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례
- 삼국유사(三國遺事)
- 제 1권
- 기이(紀異) 제1
- 고조선(古朝鮮) 왕검조선(王儉朝鮮)
- 위만조선(魏(衛)滿朝鮮)
- 마한(馬韓)
- 이부(二府)
- 칠십이국(七十二國)
- 낙랑국(樂浪國)
- 북대방(北帶方)
- 남대방(南帶方)
- 말갈(靺鞨; 혹은 물길勿吉)과 발해(渤海)
- 이서국(伊西國)
- 오가야(五伽耶; <가락국기駕洛國記>의 찬贊을 상고해 보면, 자줏빛 끈 하나가 내려와 둥근 알[난卵] 여섯 개를 내려 주었다. 이 중 다섯 개 알은 각 읍邑으로 돌아가고 한 개는 이 성城에 있어서 수로왕首露王이 되었고, 각 邑으로 돌아간 다섯 개는 각각 다섯 가야伽耶의 주인이 되었다 한다. 그러므로 금관국金官國이 이 다섯 개의 수에 들지 않은 것은 마땅하다. 그런데 <본조사략本朝史略>에는 금관金官까지 그 수에 넣고 창녕昌寧까지 더 기록했으니 잘못이다)
- 북부여(北扶餘)
- 동부여(東扶餘)
- 고구려(高句麗)
- 변한(卞韓)과 백제(百濟; 또는 南扶餘라고도 하는데 곧 泗泚(沘)城이다)
- 진한(辰韓; 진한秦韓이라고도 했다)
- 우사절유택(又四節遊宅)
- 신라시조(新羅始祖) 혁거세왕(赫居世王)
- 제2대 남해왕(南解王)
- 제3대 노례왕(弩禮王)
- 제4대 탈해왕(脫解王)
- 김알지(金閼智), 탈해왕대(脫解王代)
- 연오랑(延烏郞)과 세오녀(細烏女)
- 미추왕(未鄒王)과 죽엽군(竹葉軍)
- 내물왕(奈勿王; 나밀왕那密王이라고도 함)과 김제상(金(朴)堤上)
- 제18대 실성왕(實聖王)
- 사금갑(射琴匣)
- 지철로왕(智哲老王)
- 진흥왕(眞興王)
- 도화녀(桃花女)와 비형랑(鼻荊郞)
- 천사옥대(天賜玉帶; 청진淸秦 4년 정유丁酉(937) 5월에 정승正承 김부金傅가 금으로 새기고 옥玉으로 장식한 허리띠 하나를 바쳤다. 길이는 10위圍요. 전과鐫銙가 62개나 되었다. 이것을 진평왕眞平王의 천사대天賜帶라고 한다. 고려高麗 태조太祖는 이것을 받아 내고內庫에 간직했다)
- 선덕왕(善德王)의 지기삼사(知幾三事)
- 진덕왕(眞德王)
- 김유신(金庾信)
- 태종(太宗) 춘추공(春秋公)
- 장춘랑(長春郞)과 파랑(罷郞)
- 기이(紀異) 제1
- 제 2권
- 기이(紀異) 제2
- 문호왕(文虎(武)王) 법민(法敏)
- 만파식적(萬波息笛)
- 효소왕대(孝昭王代)의 죽지랑(竹旨郞; 죽만竹曼 또는 지관智官이라고도 한다)
- 성덕왕(聖德王)
- 수로부인(水路夫人)
- 효성왕(孝成王)
- 경덕왕(景德王)·충담사(忠談師)·표훈대덕(表訓大德)
- 혜공왕(惠恭王)
- 원성대왕(元聖大王)
- 조설(早雪)
- 흥덕왕(興德王)과 앵무새
- 신무대왕(神武大王)과 염장(閻長)과 궁파(弓巴)
- 제48대 경문대왕(景文大王)
- 처용랑(處容郞)과 망해사(望海寺)
- 진성여대왕(眞聖女大王)과 거타지(居陁知)
- 효공왕(孝恭王)
- 경명왕(景明王)
- 경애왕(景哀王)
- 김부대왕(金傅大王)
- 남부여(南扶餘)와 전백제(前百濟)와 북부여(北扶餘; 北扶餘는 이미 위에 나와 있다)
- 무왕(武王; 고본古本에는 무강武康이라고 했으나 잘못이다. 백제百濟에는 무강武康이 없다)
- 후백제(後百濟)의 견훤(甄萱)
- 가락국기(駕洛國記; 고려高麗 문종조文宗朝 대강大康 연간年間에 김관지주사金官知州事 문인文人이 지은 것이니 그 대략을 여기에 싣는다)
- 거등왕(居登王)
- 마품왕(麻品王)
- 거질미왕(居叱彌王)
- 이시품왕(伊尸品王)
- 좌지왕(坐知王)
- 취희왕(吹希王)
- 질지왕(銍知王)
- 겸지왕(鉗知王)
- 구형왕(仇衡王)
- 기이(紀異) 제2
- 제 1권
삼국유사(三國遺事)
제 1권
기이(紀異) 제1
첫 머리에 말한다.
대체로 옛날 성인(聖人)은 예절과 음악을 가지고 나라를 세웠고, 인(仁)과 의(義)를 가지고 백성들을 가르쳤다. 때문에 괴상한 일이나 힘이나 어지러운 일, 귀신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다. 하지만 제왕(帝王)이 일어날 때에는 반드시 부명(符命)을 얻고 도록(圖籙)을 받게 된다. 때문에 보통 사람과는 다른 점이 있게 마련이다. 그런 뒤에라야 큰 변의 틈을 타서 대기(大器)를 잡아 대업을 이룩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그런 까닭에 하수(河水)에서 그림이 나왔고, 낙수(洛水)에서 글이 나와서 이로써 성인(聖人)이 일어났던 것이다. 무지개가 신모(神母)의 몸을 두르더니 복희(伏羲)를 낳고, 용이 여등(女登)에게 교접하더니 염제(炎帝)를 낳았다. 황아(皇娥)가 궁상(窮桑)이라는 들판에서 노는데 자칭 백제(白帝)의 아들이라고 하는 신동(神童)이 와서 황아와 교접하여 소호(少昊)를 낳았다. 간적(簡狄)은 알[卵] 하나를 삼키더니 설[契]를 낳고 강원(姜嫄)은 한 거인(巨人)의 발자취를 밟고서 기(充)를 낳았다. 요(堯)의 어머니는 잉태한 지 14개월이 된 뒤에 요(堯)를 낳았고, 패공(沛公)의 어머니는 용(龍)과 큰 연못에서 교접해 패공을 낳았다. 이 뒤로도 이런 일이 많지만 여기에선 다 기록할 수가 없다.
이렇게 볼 때 삼국(三國)의 시조가 모두 신비스러운 데서 나왔다고 하는 것이 어찌 괴이할 것이 있으랴. 이 기이편을 이 책의 첫머리에 싣는 것은 그 뜻이 실로 여기에 있다.
고조선(古朝鮮) 왕검조선(王儉朝鮮)
<위서(魏書)>에 이렇게 말했다. “지금으로부터 2,000년 전에 단군 왕검이 있었다. 그는 아사달(阿斯達; 경經에는 무엽산無葉山이라 하고 또는 백악白岳이라고도 하는데 백주白州에 있었다. 혹은 또 개성開城 동쪽에 있다고도 한다. 이는 바로 지금의 백악궁白岳宮이다)에 도읍을 정하고 새로 나라를 세워 국호(國號)를 조선(朝鮮)이라고 불렀으니 이것은 고(高)와 같은 시기였다.”
또 <고기(古記)>에는 이렇게 말했다. “옛날에 환인(桓因; 제석帝釋을말함)의 서자(庶子) 환웅(桓雄)이란 이가 있었는데 자주 천하를 차지할 뜻을 두어 사람이 사는 세상을 탐내고 있었다. 그 아버지가 아들의 뜻을 알고 삼위태백산(三位太伯山)을 내려다보니 인간들을 널리 이롭게 해 줄 만했다. 이에 환인은 천부인(天符印) 세 개를 환웅(桓雄)에게 주어 인간(人間)의 세계를 다스리게 했다. 환웅(桓雄)은 무리 3,000명을 거느리고 태백산(太伯山) 마루턱(곧 태백산太白山은 지금의 묘향산妙香山)에 있는 신단수(神檀樹) 밑에 내려왔다. 이곳을 신시(神市)라 하고, 이 분을 환웅천왕(桓雄天王)이라고 이른다. 그는 풍백(風伯)·우사(雨師)·운사(雲師)를 거느리고 곡식·수명(壽命)·질병(疾病)·형벌(刑罰)·선악(善惡) 등을 주관하고, 모든 인간의 360여 가지 일을 주관하여 세상을 다스리고 교화(敎化)했다. 이때 범 한 마리와 곰 한 마리가 같은 굴 속에서 살고 있었는데 그들은 항상 신웅(神雄), 즉 환웅에게 빌어 사람이 되어지기를 원했다. 이때 신웅이 신령스러운 쑥 한 줌과 마늘 20개를 주면서 말하기를 ‘너희들이 이것을 먹고 백일동안 햇빛을 보지 않으면 곧 사람이 될 것이다’했다.
이에 곰과 범이 이것을 받아서 먹고 삼칠일(21일) 동안 조심했더니 곰은 여자의 몸으로 변했으나 범은 조심을 잘못해서 사람의 몸으로 변하지 못했다. 웅녀(熊女)는 혼인해서 같이 살 사람이 없으므로 날마다 단수(壇樹) 밑에서 아기 배기를 축원했다. 환웅이 잠시 거짓 변하여 그와 혼인했더니 이내 잉태해서 아들을 낳았다. 그 아기의 이름을 단군 왕검(檀君王儉)이라 한 것이다. 단군 왕검은 당고(唐高)가 즉위한 지 50년인 경인년(庚寅年; 요堯가 즉위한 원년元年은 무진戊辰년이다. 그러니 50년은 정사丁巳요, 경인庚寅은 아니다. 이것이 사실이 아닌지 의심스럽다)에 평양성(平壤城; 지금의 서경西京)에 도읍하여 비로소 조선(朝鮮)이라고 불렀다. 또 도읍을 백악산(白岳山) 아사달(阿斯達)로 옮기더니 궁홀산(弓忽山; 일명 방홀산方忽山)이라고도 하고 금미달(今彌達)이라고도 한다. 그는 1,500년 동안 여기에서 나라를 다스렸다. 주(周)나라 호왕(虎王)이 즉위한 기묘(己卯)년에 기자(箕子)를 조선(朝鮮)에 봉했다. 이에 단군(檀君)은 장당경(藏唐京)으로 옮겼다가 뒤에 돌아와서 아사달(阿斯達)에 숨어서 산신(山神)이 되니, 나이는 1908세였다고 한다.“
당나라 <배구전(裴矩傳)>에는 이렇게 전한다. “고려(高麗)는 원래 고죽국(孤竹國; 지금의 해주海州)이었다. 주(周)나라에서 기자(箕子)를 봉해 줌으로 해서 조선(朝鮮)이라 했다. 한(漢)나라에서는 세 군(郡)으로 나누어 설치하였으니 이것은 곧 현토(玄▩)·낙랑(樂浪)·대방(帶方;북대방北帶方)이다.”
<통전(通典)>에도 역시 이 말과 같다(한서漢書에는 진번眞蕃·임둔臨屯·낙랑樂浪·현토玄菟의 네 군郡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 여기에는 세 군郡으로 되어 있고, 그 이름도 같지 않으니 무슨 까닭일까?).
위만조선(魏(衛)滿朝鮮)
<전한서(前漢書)>의 조선전(朝鮮傳)에는 이렇게 씌어져 있다. “맨 처음 연(燕)나라 때부터 진번(眞蕃)·조선(朝鮮; 안사고顔師古는 말하기를, 전국戰國 시대에 연燕나라가 처음으로 이 땅을 침략해서 차지했다고 한다)을 침략해서 이를 차지하고, 관리들을 두어 변방(邊方)의 요새(要塞)를 쌓았다. 그 뒤에 진(秦)이 연(燕)을 멸망시키자 이 땅을 요동군(遼東郡) 변방에 소속시켰다. 한(漢)나라가 일어나자 이 땅이 너무 멀어 지킬 수 없다 하여 다시 요동의 옛날 요새(要塞)를 수리해서 쌓고 패수(浿水)로 경계를 삼아(안사고顔師古는 말하기를, 패수浿水는 낙랑군樂浪郡에 있다고 했다) 연(燕)나라에 소속시켰다.
연(燕)나라 왕 노관(盧綰)이 한(漢)나라를 배반하고 흉노(匈奴)에게로 들어가니, 연(燕)나라 사람 위만(衛滿)은 망명(亡命)해서 무리 1,000여 명을 모아 요동(遼東)의 요새지를 넘어 도망하여 패수(浿水)를 건넜다. 여기에서 진(秦)나라의 옛 빈 터전인 상하(上下)의 변방에 자리를 잡고 살았다. 차츰 진번(眞蕃)·조선(朝鮮)의 오랑캐들과 또 옛날에 연(燕)과 제(齊)에서 망명(亡命)해 온 자들을 자기에게 소속시켜 왕이 되어 왕검(王儉; 이기李寄는 땅이름이라 했고, 신찬臣瓚은 말하기를 왕검성王儉城은 낙랑군樂浪郡의 패수浿水 동쪽에 있다고 했다)에 도읍했다. 위만(衛滿)은 군사의 위력(威力)으로 그 이웃의 조그만 읍(邑)들을 침략하여 항복시켰다. 이에 진번(眞蕃)과 임둔(臨屯)이 모두 복종해 와서 그에게 예속되니 사방이 수천 리나 되었다. 위만은 아들에게 왕위를 전하고 손자 우거(右渠; 안사고顔師古는 말하기를, 위만의 손자 이름이 우거右渠라고 했다)에게 이르렀다.
