. 그것이 보해가 꿈을 판 효과일 것이다. 그러니 당연히 행운은 꿈을 산 문희에게 갔다.  유신은 문희에게 옷고름을 달게하고 그 뒤 춘추와 문희는 가까워져 문희는 임신하게 되었다.이것은 그 당시에도 어느정도 남녀간의 성관계가 자유로왔음을 의미한다.왜냐하면 결혼도 않한 처녀가 임신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유신은 문희를 불태워 죽인다고 소문을 낸뒤 선덕여왕이 남산으로 산책나오갈 기다려 불을 질러 연기를 내었다. 까닭을 알은 선덕여왕은 즉시 춘추를 시켜 문희를 구하게 하고 혼인 시켰다.

 

  삼국유사에는 많은 시가 나온다. 헌화가(獻花歌)가 그것들 중 하나이다. 그 유래를 볼것 같으면,순정공은 강릉태수로 부임받아 그곳에 그의 부인 수로부인과 가는 길이었다. 그 때 절벽위에 철쭉꽃이 활짝 피어있었다. 그래서 그꽃을 꺽어달라고 하니 어느 암소를 끌고 가던 노인이 따주고 헌화가를 불렀다.그리고 어느정자에서 점심을 먹고 있는데 용이 나타나 수로부인을 납치해서 바닷속으로 들어갔다. 이에 순정공은 노래를 불러 막대기로 땅을 두들기니 용은 부인을 바다에서 내보냈다.아마도 이용은 바다해적일 것이다. 수로부인이 아주 예버서 그녀를 납치했을 것이다.

 

  충담사의 사뇌가들도 역시 삼국유사에 전해  내려오는 시가이다. 경덕왕 24년,왕은 길에서 영복승 한분을 데려오라고 하였다.그때 마침 위의가 깨끗한 지혜와 덕망이 높은 승려가 거리를 걸어가고 있어 신하들이 그를 접견시켰으나 왕은 아니라고 말하였다. 이번에는 납의(衲依)를  입고 있는 중이 있어 그를 접견시키니 그가 바로 충담이다. 여기서 주목해야 될것은 첫번째 승려는 차림새가 화려하고 주위 사람들로 부터 지혜와 덕망이 높다고 칭송을 받으니 이는 불교가 세속화되고 타락하여 승려들이 제물과 명예를 중시하였음을 의미한다. 신라의 말기적 현상인 것이다. 왕도 그것을 경계하여 첫번째 승려는 영복승이 아니라고 한것이다.그리고 왕은 일찍이 충담사의 기파랑을 찬양하는 사뇌가를 들은 바가 있어 충담사에게 백성을 다스려 편안케 하는 노래를 지어달라고 한다. 그래서 충담은 ‘안민가(安民歌)’를 지어 올린다.삼국유사에는 안민가 말고도 찬기파랑가등 향가 14수가 전한다.

 

  그 다음 우리가 잘 아는 당나귀 이야기가 삼국유사에는 전한다.  경문왕의 이름은 응렴으로 그는 허안왕의 사위로 들어가 왕이 되었다.경문왕은 왕위에 오르자 귀가 당나귀의 귀와 같이 커져 버렸다.그 사실을 아는 사람은 오직 족두를 만드는 사람밖에 없었으나 그는 사실을 죽을 대 까지 말할 수 없어 답답하였다.그래서 그는 죽음이 입박해 오자 대나무 숲에 가서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하고 외쳤다. 이야기에서 복면을 만드는 장인은 왕의 귀가 당나귀 귀라고  그토록 하고 싶어하던 말을 토설한다.이를 문학에서는 ‘정화’와 ‘배설’이라 한다.

 

  백제의 제30대 왕 무왕의 원래 이름은 장인데 그의 어머니는 연못의 용과 교통하여 그를 낳았다고 하나 그는 아버자가 없는 사생아 였거나 전쟁에 아바지를 잃은 아이였을 것이다.그는 마를 캐어 생계를 유지하는 보잘것 없는 신분이었는데 그런 그가 임금이 되었다는 것은 그 당시 뿐만 아니라 현대에서도 굉장한 신분 상승이  아니라 할 수 없다. 선화공주와 결혼하여 왕의 사위가 되었을 뿐만아니라 많은 황금으로 인심을 얻은 이유가 있지만 그렇게 되것은 그가 굉장히 운이 좋았기 때문이다. 만약 위의 설화가 과장된 것이라면 원래의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고 난 생각한다. 선화공주는 행실이 부정하여 귀향가게 되었고 그 때 산적활동으로 재물을 쌓아둔 서동과 눈이 맞든지 아니면 서동의 강요에 의해 결혼을 하여 왕의 사위로서 왕위에 올랐을 것으로 생각한다. 그런 그가 왕위에 오르니 난라가 잘 돌아갈니 없고 극기야 그 다음왕인 의자왕때는 백제가 망한게 아닌가 생각한다. 그러나 위의 서동과 선화공주의 이야기가 어쨋거나 야사인 만큼 그 사실성여부를 따지는 것은 의미가 없을 것이다.삼국유사의 중요한 가치는 정사인 김부식의 삼국유사에는 없는 신화, 전설, 시가 등 중요한 자료가 많이 실려 있다는 데에 있다.그래서 신라,고구려,백재,가야 등의 고대국가의 문화를 이해하는데에 없어서는 안 될 귀중한 자료인 것이다.-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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