진번과 진국(辰國)이 한나라에 글을 올려 천자(天子)를 뵙고자 했으나 우거(右渠)는 길을 가로막고 지나지 못하게 했다(안사고顔師古는 말하기를, 진국辰國은 진한辰韓이라고 했다). 원봉(元封) 2년에 한나라에서는 섭하(涉何)를 보내어 우거를 타일렀지만 우거는 끝내 명령을 듣지 않았다. 섭하(涉何)는 그곳을 떠나 국경에 이르러 패수에 당도하자 말을 모으는 구종(驅從)을 시켜서 자기를 호송(護送)하러 온 조선의 비왕(裨王) 장(長; 안사고顔師古는 말하기를, 장長은 섭하涉何를 호송護送하는 자의 이름이라고 했다)을 찔러 죽였다. 그리고는 곧 패수를 건너 달려서 변경 요새를 넘어 자기 나라에 돌아가 이 사실을 보고했다.
한나라 천자는 섭하를 임명하여 요동의 동부(東部) 도위(都尉)를 삼았다. 조선은 섭하를 원망하여 불의에 그를 쳐 죽였다. 천자는 누선장군(樓船將軍) 양복(楊僕)을 보내서 제(齊)에서 배를 타고 발해(渤海)로 건너가 조선을 치게 하니 병력은 5만이었다. 좌장군(左將軍) 순체(荀彘)는 요동으로 나와서 우거(右渠)를 쳤다. 우거는 지세가 험한 곳에 군사를 내어 그를 막았다. 누선장군(樓船將軍)은 제(齊)의 군사 7,000명을 거느리고 먼저 왕검성(王儉城)에 이르렀다. 이때 우거는 성을 지키고 있었는데 누선(樓船)의 군사가 얼마 되지 않는 것을 정탐해서 알고 곧 나가서 누선을 공격하니 누선을 패해 달아났다. 누선장군(樓船將軍) 양복은 군사들을 잃고 산 속으로 도망해서 죽음을 면했다. 좌장군(左將軍) 순체(荀彘)도 조선의 패수 서쪽을 쳤지만 깨뜨리지 못했다.
천자는 누선장군과 좌장군의 형세가 이롭지 못하다고 생각하고 이에 위산(胃散)을 시켜 군병(軍兵)의 위력을 가지고 가서 우거를 타이르게 했다. 우거는 항복하기를 청하고 태자(太子)를 보내어 말[馬]을 바치겠다고 했다. 그리하여 1만여 명이나 되는 병력을 거느리고 바야흐로 패수를 건너려 하는데 사자(使者)인 위산과 좌장군은 혹시 변을 일으킬까 의심하여 태자에게 일렀다. ‘이미 항복한 터이니 병기(兵器)는 가지고 오지 마시오.’ 태자도 사자인 위산이 혹 자기를 속여 해치지 않을까 의심하여 마침내는 패수를 건너지 않고 군사를 데리고 돌아갔다. 이 사실을 천자에게 보고하자 천자는 위산을 목베었다. 좌장군(左將軍)은 패수 상류에 있는 조선 군사를 깨뜨리고 바로 전진하여 왕검성 밑에까지 이르러 성의 서북쪽을 포위했다. 누선장군도 역시 왕검성 밑으로 와서 군사를 합쳐 성 남쪽에 주둔했다. 우거가 굳게 성을 지켜 몇 달이 지나도 함락시킬 수가 없었다.
천자는 이 싸움이 오래 되어도 끝이 나지 않자 옛날 제남태수(濟南太守) 공손수(公孫遂)를 시켜서 치게 하고, 모든 일을 편의에 의해서 처리하게 했다. 공손수는 우선 누선장군을 묶어 놓고 그 군사를 합쳐서 좌장군과 함께 급히 조선을 공격했다. 이때 조선의 상(相) 노인(路人)과 상(相) 한도(韓陶)와 또 이계(尼谿)의 상(相) 삼(參)과 장군(將軍) 왕겹(王唊; 안사고顔師古는 말하기를, 이계尼谿는 지명地名으로 이들은 모두 네 명名이라고 했다)은 서로 의논하여 항복하려 했으나 왕은 이 말을 좇으려 하지 않았다. 이에 한도(韓陶; 음陰)와 왕겹(王唊)은 모두 도망해서 한나라에 항복했고 노인은 도중에서 죽었다. 원봉(元封) 3년 여름에 이계(尼谿)의 상(相) 삼(參)은 사람들을 시켜서 왕 우거를 죽이고 한나라에 항복했다. 하지만, 왕검성은 아직도 함락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우거의 대신(大臣)인 성기(成己)가 또 자기 나라를 배반했다. 좌장군(左將軍)은 우거의 아들 장(長)과 노인(路人)의 아들 최(最)로 하여금 자기들의 백성을 타이르고 성기를 죽이도록 했다. 이리하여 마침내 조선을 평정하고 진번·임둔·낙랑·현토(玄▩)의 네 군(郡)으로 삼았다.
마한(馬韓)
위지(魏志)에 이렇게 말했다. “위만(魏滿)이 조선(朝鮮)을 공격하자 조선왕(朝鮮王) 준(準)은 궁인(宮人)과 좌우 사람을 거느리고 바다를 건너 서쪽 한(漢)의 땅에 이르러 나라를 세우고 마한(馬韓)이라고 했다.”
또 견훤(甄萱)이 고려(高麗) 태조(太祖)에게 올린 글에, “옛적에 마한이 먼저 일어나고 뒤를 이어 혁거세(赫居世)가 일어났으며, 백제(百濟)는 금마산(金馬山)에서 나라를 세웠다”고 했다.
최치원(崔致遠)은 이렇게 말했다. “마한은 고구려(高句麗)이고, 진한(辰韓)은 신라(新羅)다.”(<삼국사기三國史記> 본기本紀에 의하면 신라新羅는 먼저 갑자甲子년에 일어났고, 고구려高句麗는 그 뒤 갑신甲申년에 일어났다고 했다. 여기에 말한 것은 조선왕朝鮮王 준準을 가리킨 것이다. 이것으로 본다면 동명왕東明王이 일어날 때에 마한馬韓까지 차지했던 것을 알 수가 있다. 때문에 고구려高句麗를 마한馬韓이라고 부른다. 지금 사람들은 혹 금마산金馬山이 있다고 해서 마한馬韓을 백제百濟라고 하지만 이것은 대개 잘못된 말이다. 고구려高句麗 땅에는 본래 읍산邑山이 있었기 때문에 이름을 마한馬韓이라 한 것이다)
사이(四夷)·구이(九夷)·구한(九韓)·예맥(穢貊)이 있는데, <주례(周禮)>에 직방씨(職方氏)가 사이(四夷)와 구맥(九貊)을 관장(管掌)했다고 한 것은 동이(東夷)의 종족이니 곧 구이(九夷)를 말한 것이다.
<삼국사(三國史)>에는 이렇게 씌었다. “명주(溟州)는 옛날의 예국(穢國)이었다. 야인(野人)이 밭을 갈다가 예왕(穢王)의 도장을 얻어서 바쳤다. 또 춘주(春州)는 옛날의 우수주(牛首州)인데 곧 옛날의 맥국(麥麴)이다. 또 혹은 지금의 삭주(朔州)가 바로 맥국(貊國)이다. 혹은 평양성(平壤城)이 맥국이다.”
<회남자(淮南子)> 주(注)에는, “동방(東方)의 오랑캐는 아홉 종류나 된다”고 했다.
<논어정의(論語正義)>에는 “구이(九夷)란, 1은 현토(玄▩), 2는 낙랑(樂浪), 3은 고려(高麗), 4는 만식(萬飾), 5는 부유(鳧臾), 6은 소가(嘯歌), 7은 동도(同屠), 8은 왜인(倭人), 9는 천비(天鄙)이다”라고 했다.
<해동안홍기(海東安弘紀)>에는, “구한(九韓)이란, 1은 일본(日本), 2는 중화(中華), 3은 오월(吳越), 4는 탁라(乇羅), 5는 응유(鷹遊), 6은 말갈(靺鞨), 7은 단국(丹國), 8은 여진(如眞), 9는 예맥(穢貊)이다”라고 했다.
이부(二府)
<전한서(前漢書)>에 이렇게 말했다. “소제(昭帝) 시원(始元) 5년 기해(己亥)년 두 외부(外府)를 두었다. 이것은 조선(朝鮮)의 옛 땅인 평나(平那)와 현토군(玄菟郡) 등을 평주도독부(平州都督府)로 삼고, 임둔(臨屯) ·낙랑(樂浪) 등 두 군(郡)의 땅에 동부도위부(東部都尉府)를 둔 것을 말함이다.”(내가 생각하기에 조선전朝鮮傳에는 진번眞蕃·현토玄菟·임둔臨屯·낙랑樂浪 등 네 군郡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 지금 이 글에는 평나平那가 있고 진번眞蕃이 없으니 대개 한 지방을 두 이름으로 불렀던 것 같다)
칠십이국(七十二國)
<통전(通典)>에 이렇게 말했다. “조선의 유민(遺民)은 모두 70여 나라로 나뉘어 있는데 이들은 모두 땅이 사방(四方) 백 리(百里)이다.”
또 <후한서(後漢書)>에는 “서한(西漢)이 조선의 옛 땅에 처음으로 네 군(郡)을 두었다가 뒤에 두 부(府)를 두었다. 법령(法令)이 차츰 번거로워지자 이것을 78개의 나라로 나누니, 이들은 각각 만호(萬戶)였다”했다(마한馬韓은 서쪽에 있어 54개의 조그만 읍邑을 가지고 있었는데 모두 나라라고 불렀다. 진한辰韓은 동쪽에 있고 12개의 작은 읍邑을 차지했는데 모두 나라라고 했다. 변한卞韓은 남쪽에 있어 역시 12개의 작은 읍邑을 차지했는데 이들도 저마다 나라라고 일컬었다).
낙랑국(樂浪國)
전한(前漢) 때 처음으로 낙랑군(樂浪郡)을 두었다. 응소(應邵)는 말하기를 이것을 “고조선국(古朝鮮國)”이라 했다.
<신당서(新唐書)> 주(注)에, “평양성(平壤城)은 옛 한(漢)나라의 낙랑군(樂浪郡)이다”했다.
<국사(國史)>에는 이런 말이 있다. “혁거세(赫居世) 30년에 낙랑(樂浪) 사람들이 신라(新羅)에 항복했다. 또 제3대 노례왕(弩禮王) 4년에 고구려(高句麗)의 제3대 무휼왕(無恤王)이 낙랑(樂浪)을 멸망시키니 그 나라 사람들은 대방(帶方; 북대방北帶方)과 함께 신라에 투항해 왔다. 또 무휼왕(無恤王) 27년에 광호제(光虎帝)가 사자(使者)를 보내어 낙랑을 치고 그 땅을 빼앗아 군현(郡縣)을 삼으니, 살수(薩水) 이남의 땅은 한(漢)나라에 소속되었다.”(이상의 여러 글에 의하면 낙랑樂浪이 곧 평양성平壤城이란 것이 마땅하다. 혹은 말하기를, 낙랑樂浪의 중두산中頭山 밑이 말갈靺鞨과의 경계이고, 살수薩水는 지금의 대동강大洞江이라고 한다. 어느 말이 옳은 지 알 수가 없다)
또한 백제(百濟) 온조왕(溫祚王)의 말에는 “동쪽에 낙랑이 있고, 북쪽에 말갈(靺鞨)이 있다”고 했다.
이는 아마도 옛날 한(漢)나라 때 낙랑군에 소속되었던 현(縣)일 것이다. 신라 사람들이 역시 이곳을 낙랑(樂浪)이라고 했기 때문에 지금 고려(高麗)에서도 또한 여기에 따라 낙랑군부인(樂浪郡夫人)이라 불렀다. 또 태조(太祖)가 그 딸을 김부(金傅)에게 시집보내면서 역시 낙랑공주(樂浪公主)라 불렀다.
북대방(北帶方)
북대방(北帶方)은 본래 죽담성(竹覃城)이다. 신라 노례왕(弩禮王) 4년에 대방(帶方) 사람들이 낙랑(樂浪) 사람들과 함께 신라에 항복해 왔다(이것은 모두 전한前漢 때에 설치한 두 군郡의 이름이다. 그 후에 참람되이 나라라고 불러 오다가 이때에 와서 항복한 것이다).
남대방(南帶方)
조위(曹魏) 때 비로소 남대방군(南帶方郡; 지금의 남원부南原府)을 두었기 때문에 남대방이라 한 것이다. 대방의 남쪽은 바닷물이 천 리(千里)나 되는데 한해(澣海)라고 했다(후한後漢 건안建安 연간年間에 마한馬韓 남쪽의 황무지를 대방군帶方郡으로 삼았다. 왜倭와 한漢이 드디어 여기에 속했다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말갈(靺鞨; 혹은 물길勿吉)과 발해(渤海)
<통전(通典)>에 이렇게 말했다. “발해(渤海)는 본래 속말말갈(粟末靺鞨)이다. 그 추장(酋長) 조영(祚榮)에 이르러서 나라를 세우고 국호(國號)를 스스로 진단(震旦)이라고 했다. 선천(先天) 연간(年間; 현종玄宗의 임자년壬子年)에 비로소 말갈(靺鞨)이라는 명칭을 버리고 오로지 발해라고 일컬었다. 개원(開元) 7년(己未)에 조영(祚榮)이 죽자, 그 시호(諡號)를 고왕(高王)이라 했다. 세자(世子)가 대(代)를 이어 왕위에 오르자 명황(明皇)은 그를 책봉하여 왕위를 잇게 했다. 사사로이 연호를 고치고 드디어 해동(海東)의 큰 나라가 되었다. 그 땅에는 오경(五京)·십오부(十五府)·육십이주(六十二州)가 있었다. 후당(後唐) 천성(天成) 초년에 거란(契丹)이 이것을 쳐서 깨쳤다. 그 뒤로는 마침내 거란에게 지배를 받게 되었다.”(<삼국사三國史>에는 이렇게 말했다. “의봉儀鳳 3年, 고종高宗 무인년戊寅年에 고구려의 남은 무리가 그 여당餘黨을 모아 북으로 태백산太伯山 밑에 의지해서 국호를 발해渤海라고 했다. 개원開元 20年 경에 당唐의 명황明皇이 장수를 보내서 발해渤海를 토벌했다. 또 성덕왕聖德王 32年, 현종玄宗 갑술甲戌년에 발해渤海·말갈靺鞨이 바다를 건너 당唐나라 등주登州를 침범하자 현종玄宗은 이를 쳤다.” 또 <신라고기新羅古記>에 이런 말이 있다. “고구려高句麗의 구장舊將 조영祚榮의 성姓은 대씨大氏이다. 그는 남은 군사를 모아 태백산太伯山 남쪽에 나라를 세우고 국호를 발해渤海라고 했다.” 위의 여러 글을 상고하건대 발해渤海는 바로 말갈靺鞨의 별종別種이다. 다만 그 갈라지고 합한 것이 서로 같지 않을 뿐이다. 또 <지장도指掌圖>를 상고해 보면 발해渤海는 만리장성萬里長城 동북東北 모퉁이 밖에 있었다)
가탐(賈眈)의 <군국지(郡國志)>에는, “발해국(渤海國)의 압록(鴨綠) ·남해(南海) ·부여(扶餘) ·추성(橻城) 등 사부(四府)는 모두 고구려(高句麗)의 옛땅이었다. 신라(新羅) 천장군(泉井郡; <지리지地理志>에는 삭주朔州의 영현領縣에 천정군泉井郡이 있었으니 지금의 용주湧州이다)에서 추성부(橻城府)에 이르기까지 도합 39역(三十九驛)이 있다”고 하였다. 또 <삼국사(三國史)>에는 “백제(百濟)의 말년에 발해·말갈·신라가 백제의 땅을 나누어 가졌다”고 했다(이 말에 의하면 발해는 또 나뉘어서 두 나라가 된 것이다).
신라 사람들은, “북쪽에는 말갈이 있고 남쪽에는 왜인(倭人)이 있고, 서쪽에는 백제가 있으니 이것이 바로 나라의 해가 된다”고 했고, 또 “말갈은 땅이 아슬라주(阿瑟羅州)에 연접되어 있다”고 했다.
<동명기(東明記)>에는, “졸본성(卒本城)은 땅이 말갈(혹은 지금의 동진東眞이라 함)에 연접되어 있다. 신라의 제6대 지마왕(祗摩王) 14년(丑乙)에, 말갈의 군사가 북쪽 국경으로 크게 들어와 대령(大嶺)의 성책(城柵)을 습격하고 이하(泥河)로 지나갔다”고 했다.
<후위서(後魏書)>에는, “말갈은 바로 물길(勿吉)이다”고 했고, <지장도(指掌圖)>에는, “읍루(挹婁)와 물길(勿吉)은 다 숙신(肅愼)이다”했다.
흑수(黑水)와 옥저(沃沮)에 대해서는 동파(東坡)의 <지장도(指掌圖)>를 보면 “진한(辰韓) 북쪽에 남북의 흑수(黑水)가 있다”고 했다. 상고하건대, 동명제(東明帝)는 왕위(王位)에 선 지 10년만에 북옥저(北沃沮)를 멸망시켰고, 온조왕(溫祚王) 42년에 남옥저(南沃沮)의 20여 집이 신라(新羅)에 투항(投降)했다. 또 혁거세(赫居世) 52년에 동옥저(東沃沮)가 신라에 와서 좋은 말을 바쳤다고 했다. 그러니 동옥저(東沃沮)란 땅도 있었던 것이다.
<지장도(指掌圖)>에, “흑수(黑水)는 만리장성(萬里長城) 북쪽에 있고, 옥저는 만리장성 남쪽에 있다”고 했다.
이서국(伊西國)
노례왕(弩禮王) 14년에 이서국 사람이 와서 금성(金城)을 공격했다. 운문사(雲門寺)에 옛부터 전해 내려오는 제사납전기(諸寺納田記)에 보면, “정관(貞觀) 6년 임진(壬辰)에 이서군(伊西郡)의 금오촌(今郚村) 영미사(零味寺)에서 밭을 바쳤다”고 했다. 금오촌은 지금 청도(淸道) 땅이니 청도군(淸道郡)이 바로 옛날의 이서군인 것이다.
오가야(五伽耶; <가락국기駕洛國記>의 찬贊을 상고해 보면, 자줏빛 끈 하나가 내려와 둥근 알[난卵] 여섯 개를 내려 주었다. 이 중 다섯 개 알은 각 읍邑으로 돌아가고 한 개는 이 성城에 있어서 수로왕首露王이 되었고, 각 邑으로 돌아간 다섯 개는 각각 다섯 가야伽耶의 주인이 되었다 한다. 그러므로 금관국金官國이 이 다섯 개의 수에 들지 않은 것은 마땅하다. 그런데 <본조사략本朝史略>에는 금관金官까지 그 수에 넣고 창녕昌寧까지 더 기록했으니 잘못이다)
아라(阿羅; 야耶라고도 했다)·가야(伽耶; 지금의 함안咸安)·고령가야(古寧伽倻; 지금의 함녕咸寧)·대가야(大伽耶; 지금의 고령高靈)·성산가야(星山伽耶; 지금의 경산京山 혹은 벽진碧珍)·소가야(小伽耶; 지금의 고성固城)이다.
또 본조사략(本朝史略)에는, “태조(太祖) 천복(天福) 5년 경자(庚子)에 오가야(五伽耶)의 이름을 고쳤다. 즉 1은 금관(金官; 김해부金海府로 됨), 2는 고령(古寧; 지금의 가리현加利縣이 됨), 3은 비화(非火; 지금의 창녕昌寧이니, 고령高靈의 잘못인 듯 싶다)요, 나머지 둘은 아라(阿羅)와 성산(星山)이다”했다(위 주注와 같다. 성산星山은 혹 벽진가야碧珍伽耶라고도 한다).
북부여(北扶餘)
<고기(古記)>에 이렇게 말했다. “전한(前漢) 선제(宣帝) 신작(神爵) 3년 임술(壬戌; 전 58) 4월 8일에 천제(天帝)가 흘승골성(訖升骨城; 대요大遼 의주醫州 지경에 있음)에 내려왔다. 오룡차(五龍車)를 타고 도읍을 정하여 왕이라 일컫고 국호를 북부여(北扶餘)라고 하고, 스스로 이름을 해모수(解慕漱)라고 했다. 아들을 낳아 이름을 부루(扶婁)라 하고 해(解)로 씨(氏)를 삼았다. 왕은 뒤에 상제(上帝)의 명령으로 도읍을 동부여(東扶餘)로 옮겼다. 동명제(東明帝)는 북부여(北扶餘)를 계승하여 일어나서 졸본(卒本州)에 도읍을 정하고 졸본부여(卒本扶餘)가 되었으니, 이것이 곧 고구려(高句麗)의 시조(始祖)이다(아래에 보인다).
동부여(東扶餘)
북부여(北扶餘)의 왕인 해부루(解夫婁)의 대신(大臣) 아란불(阿蘭弗)의 꿈에, 천제(天帝)가 내려와서 말했다. “장차 내 자손을 시켜서 이곳에 나라를 세울 터이니 너는 다른 곳으로 피해 가도록 하라(이것은 동명왕東明王이 장차 일어날 조짐을 말함이다). 동해(東海) 가에 가섭원(迦葉原)이라는 곳이 있는데 땅이 기름지니 왕도(王都)를 세울만 할 것이다.” 이에 아란불(阿蘭弗)은 왕을 권하여 그곳으로 도읍을 옮기고 국호를 동부여(東扶餘)라 했다.
부루(夫婁)는 늙도록 자식이 없었다. 어느 날 산천(山川)에 제사를 지내어 후사(後嗣)를 구했는데, 이때 타고 가던 말이 곤연(鯤淵)에 이르러 큰 돌을 보고는 서로 대하여 눈물을 흘렸다. 왕이 이상히 여기고 사람을 시켜 그 돌을 들추어 보니 거기에 어린애가 하나 있는데 모양이 금빛 개구리와 같았다. 왕은 기뻐하여 말했다. “이것은 필경 하늘이 나에게 아들을 주시는 것이로구나.”
그 아이를 거두어 기르면서 이름을 금와(金蛙)라고 했다. 차츰 자라자 태자(太子)로 삼았고 부루(夫婁)가 죽자 금와가 위를 이어 왕이 되었다. 그리고 다음의 위를 태자 대소(帶素)에게 전했다.
지황(地皇) 3년 임오(壬午)에 이르러서 고구려왕(高句麗王) 무휼(無恤)이 이를 쳐서 대소를 죽이니 이것으로 나라가 없어졌다.
고구려(高句麗)
고구려(高句麗)는 곧 졸본부여(卒本扶餘)다. 혹은 말하기를 지금의 화주(和州), 또는 성주(成州)라고 하지만 이것은 모두 잘못이다. 졸본주(卒本州)는 요동(遼東)의 경계에 있었다.
<국사(國史)> 고려본기(高麗本紀)에 이렇게 말했다. “시조(始祖) 동명성제(東明聖帝)의 성(姓)은 고씨(高氏)요, 이름은 주몽(朱蒙)이다. 이보다 앞서 북부여(北扶餘)의 왕 해부루(解夫婁)가 이미 동부여(東扶餘)로 피해 가고, 부루가 죽자 금와(金蛙)가 왕위를 이었다. 이때 금와는 태백산(太伯山) 남쪽 우발수(優渤水)에서 여자 하나를 만나서 물으니 그 여자는 말하기를, ‘나는 하백(河伯)의 딸로서 이름을 유화(柳化)라고 합니다. 여러 동생들과 함께 물밖으로 나와서 노는데, 남자 하나가 오더니 자기는 천제(天帝)의 아들 해모수(解慕漱)라고 하면서 나를 웅신산(熊神山) 밑 압록강(鴨綠江) 가의 집 속에 유인하여 남몰래 정을 통하고 가더니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부모는 내가 중매도 없이 혼인한 것을 꾸짖어서, 드디어 이곳으로 귀양보냈습니다’” 했다. (<단군기檀君記>에는 “단군檀君이 서하西河의 하백河伯의 딸과 친하여 아들을 낳아서 부루夫婁라고 이름했다”고 했다. 지금 이 기록을 상고해 보면 해모수解慕漱가 하백河伯의 딸과 사사로이 통해서 주몽朱蒙을 낳았다고 했다. <단군기檀君記>에는, “아들을 낳아 이름을 부루夫婁라고 했다” 했으니 그렇다면, 부루夫婁와 주몽朱蒙은 배다른 형제일 것이다)
금와(金蛙)가 이상히 여겨 그녀를 방 속에 가두어 두었더니 햇빛이 방 속으로 비쳐 오는데, 그녀가 몸을 피하면 햇빛은 다시 쫓아와서 비쳤다. 이로 해서 태기가 있어 알[卵] 하나를 낳으니, 크기가 닷 되[五升]들이 만했다. 왕은 그것을 버려서 개와 돼지에게 주게 했으나 모두 먹지 않는다. 다시 길에 내다 버렸더니 소와 말이 그 알을 피해서 가고 들에 내다 버리니 새와 짐승들이 알을 덮어 주었다. 왕이 이것을 쪼개 보려고 했으나 아무리 해도 쪼개지지 않아 그 어머니에게 돌려 주었다. 어머니가 이 알을 천으로 싸서 따뜻한 곳에 놓아 두었더니 한 아이가 껍질을 깨고 나왔는데, 골격과 외모가 영특하고 기이했다. 나이 겨우 일곱 살에 기골이 뛰어나서 범인과 달랐다. 스스로 활과 화살을 만들어 쏘는데 백 번 쏘면 백 번 다 맞히었다. 나라 풍속에 활 잘 쏘는 사람을 주몽(朱蒙)이라고 하므로 그 아이를 주몽이라 이름했다.
금왕에게는 아들 일곱이 있는데 항상 주몽과 함께 놀았으니 재주가 주몽을 따르지 못했다. 장자(長子) 대소(帶素)가 왕에게 말했다. ‘주몽은 사람이 낳은 자식이 아닙니다. 만일 일찍 없애지 않는다면 후환이 있을까 두렵습니다.’ 왕은, 그 말을 듣지 않고 주몽을 시켜 말을 기르게 하니 주몽은 좋은 말을 알아보아 적게 먹여서 여위게 기르고, 둔한 말을 잘 먹여서 살찌게 했다. 이에 왕은, 살찐 말은 자기가 타고 여윈 말은 주몽에게 주었다.
왕의 여러 아들과 신하들이 주몽을 장차 죽일 계획을 하니 주몽의 어머니가 이 기미를 알고 말했다. ‘지금 나라 안 사람들이 너를 해치려고 하는데, 네 재주와 지략(智略)을 가지고 어디를 가면 못 살겠느냐. 빨리 이곳을 떠나도록 해라.’ 이에 주몽은 오이(烏伊) 등 세 사람을 벗으로 삼아 엄수(淹水)에 이르러 물을 보고 말했다. ‘나는 천제(天帝)의 아들이요, 하백(河伯)의 손자이다. 오늘 도망해 가는데 뒤쫓는 자들이 거의 따라오게 되었으니 어찌하면 좋겠느냐.’ 말을 마치니 물고기와 자라가 다리를 만들어 주어 건너게 하고, 모두 건너자 이내 풀어 버려 뒤쫓아오던 기병(騎兵)은 건너지 못했다. 이에 주몽은 졸본주(현토군玄菟郡과의 경계)에 이르러 도읍을 정했다. 그러나 미처 궁실(宮室)을 세울 겨를이 없어서 비류수(沸流水) 위에 집을 짓고 살면서 국호를 고구려(高句麗)라 하고, 고(高)로 씨(氏)를 삼았다(본성本姓은 해解였다. 그러나 지금 천제天帝의 아들을 햇빛을 받아 낳았다 하여 스스로 고高로 씨氏를 삼은 것이다). 이때의 나이 12세로서, 한(漢)나라 효원제(孝元帝) 건소(建昭) 2년 갑신(甲申)에 즉위하여 왕이라 일컬었다. 고구려(高句麗)가 제일 융성하던 때는 21만 508호나 되었다.“
주림전(珠琳傳) 제21권에 이렇게 실려 있다. “옛날 영품리왕(寧稟離王)의 시비(侍婢)가 임신했는데, 상(相) 보는 자가 점을 쳐 말하기를, ‘귀하게 되어 왕이 될 것입니다’고 하자 왕은 ‘내 아들이 아니니 마땅히 죽여야 한다’고 했다. 시비(侍婢)가 말하기를 ‘무슨 이상한 기운이 하늘로부터 내려오더니 임신한 것입니다’했다. 드디어 아이를 낳자 왕은 상서롭지 못한 일이라 하여 돼지우리에 내다 버리니 돼지가 입김을 불어 보호해 주고, 마구간에 내다 버리니 말이 젖을 먹여서 죽지 않게 해 주었다. 이 아이가 자라서 마침내 부여(扶餘)의 왕이 되었다.”(이것은 동명제東明帝가 졸본부여卒本扶餘의 왕이 된 것을 말한 것이다. 이 졸본부여卒本扶餘는 역시 북부여北扶餘의 딴 도읍이다. 때문에 부여왕扶餘王이라 이른 것이다. 영품리寧稟離는 부루왕夫婁王의 다른 칭호이다)
변한(卞韓)과 백제(百濟; 또는 南扶餘라고도 하는데 곧 泗泚(沘)城이다)
신라(新羅)의 시조(始祖) 혁거세(赫居世)가 즉위한 19년 임오(壬午; 前 39)에 변한(卞韓) 사람이 나라를 가지고 항복해 왔다.
<신당서(新唐書)>와 <구당서(舊唐書)>에는 모두 “변한(卞韓)의 후손들이 낙랑(樂浪) 땅에 있었다”했고, <후한서(後漢書)>에는, “변한(卞韓)은 남쪽에 있고, 마한(馬韓)은 서쪽에 있고, 진한(辰韓)은 동쪽에 있다”고 했다.
최치원(崔致遠)은 “변한은 바로 백제(百濟)”라고 했다.
본기(本紀)를 상고해 본다면, 온조왕(溫祚王)이 일어나서 나라를 세운 것은 홍가(鴻嘉) 4년 갑진(甲辰; 前 17)의 일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혁거세(赫居世)나 동명왕(東明王) 시대보다 40여 년이나 뒷 일이 된다. 그런데 <당서(唐書)>에, 변한(卞韓)의 후손들이 낙랑(樂浪) 땅에 살았다고 한 것은 온조왕(溫祚王)의 계통이 동명왕(東明王)에게서 나온 때문에 그렇게 말한 것이다. 혹시 어떤 사람이 낙랑에서 나서 변한(卞韓)에 나라를 세우고, 마한(馬韓) 등과 대치한 일이 온조왕 이전에 있었던 모양이며, 그 도읍한 곳이 낙랑 북쪽에 있었다는 것은 아니다.
어떤 사람이 구룡산(九龍山)을 잘못 알고 역시 변나산(卞那山)이라고 불렀던 까닭에 고구려(高句麗)를 가지고 변한이라고 했다. 하지만 이것은 대개 잘못일 것이다. 마땅히 옛날 현인(賢人)의 말을 좇는 것이 옳을 것이다. 백제 땅에도 변산(卞山)이 있었기 때문에 변한이라 하는 것이다. 백제가 전성(全盛)했을 때는 호수가 15만 2,300이나 되었다.
진한(辰韓; 진한秦韓이라고도 했다)
<후한서(後漢書)>에 이렇게 말했다. “진한(辰韓)의 늙은이가 말하기를 진(秦)나라에서 망명한 사람들이 한국(韓國)에 오자 마한(馬韓)이 동쪽 경계의 땅을 베어 주었다. 그리고 서로 부르기를 도(徒)라고 하여, 마치 진(秦)나라 말에 가까웠다. 그런 때문에 혹은 이곳을 진한(秦韓)이라고 했다. 여기에는 12개의 조그마한 나라들이 있어 각각 1만호(萬戶)나 되는데 저마다 나라라고 일컬었다.”
또 최치원(崔致遠)은 이렇게 말했다. “진한은 본래 연(燕)나라 사람이 피난해 와 있던 곳이다. 그런 때문에 탁수(涿水)의 이름을 따서 그들이 사는 읍(邑)과 마을을 사탁(沙涿)·점탁(漸涿)이라고 불렀다.”(신라新羅 사람의 방언方言에 탁涿의 음音을 도道라고 했다. 때문에 지금도 혹 사량沙梁이라 하는데, 양梁을 도道라고도 읽는다)
신라(新羅) 전성기(全盛期)에는 서울에 17만 8,936호(戶), 1,369방(坊), 55리(里), 35개의 금입택(金入宅; 부윤富潤한 큰집을 말함)이 있었다. 이것은 남택(南宅)·북택(北宅)·우비소택(亏比所宅)·본피택(本彼宅)·양택(梁宅)·지상택(池上宅; 본피부本彼部)·재매정택(財買井宅; 유신공庾信公의 조종祖宗)·북유택(北維宅)·남유택(南維宅; 반향사하방反香寺下坊)·대택(隊宅)·빈지택(賓支宅; 반향사反香寺 북쪽)·장사택(長沙宅)·상앵택(上櫻宅)·하앵택(下櫻宅)·수망택(水望宅)·천택(泉宅)·양상택(楊上宅; 양부梁部 남쪽)·한기택(漢岐宅; 법류사法流寺 남쪽)·비혈택(鼻穴宅; 위와 같음)·판적택(板積宅; 분황사상방芬皇寺上坊)·별교택(別敎宅; 내의 북쪽)·아남택(衙南宅)·금양종택(金梁宗宅; 양관사梁官寺 남쪽)·곡수택(曲水宅; 내의 북쪽)·유야택(柳也宅)·사하택(寺下宅)·사량택(沙梁宅)·정상택(井上宅)·이남택(里南宅; 우소택亏所宅)·사내곡택(思內曲宅)·지택(池宅)·사상택(寺上宅; 대숙택大宿宅)·임상택(林上宅; 청룡사靑龍寺의 동쪽으로 못이 있음)·교남택(橋南宅)·항질택(巷叱宅; 본피부本彼部)·누상택(樓上宅)·이상택(里上宅)·명남택(椧南宅)·정하택(井下宅)이 있었다.
우사절유택(又四節遊宅)
봄에는 동야택(東野宅), 여름에는 곡량택(谷良宅), 가을에는 구지택(仇知宅), 겨울에는 가이택(加伊宅)에서 놀았다.
제49대 헌강대왕(憲康大王) 때에는 성 안에 초가집은 하나도 없고, 집의 처마와 담이 이웃집과 서로 연해 있었다. 또 노랫소리와 피리 부는 소리가 길거리에 가득 차서 밤낮으로 끊이지 않았다.
신라시조(新羅始祖) 혁거세왕(赫居世王)
진한(辰韓) 땅에는 옛날에 여섯 촌(村)이 있었다. 1은 알천양산촌(閼川楊山村)이니 그 남쪽은 지금의 담엄사(曇嚴寺)이다. 촌장(村長)은 알평(謁平)이니 처음에 하늘에서 표암봉(瓢嵓峰)에 내려왔으니 이가 급량부(及梁部) 이씨(李氏)의 조상이 되었다(노례왕弩禮王 9년에 부部를 두어 급량부及梁部라고 했다. 고려高麗 태조太祖 천복天福 5년 경자庚子(940)에 중흥부中興部라고 이름을 고쳤다. 파잠波潛·동산東山·피상彼上의 동촌東村이 여기에 소속된다).
2는 돌산(突山) 고허촌(高墟村)이니, 촌장(村長)은 소벌도리(蘇伐都利)이다. 처음에 형산(兄山)에 내려왔으니 이가 사량부(沙梁部; 양梁은 도道라고 읽고 혹 탁涿으로도 쓴다. 그러나 역시 도道라고 읽는다) 정씨(鄭氏)의 조상이 되었다. 지금은 남산부(南山部)라 하여 구량벌(仇梁伐)·마등오(麻等烏)·도북(道北)·회덕(廻德) 등 남촌(南村)이 여기에 소속된다(지금이라고 한 것은 고려태조高麗太祖 때에 설치한 것이다. 아래도 이와 같다).
3은 무산(茂山) 대수촌(大樹村)이다. 촌장(村長)은 구(俱; 구仇라고도 씀) 예마(禮馬)이다. 처음에 이산(伊山; 개비산皆比山이라고도 함)에 내려왔으니 이가 점량부(漸梁(혹은 涿)部), 또는 모량부(牟梁部) 손씨(孫氏)의 조상이 되었다. 지금은 장복부(長福部)라고 한다. 여기에는 박곡촌(朴谷村) 등 서촌(西村)이 소속된다.
4는 취산(觜山) 진지촌(珍支村; 빈지賓之·빙지冰之라고도 한다)이다. 촌장(村長)은 지백호(智伯虎)로 처음에 화산(花山)에 내려왔으니 이가 본피부 최씨(本彼部崔氏)의 조상이 되었다. 지금은 통선부(通仙部)라 한다. 시파(柴杷) 등 동남촌(東南村)이 여기에 소속된다. 최치원(崔致遠)은 바로 본피부(本彼部) 사람이다. 지금은 황룡사(黃龍寺) 남쪽 미탄사(味呑寺) 남쪽에 옛 터가 있다고 한다. 이것이 바로 최후(崔侯)의 옛집임이 분명하다.
5는 금산(金山) 가리촌(加利村; 지금의 금강산金剛山 백율사栢栗寺 북쪽 산)이다. 촌장(村長)은 지타(祗沱; 혹은 지타只他)이다. 처음에 명활산(明活山)에 내려왔으니 이가 습비부(習比部) 설씨(薛氏)의 조상이다. 지금은 임천부(臨川部)라고 하는데 물이촌(勿伊村)·잉구미촌(仍仇弥村)·궐곡(闕谷) 등 동북촌(東北村)이 여기에 소속되었다.
위의 글을 상고해 보건대, 이 여섯 부(部)의 조상들은 모두 하늘에서 내려온 것 같다. 노례왕(弩禮王; 윤리왕倫理王) 9년(32)에야 비로소 여섯 부(部)의 명칭을 고치고, 또 그들에게 여섯 성(姓)을 주었다. 지금 풍속에는 중흥부(中興部)를 어머니로 삼고, 장복부(長福部)를 아버지, 임천부(臨川部)를 아들, 가덕군(加德郡)을 딸로 삼고 있다. 하지만 그 실상은 자세히 알 수가 없다.
전한(前漢) 지절(地節) 원년(元年) 임자(壬子; 前 69, 고본古本에는 건호建虎 원년元年이라 했고, 건원建元 3년이라고도 했다. 하지만 이것은 모두 잘못이다) 3월 초하루에 상부(上部)의 조상들은 저마다 자제(子弟)를 거느리고 알천(閼川) 언덕 위에 모여 의논했다. “우리들은 위로 임금이 없어 백성들을 다스리지 못하기 때문에 백성들은 모두 방자하여 저 하고자 하는 대로 하고 있다. 그러니 어찌 덕이 있는 사람을 찾아서 임금을 삼아, 나라를 세우고 도읍을 정하지 않는단 말인가.”
이에 그들이 높은 곳에 올라 남쪽을 바라보니 양산(楊山) 밑 나정(蘿井)이라는 우물 가에 번갯빛처럼 이상한 기운이 땅에 닿도록 비치고 있다. 그리고 흰 말 한 마리가 땅에 굻어 앉아 절하는 형상을 하고 있었으므로 그곳을 찾아가 조사해 보았더니 거기에는 자줏빛 알 한 개(혹은 푸른 큰 알이라고도 함)가 있다. 그러나 말은 사람을 보더니 길게 울고는 하늘로 올라가 버렸다. 알을 깨고서 어린 사내아이를 얻으니, 그는 모양이 단정하고 아름다웠다. 모두 놀라 이상하게 여겨 그 아이를 동천(東泉; 동천사東泉寺는 사뇌야詞腦野 북쪽에 있다)에 목욕시켰더니 몸에서 광채가 나고 새와 짐승들이 따라서 춤을 췄다. 이내 천지가 진동하고 해와 달이 청명해졌다. 이에 그 아이를 혁거세왕(赫居世王)이라고 이름하고(이 혁거세赫居世는 필경 향언鄕言일 것이다. 혹은 불구내왕弗矩內王이라고도 하니 밝게 세상을 다스린다는 뜻이다. 해설하는 자는 말하기를, “이는 서술성모西述聖母가 낳을 때의 일이다. 그런 때문에 중국사람들이 선도성모仙桃聖母를 찬양한 말에, 어진 이를 낳아서 나라를 세웠다는 말이 있으니 바로 이 까닭이다”한다. 또 계룡雞龍이 상서祥瑞를 나타내어 알영閼英을 낳았다는 이야기도 어찌 서술성모西述聖母의 현신現身을 말한 것이 아니겠는가) 위호(位號)를 거슬감(居瑟邯)이라고 했다(혹은 거居西干이라고도 하니 그가 처음 입을 열 때에 스스로 말하기를, “알영거서간閼英居西干이 한번 일어났다”한 그 말로 인해서 일컬은 것이다. 이 뒤부터 모든 왕자王者의 존칭이 거서간居西干으로 되었다).
이에 당시 사람들은 다투어 치하하기를, “이제 천자(天子)가 이미 내려왔으니 마땅히 덕 있는 왕후(王后)를 찾아 배필을 삼아야 합니다”했다.
이날 사량리(沙梁里)에 있는 알영정(閼英井; 아리영정娥利英井이라고 함) 가에 계룡(鷄龍)이 나타나서 왼쪽 갈비에서 어린 계집애를 낳았다(혹은 용龍이 나타났다가 죽었는데 그 배를 가르고 계집애를 얻었다고 했다). 얼굴과 모습이 매우 고왔으나 입술이 마치 닭의 입부리와 같았다. 이에 월성(月城) 북쪽에 있는 냇물에 목욕을 시켰더니 그 부리가 떨어졌다. 이 일 대문에 그 내를 발천(撥川)이라고 한다.
남산(南山) 서쪽 기슭(지금의 창림사昌林寺)에 궁실(宮室)을 세우고 이들 두 성스러운 어린이를 모셔다가 길렀다. 남자아이는 알에서 낳았고, 그 알의 모양이 박[匏]과 같았는데, 향인(鄕人)들은 박을 ‘박(朴)’이라고도 하기 때문에 성(姓)을 박(朴)이라고 했다. 또 여자아이는 그가 나온 우물 이름으로 이름을 삼았다. 두 성인(聖人)은 13세가 되자 오봉(五鳳) 원년(元年) 갑자(甲子; 전 57)에, 남자는 왕이 되어 이내 그 여자로 왕후(王后)를 삼았다.
나라 이름을 서라벌(徐羅伐), 또는 서벌(徐伐; 지금 풍속에 경京을 서벌이라고 부르는 것은 이 때문이다)이라 하고, 혹은 사라(斯羅)·사로(斯盧)라고도 했다. 처음에 왕이 계정(鷄井)에서 탄생했기 때문에 혹 나라 이름을 계림국(鷄林國)이라고도 했다. 이것은 계룡(鷄龍)이 상서(祥瑞)를 나타냈기 때문이다. 일설(一說)에는 탈해왕(脫解王) 때 김알지(金閼智)를 얻는데 닭이 숲속에서 울었다 해서 국호(國號)를 계림(鷄林)이라 했다고도 한다. 후세에 와서 드디어 신라(新羅)라는 국호로 정했던 것이다.
나라를 다스린 지 61년 되던 어느 날 왕은 하늘로 올라갔는데 7일 뒤에 그 죽은 몸뚱이가 땅에 흩어져 떨어졌다. 그러더니 왕후(王后)도 역시 왕을 따라 세상을 떠났다 한다. 나라 사람들은 이들을 합해서 장사지내려 했으나 큰 뱀이 나타나더니 쫓아다니면서 이를 방해하므로 오체(五體)를 각각 장사지내어 오릉(五陵)을 만들고, 또한 능의 이름을 사릉(蛇陵)이라고 했다. 담엄사(曇嚴寺) 북릉(北陵)이 바로 이것이다. 태자(太子) 남해왕(南解王)이 왕위를 계승했다.
제2대 남해왕(南解王)
남해거서간(南解居西干)을 차차웅(次次雄)이라고도 한다. 이것은 존장(尊長)에 대한 칭호인데 오직 남해왕(南解王)만을 차차웅(次次雄)이라고 불렀다. 아버지는 혁거세(赫居世)요, 어머니는 알영부인(閼英夫人)이며, 비(妃)는 운제부인(雲帝夫人; 운제雲梯라고도 한다. 지금 영일현迎日縣 서쪽에 운제산雲梯山 성모聖母가 있는데 가뭄 때 여기에 기도를 드리면 감응感應이 있다)이다. 전한(前漢) 평제(平帝) 원시(元始) 4년 갑자(甲子; 4)에 즉위하여 나라를 다스린 지 21년 만인 지황(地皇) 4년 갑신(甲申; 24)에 죽었다. 이 왕이 삼황(三皇)의 첫째라 한다.
<삼국사(三國史)>를 상고해 보면, “신라에서는 왕을 거서간(居西干)이라고 불렀다. 이것은 진한(辰韓)의 말로 왕이란 말이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이는 귀인(貴人)을 부르는 칭호라고 하며, 차차웅(次次雄) 혹은 자충(慈充)이라고도 한다”고 했다.
김대문(金大問)은 말하기를, “차차웅(次次雄)이란 무당을 이르는 방언(方言)이다. 세상 사람들은 무당이 귀신을 섬기고 제사를 숭상하기 때문에 그들을 두려워하고 공경한다. 그래서 드디어 존장(尊長)되는 이를 자충(慈充)이라 한다”고 했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이사금(尼師金)이라고도 하는데 이것은 잇금[齒理]을 이르는 말이다”라고 했다.
처음에 남해왕(南解王)이 죽자 그 아들 노례(弩禮)가 탈해(脫解)에게 왕위를 물려 주려 했다. 이에 탈해(脫解)가 말하기를, “나는 들으니 성스럽고 지혜 있는 사람은 이가 많다고 한다”하고 떡을 입으로 물어 시험해 보았다.
고전(古典)에는 이와 같이 전하고 있다. 어떤 사람은 임금을 마립간(麻立干)이라고도 했다. 이것을 김대문(金大問)은 해석하기를, “마립간(麻立干)이란 서열을 뜻하는 방언(方言)이다. 서열(序列)은 위(位)를 따라 정하기 때문에 임금의 서열은 주(主)가 되고 신하의 서열은 아래에 위치한다. 그래서 이렇게 이름한 것이다”라고 했다.
사론(史論)에는 이렇게 말했다. “신라왕(新羅王)으로서 거서간(居西干)과 차차웅(次次雄)이란 이름을 쓴 이가 각기 하나요, 이사금(尼師金)이라고 한 이가 열 여섯이며, 마립간(麻立干)이라 한 이가 넷이다. 신라 말기의 명유(名儒) 최치원(崔致遠)이 <제왕연대력(帝王年代曆)>을 지을 적에는 모두 모왕(某王)이라고만 하고 거서간(居西干) 등이라고 하지 않았다. 이것은 혹시 그 말이 야비해서 부르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해서인가. 그러나 지금 신라의 일을 기록하는 데 방언(方言)을 모두 그대로 두는 것도 또한 마땅한 일일 것이다.”
신라 사람들은 추봉(追封)된 이들을 갈문왕(葛文王)이라고 불렀는데, 이 일은 자세히 알 수 없다.
남해왕(南解王) 때에 낙랑국(樂浪國) 사람들이 금성(金城)을 침범하다가 이기지 못하고 그대로 돌아갔다. 또 천봉(天鳳) 5년 무인(戊寅; 18)에 고구려(高句麗)의 속국인 일곱 나라가 와서 항복했다.
제3대 노례왕(弩禮王)
박노례이질금(朴弩禮尼叱今; 유례왕儒禮王이라고도 함)이 처음에 매부(妹夫)인 탈해(脫解)에게 왕위(王位)를 물려 주자 탈해는 말했다. “대개 덕이 있는 사람은 이[齒]가 많은 법이오. 그러니 잇금을 가지고 시험해 봅시다.” 이리하여 떡을 물어 시험해 보니 왕의 이가 많았기 때문에 먼저 왕위에 올랐다. 이런 일로 인하여 왕은 잇금[尼叱今]이라고 한 것이다. 이질금(尼叱今)이란 칭호는 이 왕 때부터 시작했다.
유성공(劉聖公) 갱시(更始) 원년(元年) 계미(癸未; 23)에 즉위하여(연표年表에는 갑신甲申년에 즉위했다고 함) 육부(六部)의 이름을 고쳐서 정하고 여섯 성(姓)을 하사했다.
이 때 비로소 도솔가(兜率歌)를 지었으니 차사(嗟辭)와 사뇌격(詞腦格)이 있었다. 또 비로소 보습과 얼음을 저장하는 창고와 수레를 만들었다. 건호(建虎) 18년(42)에 이서국(伊西國)을 쳐서 멸망시켰다. 이 해에 고구려(高句麗) 군사가 침범해 왔다.
제4대 탈해왕(脫解王)
탈해치질금(脫解齒叱今; 토해니사금吐解尼師今이라고도 함)은 남해왕(南解王) 때(고본古本에는 임인壬寅년이라고 했으나 이것은 잘못이다. 가까운 일이라면 노례왕弩禮王의 즉위 초년보다 뒤의 일일 것이니 양위讓位를 다투는 일이 없었을 것이다. 또 먼저의 일이라면 혁거세왕赫居世王 때의 일일 것이다. 그러니 이 일은 임인壬寅년이 아닌 것임을 알겠다)에 가락국(駕洛國) 바다 가운데에 배 한 척이 와서 닿았다. 이것을 보고 그 나라 수로왕(首露王)이 백성들과 함께 북을 치고 법석이면서 그들을 맞아 머물게 하려고 했다. 그러나 그 배는 나는 듯이 계림(鷄林) 동쪽 하서지촌(下西知村)의 아진포(阿珍浦)로 달아났다(지금도 상서지촌上西知村·하서지촌下西知村의 이름이 있다). 이때 마침 포구에 한 늙은 할멈이 있어 이름을 아진의선(阿珍義先)이라고 하였는데 이가 바로 혁거세왕(赫居世王)의 고기잡이 할멈이었다.
그는 이 배를 바라보고 말했다. “이 바다 가운데에는 본래 바위가 없는데 무슨 까닭으로 까치들이 모여들어서 우는가.”
배를 끌어당겨 찾아 보니 까치들이 배 위에 모여들었다. 그 배 안에는 궤 하나가 있었다. 길이는 20척(尺)이오. 너비는 13척이나 된다. 그 배를 끌어다가 나무 숲 밑에 매어 두었다. 그러나 이것이 흉(凶)한 것인지 길(吉)한 것인지 몰라서 하늘을 향해 고했다.
이윽고 궤를 열어 보니 단정히 생긴 사내아이가 하나 있고 아울러 칠보(七寶)의 노비(奴婢)가 가득 차 있었다. 그들을 7일 동안 잘 대접했더니 사내아이는 그제야 말을 했다. “나는 본래 용성국(龍城國) 사람이오(정명국正明國 혹은 완하국琓夏國이라고도 한다. 완하琓夏는 또 화하국花厦國이라고도 하니, 용성龍城은 왜국倭國 동북쪽 1천리 떨어진 곳에 있다). 우리 나라에는 원래 28 용왕(龍王)이 있어서 그들은 모두 사람의 태(胎)에서 났으며 나이 5, 6세부터 왕위(王位)에 올라 만민(萬民)을 가르쳐 성명(性命)을 바르게 했소. 팔품(八品)의 성골(姓骨)이 있는데 그들은 고르는 일이 없이 모두 왕위에 올랐소. 그때 부왕 함달파(含達婆)가 적녀국(積女國)의 왕녀(王女)를 맞아 왕비(王妃)로 삼았소. 오래 되어도 아들이 없자 기도를 드려 아들 낳기를 구하여 7년 만에 커다란 알[卵] 한 개를 낳았소. 이에 대왕은 모든 신하들을 모아 묻기를, ‘사람으로서 알을 낳았으니 고금(古今)에 없는 일이다. 이것은 아마 좋은 일이 아닐 것이다’하고, 궤를 만들어 나를 그 속에 넣고 칠보와 노비들을 함께 배 안에 실은 뒤 바다에 띄우면서 빌기를, ‘아무쪼록 인연 있는 곳에 닿아 나라를 세우고 한 길을 이루도록 해 주시오’했소. 빌기를 마치자 갑자기 붉은 용이 나타나더니 배를 호위해서 지금 여기에 도착한 것이오.”
말을 끝내자 그 아이는 지팡이를 끌고 두 종을 데리고 토함산(吐含山) 위에 올라가더니 돌집을 지어 7일 동안을 머무르면서 성(城)안에 살 만한 곳이 있는가 바라보았다. 산봉우리 하나가 마치 초사흘달 모양으로 보이는데 오래 살 만한 곳 같았다. 이내 그곳을 찾아가니 바로 호공(瓠公)의 집이었다.
아이는 이에 속임수를 썼다. 몰래 숫돌과 숯을 그 집 곁에 묻어 놓고, 이튿날 아침에 문 앞에 가서 말했다. “이 집은 우리 조상들이 살던 집이오.” 호공은 그렇지 않다 하여 서로 다투었다. 시비(是非)가 판결되지 않으므로 이들은 관청에 고발하였다. 관청에서 묻기를, “무엇으로 네 집이라는 것을 증명할 수 있느냐”하자, 어린이는 말했다. “우리 조상은 본래 대장장이었소. 잠시 이웃 고을에 간 동안에 다른 사람이 빼앗아 살고 있는 터요. 그러니 그 집 땅을 파서 조사해 보면 알 수가 있을 것이오.” 이 말에 따라 땅을 파니 과연 숫돌과 숯이 나왔다. 이리하여 그 집을 빼앗아 살게 되었다.
이때 남해왕(南解王)은 그 어린이, 즉 탈해(脫解)가 지혜가 있는 사람임을 알고 맏 공주(公主)로 그의 아내를 삼게 하니 이가 아니부인(阿尼夫人)이다.
어느 날 토해(吐解)는 동악(東岳)에 올라갔다가 내려오는 길에 백의(白衣)를 시켜 물을 떠 오게 했다. 백의(白衣)는 물을 떠 가지고 오다가 중로에서 먼저 마시고는 탈해에게 드리려 했다. 그러나 물그릇 한 쪽이 입에 붙어서 떨어지지 않았다. 탈해가 꾸짖자 백의는 맹세하였다. “이 뒤로는 가까운 곳이거나 먼 곳이거나 감히 먼저 마시지 않겠습니다.” 그제야 물그릇이 입에서 떨어졌다. 이로부터 백의는 두려워하고 복종하여 감히 속이지 못했다.
지금 동악(東岳) 속에 우물 하나가 있는데 세상에서 요내정(遙乃井)이라고 부르는 우물이 바로 이것이다.
노례왕(弩禮王)이 죽자 광호제(光虎帝) 중원(中元) 6년 정사(丁巳; 57) 6월에 탈해(脫解)는 왕위에 올랐다. 옛날에 남의 집을 내 집이라 하여 빼앗았다 해서 석씨(昔氏)라고 했다. 혹 또 까치로 해서 궤를 열게 되었기 때문에 까치[鵲]라는 글자에서 조자(鳥字)를 떼고 석씨(昔氏)로 성(姓)을 삼았다고도 한다. 또 궤를 열고 알을 벗기고 나왔다 해서 이름을 탈해(脫解)로 했다고 한다.
그는 재위(在位) 23년 만인 건초(建初) 4년 기묘(己卯; 29)에 죽어서 소천구(疏川丘) 속에 장사지냈다. 그런데 뒤에 신(神)이 명령하기를, “조심해서 내 뼈를 묻으라”고 했다.
그 두골(頭骨)의 둘레는 석 자 두 치, 신골(身骨)의 길이는 아홉 자 일곱 치나 된다. 이[齒]는 서로 엉기어 하나가 된 듯도 하고 뼈마디는 연결되어 있었다. 이것은 이른바 천하에 짝이 없는 역사(力士)의 골격(骨格)이었다. 이것을 부수고 소상(塑像)을 만들어 대궐 안에 모셔 두었다. 그랬더니 신(神)이 또 말하기를, “내 뼈를 동악(東岳)에 안치해 두어라”했다. 그래서 거기에 봉안케 했던 것이었다(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탈해脫解가 죽은 뒤 27世 문호왕文虎王 때 조로調露 2년 경진庚辰(680) 3월 15일 신유辛酉 밤 태종太宗의 꿈에, 몹시 사나운 모습을 한 노인이 나타나 말하였다. “내가 탈해脫解이다. 내 뼈를 소천구疏川丘에서 파내다가 소상塑像을 만들어 토함산吐含山에 안치하도록 하라.” 王은 그 말을 좇았다고 한다. 그런 까닭에 지금까지 제사를 끊이지 않고 지내니 이를 동악신東岳神이라고 한다).
김알지(金閼智), 탈해왕대(脫解王代)
영평(永平) 3년 경신(庚申; 60, 중원中元 6년이라고도 하나 잘못이다. 중원中元은 모두 2년 뿐이다) 8월 4일에 호공(瓠公)이 밤에 월성(月城) 서리(西里)를 걸어가는데, 크고 밝은 빛이 시림(始林; 구림鳩林이라고도 함) 속에서 비치는 것이 보였다. 자줏빛 구름이 하늘로부터 땅에 뻗쳤는데 그 구름 속에 황금(黃金)의 궤가 나뭇가지에 걸려 있고, 그 빛은 궤 속에서 나오고 있었다. 또 흰 닭이 나무 밑에서 울고 있었다.
이 모양을 호공(瓠公)은 왕에게 아뢰었다. 왕이 그 숲에 가서 궤를 열어보니 동남(童男)이 있는데 누웠다가 곧 일어났다. 이것은 마치 혁거세(赫居世)의 고사(故事)와도 같았으므로 그 말에 따라 그 아이를 알지(閼知)라고 이름지었다. 알지(閼知)란 곧 우리말로 소아(小兒)를 일컫는 것이다. 그 아이를 안고 대궐로 돌아오니 새와 짐승들이 서로 따르면서 기뻐하여 뛰놀고 춤을 춘다.
왕은 길일(吉日)을 가려 그를 태자(太子)로 책봉했다. 그는 뒤에 태자의 자리를 파사왕(破娑王)에게 물려 주고 왕위(王位)에 오르지 않았다. 금궤(金櫃)에서 나왔다 하여 성(姓)을 김씨(金氏)라 했다.
알지는 열한(熱漢)을 낳고 열한은 아도(阿都)를 낳고, 아도는 수류(首留)를 낳고, 수류는 욱부(郁部)를 낳고, 욱부는 구도(俱道; 혹은 구도仇刀)를 낳고, 구도는 미추(未(味)鄒)를 낳으니 미추(未鄒)가 왕위에 올랐다. 이리하여 신라의 김씨(金氏)는 알지에서 시작된 것이다.
연오랑(延烏郞)과 세오녀(細烏女)
제8대 아달라왕(阿達羅王)이 즉위한 4년 정유(丁酉; 157)에 동해(東海) 바닷가에는 연오랑(延烏郞)과 세오녀(細烏女) 부부가 살고 있었다. 어느날 연오랑이 바다에 나가 해조(海藻)를 따고 있는데 갑자기 바위 하나(물고기 한 마리라고도 한다)가 나타나더니 연오랑을 등에 업고 일본(日本)으로 가 버렸다. 이것을 본 나라 사람들은, “이는 범상한 사람이 아니다”하고 세워서 왕을 삼았다(<일본제기日本帝紀>를 상고해 보면 전후前後에 신라 사람으로 왕이 된 사람은 없다. 그러니 이는 변읍邊邑의 조그만 왕王이고 참말 王은 아닐 것이다).
세오녀(細烏女)는 남편이 돌아오지 않는 것이 이상해서 바닷가에 나가서 찾아 보니 남편이 벗어 놓은 신이 있었다. 바위 위에 올라갔더니 그 바위는 또한 세오녀를 업고 마치 연오랑 때와 같이 일본으로 갔다. 그 나라 사람들은 놀라고 이상히 여겨 왕에게 이 사실을 아뢰었다. 이리하여 부부가 서로 만나게 되어 그녀로 귀비(貴妃)를 삼았다.
이때 신라에서는 해와 달에 광채(光彩)가 없었다. 일자(日者)가 왕께 아뢰기를, “해와 달의 정기(精氣)가 우리 나라에 내려 있었는데 이제 일본으로 가 버렸기 때문에 이러한 괴변이 생기는 것입니다”했다. 왕이 사자(使者)를 보내서 두 사람을 찾으니 연오랑은 말한다. “내가 이 나라에 온 것은 하늘이 시킨 일인데 어찌 돌아갈 수가 있겠는가. 그러나 나의 비(妃)가 짠 고운 비단이 있으니 이것으로 하늘에 제사를 드리면 될 것이다.”
이렇게 말하고 비단을 주니 사자가 돌아와서 사실을 보고하고 그의 말대로 하늘에 제사를 드렸다. 그런 뒤에 해와 달의 정기가 전과 같았다. 이에 그 비단을 임금의 창고에 간수하고 국보(國寶)로 삼으니 그 창고를 귀비고(貴妃庫)라 한다. 또 하늘에 제사지낸 곳을 영일현(迎日縣), 또는 도기야(都祈野)라 한다.
미추왕(未鄒王)과 죽엽군(竹葉軍)
제13대 미추니질금(未鄒尼叱今; 미조未祖 또는 미고未古라고 함)은 김알지(金閼智)의 7대손(七代孫)이다. 대대로 현달(顯達)하고, 또 성스러운 덕이 있었다. 첨해왕(沾解王)의 뒤를 이어서 비로소 왕위(王位)에 올랐다(지금 세상에서 미추왕未鄒王의 능陵을 시조당始祖堂이라고도 한다. 이것은 대개 김씨金氏로서 처음 왕위王位에 오른 때문이며, 후대後代의 모든 김씨왕金氏王들이 미추未鄒를 시조始祖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왕위에 있은 지 23년 만에 죽었으며 능(陵)은 흥륜사(興輪寺) 동쪽에 있다.
제14대 유리왕(儒理(禮)王) 때 이서국(伊西國) 사람들이 금성(金城)을 공격해 왔다. 신라에서도 크게 군사를 동원했으나 오랫동안 저항할 수가 없었다. 그때 갑자기 이상한 군사가 와서 신라군을 도왔는데 그들은 모두 댓잎을 귀에 꽂고 있었다. 이들은 신라 군사와 힘을 합해서 적을 격파했다. 그러나 적군이 물러간 뒤에는 이들이 어디로 갔는지 알 수가 없었다. 다만 댓잎만이 미추왕의 능 앞에 쌓여 있을 뿐이었다. 그제야 선왕(先王)이 음(陰)으로 도와 나라에 공을 세웠다는 것을 알았다. 이리하여 그 능을 죽현능(竹現陵)이라고 불렀다.
제37대 혜공왕(惠恭王) 대력(大曆) 14년 기미(己未; 779) 4월에 갑자기 회오리바람이 유신공(庾信公)의 무덤에서 일어나며, 그 가운데 한 사람이 준마(駿馬)를 탔는데 그 모양이 장군(將軍)과 같았다. 또 갑옷을 입고 무기(武器)를 든 40명 가량의 군사가 그 뒤를 따라 죽현능(竹現陵)으로 들어간다. 이윽고 능 속에서 무엇인가 진동(振動)하고 우는 듯한 소리가 나고, 혹은 하소연하는 듯한 소리도 들려왔다. 그 호소하는 말에, “신(臣)은 평생 동안 어려운 시국을 구제하고 삼국(三國)을 통일한 공이 있었습니다. 이제 혼백이 되어서도 나라를 보호하여 재앙을 제거하고 환난을 구제하는 마음은 잠시도 변함이 없습니다. 하온데 지난 경술(庚戌)년에 신의 자손이 아무런 죄도 없이 죽음을 당하였으니, 이것은 임금이나 신하들이 나의 공렬(功烈)을 생각지 않는 것입니다. 신은 차라리 먼 곳으로 옮겨가서 다시는 나라를 위해서 힘쓰지 않을까 합니다. 바라옵건대 왕께서는 허락해 주십시오”한다. 왕은 대답한다. “나의 공(公)이 이 나라를 지키지 않는다면 저 백성들을 어떻게 할 것인가. 공(公)은 전과 같이 힘쓰도록 하오.” 세 번이나 청해도 세 번 다 듣지 않는다. 이에 회오리바람은 돌아가고 말았다.
혜공왕(惠恭王)은 이 소식을 듣고 두려워하여 이내 대신(大臣) 김경신(金敬信)을 보내서 김유신공(金庾信公)의 능에 가서 잘못을 사과하고 김공(金公)을 위해서 공덕보전(功德寶田) 30결(結)을 취선사(鷲仙寺)에 내려서 공(公)의 명복(冥福)을 빌게 했다. 이 절은 김공이 평양(平壤)을 토벌(討伐)한 뒤에 복을 빌기 위하여 세웠던 절이기 때문이다.
이때 미추왕(未鄒王)의 혼령(魂靈)이 아니었던들 김공의 노여움을 막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러니 미추왕의 나라를 수호한 힘은 크다고 아니할 수 없다. 그런 때문에 나라 사람들이 그 덕을 생각하여 삼산(三山)과 함께 제사지내어 조금도 소홀히 하지 않으며, 그 서열(序列)을 오릉(五陵)의 위에 두어 대묘(大廟)라 일컫는다 한다.
내물왕(奈勿王; 나밀왕那密王이라고도 함)과 김제상(金(朴)堤上)
제17대 나밀왕(那密王)이 즉위한 36년 경인(庚寅; 390)에 왜왕(倭王)이 보낸 사신이 와서 말했다. “우리 임금이 대왕(大王)이 신성(神聖)하다는 말을 듣고 신(臣) 등으로 하여금 백제(百濟)가 지은 죄를 대왕에게 아뢰게 하는 것입니다. 원컨대 대왕께서는 왕자(王子) 한 분을 보내서 우리 임금에게 신의를 표하게 하십시오.” 이에 왕은 셋째아들 미해(美海; 미토희未吐喜라고도 함)를 왜국에 보냈다. 이때 미해는 열 살이었다. 말하는 것이나 행동이 아직 익숙하지 못했으므로 내신(內臣) 박사람(朴娑覽)을 부사(副使)로 삼아 딸려 보냈다. 왜왕은 이들을 30년 동안이나 억류(抑留)하여 돌려 보내지 않았다.
눌지왕(訥祗王)이 즉위한 3년 기미(己未; 419)에 고구려(高句麗) 장수왕(長壽王)의 사신이 와서 말했다. “우리 임금은 대왕의 아우 보해(寶海)가 지혜와 재주가 뛰어나다는 말을 듣고 서로 친하게 지내기를 원하여 특히 소신(小臣)을 보내어 간청하는 바입니다.” 왕은 이 말을 듣고 매우 다행스럽게 여겼다. 이 일로 해서 화친하기로 마음을 정하고 아우 보해에게 명하여 고구려로 가게 했다. 그리고 내신(內臣) 김무알(金武謁)을 보좌(補佐)로 함께 보냈더니 장수왕도 그들을 억류(抑留)해 두고 돌려 보내지 않았다.
눌지왕 10년 을축(乙丑; 425)에 왕은 여러 신하들과 나라 안의 호협(豪俠)한 사람들을 모아 놓고 친히 잔치를 베풀었다. 술이 세 순배 돌고 모든 음악이 울려퍼지자 왕은 눈물을 흘리면서 여러 신하들에게 말했다. “옛날 우리 아버님께서는 성심껏 백성의 일을 생각하신 까닭에 사랑하는 아들을 동쪽 멀리 왜국(倭國)까지 보내셨다가 마침내 다시 만나 보지 못하고 돌아가셨다. 또 내가 왕위(王位)에 오른 뒤로 이웃 나라의 군사가 몹시 강성(强盛)하여 전쟁이 그칠 사이가 없었다. 그런데 유독 고구려만이 화친하자는 말이 있어서 나는 그 말을 믿고 아우를 고구려에 보냈던 바, 고구려에서도 또한 억류해 두고 돌려 보내지 않는 것이다. 그러니 내 아무리 부귀(富貴)를 누린다 해도 일찍이 하루라도 이 일을 잊고 울지 않는 날이 없었다. 만일 이 두 아우를 만나 보고 함께 아버님 사당에 뵙게 된다면 온 나라 사람에게 은혜를 갚겠다. 누가 능히 이 계교를 이룰 수 있겠는가.”
이 말을 듣자 백관(百官)이 입을 모아 아뢰었다. “이 일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반드시 지혜와 용맹이 겸한 사람이라야만 될 것입니다. 신 등의 생각으로는 삽라군(歃羅郡) 태수(太守) 제상(堤上)이 가할까 합니다.”
이에 왕은 제상을 불러 물었다. 제상은 두 번 절하고 대답했다. “신이 듣기로는, 임금에게 근심이 있으면 신하가 욕을 당하며 임금이 욕을 당하면 신하는 죽는다고 합니다. 만일 일의 어렵고 쉬운 것을 따져서 행한다면 이는 충성스럽지 못한 것이옵고 또 죽고 사는 것을 생각한 뒤에 움직인다면 이는 용맹이 없는 것입니다. 신이 비록 불초(不肖)하오나 왕의 명령을 받아 행하기를 원합니다.”
왕은 매우 가상히 여겨 술잔을 나누어 마시고 손을 잡아 작별해 보냈다. 제상은 왕의 앞에서 명령을 받고 바로 북해(北海)길로 향하여 변복(變服)하고 고구려에 들어가 보해가 있는 곳으로 가서 함께 도망할 일자(日字)를 약속해 놓았다. 제상은 먼저 5월 15일에 고성(高城) 수구(水口)에 와서 배를 대고 기다리고 있었다.
약속한 날짜가 가까워지자 보해는 병을 핑계하고 며칠 동안 조회(朝會)에 나가지 않았다. 그러다가 밤중에 도망하여 고성(高城) 바닷가에 이르렀다. 고구려 왕은 이를 알고 수십 명 군사를 시켜 쫓게 하니 고성에 이르러 따라가게 되었다. 그러나 보해는 고구려에 있을 때에 늘 좌우에 잇는 사람들에게 은혜를 베풀어 왔기 때문에 쫓아온 군사들은 그를 불쌍히 여겨 모두 화살의 촉을 뽑고 쏘아서 몸이 상하지 않고 돌아올 수가 있었다.
눌지왕은 보해를 만나 보자 미해(美海)를 생각하는 마음이 더욱 간절해졌다. 한편으로는 기뻐하고 한편으로는 슬퍼하여 눈물을 흘리면서 좌우 사람들에게 말한다. “마치 한 몸에 팔뚝이 하나만 있고, 한 얼굴에 한 쪽 눈만 있는 것 같구나. 비록 하나는 얻었으나 하나는 잃은 대로이니 어찌 마음이 아프지 않겠느냐.”
이때 제상은 이 말을 듣고 말을 탄 채 두 번 절하여 임금에게 하직하고 집에도 들르지 않고 바로 율포(栗浦) 갯가에 이르렀다. 그 아내가 이 소식을 듣고 말을 달려 율포까지 쫓아갔으나 남편은 이미 배에 오른 뒤였다. 아내는 간곡하게 남편을 불렀다. 하지만 제상은 다만 손을 흔들어 보일 뿐 배를 멈추지 않았다. 그는 왜국(倭國)에 도착해서 거짓말을 했다.
“계림왕(鷄林王)이 아무 죄도 없는 우리 부형(父兄)을 죽였기로 도망해서 여기 온 것입니다.” 왜왕(倭王)은 이 말을 믿고 제상에게 집을 주어 편히 거처하게 했다. 이때 제상은 늘 미해를 모시고 해변(海邊)에 나가 놀면서 물고기와 새를 잡아다 왜왕에게 바치니 왜왕은 매우 기뻐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다.
어느 날 새벽 마침 안개가 자욱하게 끼었는데 제상이 미해에게 말했다. “지금 빨리 떠나십시오.” 미해는 “그러면 같이 떠나십시다”했으나 제상은 말한다. “신이 만일 같이 떠난다면 왜인(倭人)들이 알고 뒤를 쫓을 것입니다. 원컨대 신은 여기에 남아 뒤쫓는 것을 막겠습니다.” 미해가 다시 말한다. “지금 나는 그대를 부형(父兄)처럼 여기고 있는데 어찌 그대를 버려 두고 혼자서만 돌아간단 말이오.” 제상은 말한다. “신은 공의 목숨을 구하는 것으로, 대왕의 마음을 위로해 드리면 그것으로 만족할 뿐입니다. 어찌 살기를 바라겠습니까.” 그리고는 술을 부어 미해에게 드렸다. 이때 계림(鷄林) 사람 강구려(康仇麗)가 왜국(倭國)에 와 있었는데 그를 딸려 호송(護送)하게 했다.
미해를 떠나보내고, 제상은 미해의 방에 들어가서 이튿날 아침까지 있었다. 미해를 모시는 좌우 사람들이 방에 들어가 보려 하므로 제상이 나와서 말리면서 말했다. “미해공은 어제 사냥하는 데 따라다니느라 몹시 피로해서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저녁때가 되자 좌우 사람들은 이상히 여겨 다시 물었다. 이때 제상은 대답했다. “미해공은 떠난 지 이미 오래 되었소.”
좌우 사람들이 급히 달려가 왜왕에게 고하자 왕은 기병을 시켜 뒤를 쫓게 했으나 따르지 못했다. 이에 왕은 제상을 가두고 물었다. “너는 어찌하여 너의 나라 왕자를 몰래 돌려 보냈느냐.” 제상이 대답한다. “나는 계림 신하이지 왜국 신하가 아니오. 이제 우리 임금의 소원을 이루어 드렸을 뿐인데, 어찌 이 일을 그대에게 말하겠소.” 왜왕은 노했다. “이제 너는 이미 내 신하가 되었는데도 계림 신하라고 말하느냐. 그렇다면 반드시 오형(五刑)을 갖추어 너에게 쓸 것이다. 만일 왜국 신하라고만 말한다면 후한 녹(祿)을 상으로 주리라.” 제상은 대답한다. “차라리 계림의 개나 돼지가 될지언정 왜국의 신하가 되지는 않겠다. 차라리 계림의 형벌을 받을지언정 왜국의 작록을 받지 않겠다.”
왜왕은 노했다. 제상의 발 가죽을 벗기고 갈대[蒹葭]를 벤 위를 걸어가게 했다. 그리고는 다시 물었다. “너는 어느 나라 신하냐.” “계림의 신하다.” 왜왕은 또 쇠를 달구어 그 위에 세워 놓고 다시 물었다. “어느 나라 신하냐.” “계림의 신하다.” 왜왕은 그를 굴복시키지 못할 것을 알고 목도(木島)라는 섬 속에서 불태워 죽였다.
미해는 바다를 건너 돌아왔다. 그는 먼저 강구려(康仇麗)를 시켜 나라 안에 사실을 알렸다. 눌지왕은 놀라고 기뻐하여 백관들에게 명하여 미해를 굴헐역(屈歇驛)에 나가서 맞게 했다. 왕은 아우 보해와 함께 남교(南郊)에 나가서 친히 미해를 맞아 대궐로 들어갔다. 잔치를 베풀고 국내에 대사령(大赦令)을 내려 죄수를 풀어 주었다. 또 제상의 아내를 국대부인(國大夫人)에 봉하고, 그의 딸은 미해공의 부인을 삼았다.
이때 의론하는 사람들은 말했다. “옛날에 한나라 신하 주가(周苛)가 형양(滎陽) 땅에 있다가 초(楚)나라 군사에게 포로로 잡힌 일이 있었다. 이때 항우(項羽)는 주가를 보고 말하기를, ‘네가 만일 내 신하 노릇을 한다면 만호후(萬戶侯)를 주겠다’했다. 그러나 주가는 항우를 꾸짖고 굴복하지 않으므로 그에게 죽음을 당했다. 그런데 이번 제상의 죽음은 주가만 못하지 않다.”
처음에 제상이 신라를 떠날 때 부인이 듣고 남편의 뒤를 쫓아갔으나 따르지 못했었다. 이에 망덕사(望德寺) 문 남쪽 사장(沙場) 위에 이르러 주저앉아 길게 부르짖었는데, 이런 일이 있었다 하여 그 사장을 장사(長沙)라고 불렀다. 친척 두 사람이 부인을 부축하여 돌아오려 하자 부인은 다리를 뻗은 채 앉아서 일어나지 않았다. 그래서 그곳을 벌지지(伐知旨)라고 이름지었다. 이런 일이 있은 지 오래 된 뒤에 부인은 남편을 사모하는 마음을 이기지 못하여 세 딸을 데리고 치술령(鵄述嶺)에 올라가 왜국을 바라보고 통곡하다가 죽고 말았다. 그래서 그를 치술신모(鵄述神母)라고 하는데, 지금도 그를 제사지내는 사당(祠堂)이 있다.
제18대 실성왕(實聖王)
의희(義熙) 9년 계축(癸丑; 413)에 평양주(平壤州)의 대교(大橋)가 완성되었다. 왕은 전왕(前王)의 태자(太子) 눌지(訥祗)가 덕망이 있는 것을 꺼려서 이를 죽이고자 했다. 이에 고구려의 군사를 청하여 거짓 눌지에게 맞도록 했다. 그러나 고구려 사람들은 눌지에게 어진 행실이 있음을 알고는 창끝을 뒤로 돌려 실성왕(實聖王)을 죽이고 눌지를 세워 왕을 삼고 돌아갔다.
사금갑(射琴匣)
제21대 비처왕(毗處王; 소지왕炤智王이라고도 한다)이 즉위한 10년 무진(戊辰; 488)에 천천정(天泉亭)에 거동했다. 이때 까마귀와 쥐가 와서 울더니 쥐가 사람의 말로, “이 까마귀가 가는 곳을 찾아 보시오”한다(혹은 말하기를, 신덕왕神德王이 흥륜사興輪寺에 가서 행향行香하려 하는데 길에서 보니 여러 마리 쥐가 꼬리를 물고 있었다. 괴상히 여겨 돌아와 점을 쳐 보니 “내일 제일 먼저 우는 까마귀를 따라가 찾아 보라”고 했다 한다. 하지만 이 설說은 잘못이다).
왕은 기사(騎士)에게 명하여 까마귀를 따르게 했다. 남쪽 피촌(避村; 지금의 양피사壤避寺村이니 남산南山 동쪽 기슭에 있다)에 이르러 보니 돼지 두 마리가 싸우고 있다. 이것을 한참 쳐다보고 있다가 문득 까마귀가 날아간 곳을 잊어버리고 길에서 서성거리고 있었다.
이때 한 늙은이가 못 속에서 나와 글을 올렸는데, 그 글 겉봉에는, “이 글을 떼어 보면 두 사람이 죽을 것이요, 떼어 보지 않으면 한 사람이 죽을 것입니다”했다. 기사(騎士)가 돌아와 비처왕(毗處王)에게 바치니 왕은 말한다. “두 사람을 죽게 하느니보다는 차라리 떼어 보지 않아 한 사람만 죽게 하는 것이 낫겠다.” 이때 일관(日官)이 아뢰었다. “두 사람이라 한 것은 서민(庶民)을 말한 것이요, 한 사람이란 바로 왕을 말한 것입니다.” 왕이 그 말을 옳게 여겨 글을 떼어 보니 “금갑(琴匣)을 쏘라[射琴匣]”고 했을 뿐이다. 왕은 곧 궁중으로 들어가 거문고 갑(匣)을 쏘았다. 그 거문고 갑 속에는 내전(內殿)에서 분향수도(焚香修道)하고 있던 중이 궁주(宮主)와 은밀히 간통(奸通)하고 있었다. 이에 두 사람을 사형(死刑)에 처했다.
이런 일이 있은 뒤로 그 나라 풍속에 해마다 정월 상해(上亥)·상자(上子)·상오일(上午日)에는 모든 일을 조심하여 하고, 감히 움직이지 않았다. 그리고 16(5)일을 오기일(烏忌日)이라 하여 찰밥을 지어 제사지냈으나 이런 일은 지금까지도 계속 행해지고 있다. 이언(俚言)에 이것을 달도(怛忉)라고 한다. 슬퍼하고 조심하며 모든 일을 금하고 꺼린다는 뜻이다. 또 노인이 나온 못을 이름하여 서출지(書出池)라고 했다.
지철로왕(智哲老王)
제22대 지철로왕(智哲老王)의 성은 김씨(金氏), 이름은 지대로(智大路), 또는 지도로(智度路)이며 시호(諡號)는 지증(智證)이다. 시호를 쓰는 법이 여기서 시작되었다. 또 우리말에 왕을 마립간(麻立干)이라 한 것도 이 왕 때부터 시작되었다. 왕은 영원(永元) 2년 경진(庚辰; 500)에 왕위(王位)에 올랐다(신사辛巳라고도 하는데, 그렇다면 영원永元 3년이다).
왕은 음경(陰莖)의 길이가 한 자 다섯 치가 돼 배필을 얻기 어려웠다. 그래서 사자(使者)를 삼도(三道)에 보내서 배필을 구했다. 사자(使者)가 모량부(牟梁部) 동노수(冬老樹) 밑에 이르니 개 두 마리가 북만큼 큰 똥덩어리의 양쪽 끝을 물고 싸우고 있다. 사자는 그 마을 사람을 찾아 보고 누가 눈 똥인가를 물었다. 한 소녀가 말하였다. “이것은 모량부 상공(牟梁部相公)의 딸이 여기서 빨래를 하다가 숲속에 숨어서 눈 것입니다.” 그 집을 찾아가 살펴보니 그 여자는 키가 7척 5촌이나 된다. 이 사실을 왕께 아뢰었더니 왕은 수레를 보내서 그 여자를 궁중으로 맞아 황후(皇后)를 봉하니 여러 신하들이 모두 하례했다.
또 아슬라주(阿瑟羅州; 지금의 명주溟州) 동쪽 바다에 순풍(順風)으로 이틀 걸리는 곳에 우릉도(于陵島; 지금의 우릉羽陵)가 있다. 이 섬은 둘레 2만 6,730보(步)이다. 이 섬 속에 사는 오랑캐들은 그 바닷물이 깊은 것을 믿고 몹시 교만하여 조공(朝貢)을 바쳐 오지 않았다. 이에 왕은 아찬(伊飡) 박이종(朴伊宗)에게 명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치게 했다. 이때 이종은 나무로 사자(獅子)를 만들어 큰 배에 싣고 위협했다. “너희가 만일 항복하지 않으면 이 짐승을 놓아 버리겠다.” 이에 오랑캐들은 두려워하여 항복했다. 이에 이종을 상주어 주백(州伯)을 삼았다.
진흥왕(眞興王)
제24대 진흥왕(眞興王)은 즉위할 때 나이 15세이므로 태후(太后)가 섭정(攝政)했다. 태후는 곧 법흥왕(法興王)의 딸로서 입종갈문왕(立宗葛文王)의 비(妃)이다. 진흥왕이 임종(臨終)할 때에 머리를 깎고 법의(法衣)를 입고 돌아갔다.
승성(承聖) 3년(554) 9월에 백제(百濟) 군사가 진성(珍城)을 침범하여 남녀 3만 9,000명과 말 8,000필을 빼앗아갔다. 이보다 먼저 백제가 신라와 군사를 합쳐서 고구려(高句麗)를 치려고 했었다. 이때 진흥왕은 말하기를, “나라가 흥하고 망하는 것은 하늘에 매여 있다. 만일 하늘이 고구려를 미워하지 않는다면 내가 어떻게 감히 고구려가 망하기를 바랄 수 있겠느냐”했다. 그리고 이 말을 고구려에 전하게 하니 고구려는 이 말에 감동되어 신라와 평화롭게 지냈다. 이런 때문에 백제가 신라를 원망하여 침범한 것이다.
도화녀(桃花女)와 비형랑(鼻荊郞)
제25대 사륜왕(四輪王)의 시호(諡號)는 진지대왕(眞智大王)으로, 성(姓)은 김씨(金氏), 왕비(王妃)는 기오공(起烏公)의 딸 지도부인(知刀夫人)이다. 대건(大建) 8년 병신(丙申; 576, 고본古本에는 11년 기해己亥라고 했는데 이는 잘못이다)에 왕위(王位)에 올랐다. 나라를 다스린 지 4년에 주색에 빠져 음란하고 정사가 어지럽자 나랏사람들은 그를 폐위시켰다.
이보다 먼저 사량부(沙梁部)의 어떤 민가(民家)의 여자 하나가 얼굴이 곱고 아름다워 당시 사람들은 도화랑(桃花郞)이라 불렀다. 왕이 이 소문을 듣고 궁중으로 불러들여 욕심을 채우고자 하니 여인은 말한다. “여자가 지켜야 하는 것은 두 남편을 섬기지 않는 일입니다. 그런데 남편이 있는데도 남에게 시집가는 일은 비록 만승(萬乘)의 위엄을 가지고도 맘대로 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왕이 말한다. “너를 죽인다면 어찌하겠느냐.” 여인이 대답한다. “차라리 거리에서 베임을 당하더라도 딴 데로 가는 일은 원치 않습니다.” 왕은 희롱으로 말했다. “남편이 없으면 되겠느냐.” “되겠습니다.” 왕은 그를 놓아 보냈다.
이 해에 왕은 폐위되고 죽었는데 그 후 2년 만에 도화랑(桃花郞)의 남편도 또한 죽었다. 10일이 지난 어느 날 밤중에 갑자기 왕은 평시(平時)와 같이 여인의 방에 들어와 말한다. “네가 옛날에 허락한 말이 있지 않느냐. 지금은 네 남편이 없으니 되겠느냐.” 여인이 쉽게 허락하지 않고 부모에게 고하니 부모는 말하기를, “임금의 말씀인데 어떻게 피할 수가 있겠느냐”하고 딸을 왕이 있는 방에 들어가게 했다. 왕은 7일 동안 머물렀는데 머무는 동안 오색(五色) 구름이 집을 덮었고 향기는 방안에 가득하였다. 7일 뒤에 왕이 갑자기 사라졌으나 여인은 이내 태기가 있었다. 달이 차서 해산하려 하는데 천지가 진동하더니 한 사내아이를 낳았는데 이름을 비형(鼻荊)이라고 했다.
진평대왕(眞平大王)이 그 이상한 소문을 듣고 아이를 궁중에 데려다가 길렀다. 15세가 되어 집사(執事)라는 벼슬을 주었다. 그러나 비형(鼻荊)은 밤마다 멀리 도망가서 놀곤 하였다. 왕은 용사(勇士) 50명을 시켜서 지키도록 했으나 그는 언제나 월성(月城)을 날아 넘어가서 서쪽 황천(荒天) 언덕 위에 가서는 귀신들을 데리고 노는 것이었다. 용사(勇士)들이 숲 속에 엎드려서 엿보았더니 귀신의 무리들이 여러 절에서 들려 오는 새벽 종소리를 듣고 각각 흩어져 가 버리면 비형랑(鼻荊郞)도 또한 집으로 돌아왔다. 용사들은 이 사실을 왕에게 보고했다. 왕은 비형을 불러서 말했다. “네가 귀신들을 데리고 논다니 그게 사실이냐.”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너는 그 귀신의 무리들을 데리고 신원사(神元寺) 북쪽 개천(신중사神衆寺라고도 하지만 그것은 잘못이다. 이것을 황천荒天 동쪽 심거深渠라고도 한다)에 다리를 놓도록 해라.” 비형은 명을 받아 귀신의 무리들을 시켜서 하룻밤 사이에 큰 다리를 놓았다. 그래서 다리를 귀교(鬼橋)라고 했다. 왕은 또 물었다. “그들 귀신들 중에서 사람으로 출현(出現)해서 조정 정사를 도울 만한 자가 있느냐.” “길달(吉達)이란 자가 있사온데 가히 정사를 도울 만합니다.” “그러면 데리고 오도록 하라.” 이튿날 그를 데리고 와서 왕께 뵈니 집사(執事) 벼슬을 주었다. 그는 과연 충성스럽고 정직하기가 비할 데 없었다. 이때 각간(角干) 임종(林宗)이 아들이 없었으므로 왕은 명령하여 길달(吉達)을 그 아들로 삼게 했다. 임종은 길달(吉達)을 시켜 흥륜사(興輪寺) 남쪽에 문루(門樓)를 세우게 했다. 그리고 밤마다 그 문루(門樓) 위에 가서 자도록 했다. 그리하여 그 문루를 길달문(吉達門)이라고 했다. 어느 날 길달(吉達)이 여우로 변하여 도망해 갔다. 이에 비형은 귀신을 무리를 시켜서 잡아 죽였다. 이 때문에 귀신을 무리들은 비형의 이름만 들어도 두려워하여 달아났다.
당시 사람들은 글을 지어 말했다.
성제(聖帝)의 넋이 아들을 낳았으니, 비형랑(鼻荊郞)의 집이 바로 그곳일세.
날고 뛰는 모든 귀신의 무리, 이곳에는 아예 머물지 말라.
향속(鄕俗)에 이 글을 써붙여 귀신을 물리친다.
천사옥대(天賜玉帶; 청진淸秦 4년 정유丁酉(937) 5월에 정승正承 김부金傅가 금으로 새기고 옥玉으로 장식한 허리띠 하나를 바쳤다. 길이는 10위圍요. 전과鐫銙가 62개나 되었다. 이것을 진평왕眞平王의 천사대天賜帶라고 한다. 고려高麗 태조太祖는 이것을 받아 내고內庫에 간직했다)
제26대 백정왕(白淨王)의 시호(諡號)는 진평대왕(眞平大王), 성(姓)은 김씨(金氏)다. 대건(大建) 11년 기해(己亥; 579) 8월에 즉위했다. 신장(身長)이 11척이나 되었다. 내제석궁(內帝釋宮; 천주사天柱寺라고도 하는데 왕王이 창건創建한 것이다)에 거동하여 섬돌을 밟자 두 개가 한꺼번에 부러졌다. 왕이 좌우 사람을 돌아보면서 말했다. “이 돌을 옮기지 말고 그대로 두었다가 뒷 세상 사람들이 보도록 하라.” 이것이 바로 성 안에 있는 다섯 개의 움직이지 않는 돌의 하나다. 왕이 즉위한 원년(元年) 천사(天使)가 대궐 뜰에 내려와 왕에게 말한다. “상제(上帝)께서 내게 명하여 이 옥대(玉帶)를 전하라고 하셨습니다.” 왕이 꿇어앉아 친히 이것을 받으니 하늘로 올라갔다. 교사(郊社)나 종묘(宗廟)의 큰 제사 때에는 언제나 이것을 띠었다.
그 후에 고려왕(高麗王)이 신라를 치려 하여 말했다. “신라에는 세 가지 보물이 있어서 침범하지 못한다고 하니 그게 무엇 무엇이냐.” 좌우가 대답한다. “황룡사(皇龍寺)의 장육존상(丈六尊像)이 그 첫째요, 그 절에 있는 구층탑(九層塔)이 그 둘째요, 진평왕(眞平王)의 천사옥대(天賜玉帶)가 그 셋째입니다.” 이 말을 듣고 신라를 공격할 계획을 중지하고 찬(讚)하여 말했다.
구름밖에 하늘이 주신 긴 옥대(玉帶)는, 임금의 곤룡포(袞龍袍)에 알맞게 둘려 있네.
우리 임금 이제부터 몸 더욱 무거우니, 이 다음날엔 쇠로 섬돌을 만들 것이네.
선덕왕(善德王)의 지기삼사(知幾三事)
제27대 덕만(德曼; 만曼은 만萬으로도 씀)의 시호(諡號)는 선덕여대왕(善德女大王), 성(姓)은 김씨(金氏), 아버지는 진평왕(眞平王)이다. 정관(貞觀) 6년 임진(壬辰; 632)에 즉위하여 나라를 다스린 지 16년 동안에 미리 안 일이 세 가지가 있었다.
첫째는, 당(唐)나라 태종(太宗)이 붉은빛·자줏빛·흰빛의 세 가지 빛으로 그린 모란[牧丹]과 그 씨 서 되[升]를 보내 온 일이 있었다. 왕은 그림의 꽃을 보더니 말하기를, “이 꽃은 필경 향기가 없을 것이다”하고 씨를 뜰에 심도록 했다. 거기에서 꽃이 피어 떨어질 때까지 과연 왕의 말과 같았다.
둘째는, 영묘사(靈廟寺) 옥문지(玉門池)에 겨울인데도 개구리들이 많이 모여들어 3, 4일 동안 울어 댄 일이 있었다. 나라 사람들이 괴상히 여겨 왕에게 물었다. 그러자 왕은 급히 각간(角干) 알천(閼川)·필탄(弼呑) 등에게 명하여 정병(精兵) 2,000명을 뽑아 가지고 속히 서교(西郊)로 가서 여근곡(女根谷)이 어딘지 찾아 가면 반드시 적병(賊兵)이 있을 것이니 엄습해서 모두 죽이라고 했다. 두 각간이 명을 받고 각각 군사 1,000명을 거느리고 서교(西郊)에 가 보니 부산(富山) 아래 과연 여근곡(女根谷)이 있고 백제(百濟) 군사 500명이 와서 거기에 숨어 있었으므로 이들을 모두 죽여 버렸다. 백제의 장군(將軍) 우소(亏召)란 자가 남산 고개 바위 위에 숨어 있었으므로 포위하고 활을 쏘아 죽였다. 또 뒤에 군사 1,200명이 따라오고 있었는데, 모두 쳐서 죽여 한 사람도 남기지 않았다.
셋째는, 왕이 아무 병도 없을 때 여러 신하들에게 일렀다. “나는 아무 해 아무 날에 죽을 것이니 나를 도리천(忉利天) 속에 장사지내도록 하라.” 여러 신하들이 그게 어느 곳인지 알지 못해서 물으니 왕이 말하였다. “낭산(狼山) 남쪽이니라.” 그 날이 이르니 왕은 과연 죽었고, 여러 신하들은 낭산 양지에 장사지냈다. 10여 년이 지난 뒤 문호대왕(文虎(武)大王)이 왕의 무덤 아래에 사천왕사(四天王寺)를 세웠는데 불경(佛經)에 말하기를, “사천왕천(四天王天) 위에 도리천(忉利天)이 있다”고 했으니 그제야 대왕(大王)의 신령하고 성스러움을 알 수가 있었다.
왕이 죽기 전에 여러 신하들이 왕에게 아뢰었다. “어떻게 해서 모란꽃에 향기가 없고, 개구리 우는 것으로 변이 있다는 것을 아셨습니까.” 왕이 대답했다. “꽃을 그렸는데 나비가 없으므로 그 향기가 없는 것을 알 수가 있었다. 이것은 당나라 임금이 나에게 짝이 없는 것을 희롱한 것이다. 또 개구리가 성난 모양을 하는 것은 병사(兵士)의 형상이요. 옥문(玉門)이란 곧 여자의 음부(陰部)이다. 여자는 음이고 그 빛은 흰데 흰빛은 서쪽을 뜻하므로 군사가 서쪽에 있다는 것을 알았다. 또 남근(男根)은 여근(女根)이 들어가면 죽는 법이니 그래서 잡기가 쉽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에 여러 신하들은 모두 왕의 성스럽고 슬기로움에 탄복했다. 꽃은 세 빛으로 그려 보낸 것은 대개 신라에는 세 여왕(女王)이 있을 것을 알고 한 일이었던가. 세 여왕이란 선덕(善德)·진덕(眞德)·진성(眞聖)이니 당나라 임금도 짐작하여 아는 밝은 지혜가 있었던 것이다.
선덕왕(善德王)이 영묘사(靈廟寺)를 세운 일은 <양지사전(良志師傳)>에 자세히 실려 있다. <별기(別記)>에 말하기를, “이 임금 때에 돌을 다듬어서 첨성대(瞻星臺)를 쌓았다”고 했다.
진덕왕(眞德王)
제28대 진덕여왕(眞德女王)은 왕위에 오르자 친히 태평가(太平歌)를 지어 비단을 짜서 그 가사로 무늬를 놓아 사신을 시켜서 당(唐)나라에 바치게 했다(다른 책에는, 춘추공春秋公을 사신으로 보내서 군사를 청하게 했더니 당唐나라 태종太宗이 기뻐하여 소정방蘇定方을 보냈다고 했으나 이것은 잘못된 것이다. 현경現慶 이전에 춘추공春秋公은 이미 왕위王位에 올랐다. 그리고 현경懸磬 경신庚申은 태종太宗 때가 아니라 고종高宗 때이다. 정방定方이 온 것은 현경現慶 경신庚申년이니 비단을 짜서 무늬를 놓아 보냈다는 것은 청병請兵한 때의 일이 아니고 진덕왕眞德王 때의 일이라야 옳다. 대개 이때는 김흠순金欽純을 석방해 달라고 청할 때의 일일 것이다).
당(唐)나라 황제(皇帝)는 이것을 아름답게 여겨 칭찬하고 진덕여왕(眞德女王)을 계림국왕(鷄林國王)으로 고쳐 봉했다. 태평가(太平歌)의 가사(歌詞)는 이러했다.
큰 당(唐)나라 왕업(王業)을 세우니, 높고 높은 임금의 계획 장하여라.
전쟁 끝나니 천하를 평정하고, 문치(文治)를 닦으니 백왕(百王)이 뒤를 이었네.
하늘을 거느리니 좋은 비 내리고, 만물을 다스리니 모든 것이 광채가 나네.
깊은 인덕(人德)은 해와 달에 비기겠고, 돌아오는 운수는 요순(堯舜)보다 앞서네.
깃발은 어찌 그리 번쩍이는가, 징소리 북소리는 웅장도 하여라.
외이(外夷)로서 황제의 명령 거역하는 자는 칼 앞에 자빠져 천벌을 받으리.
순후(淳厚)한 풍속 곳곳에 퍼지니, 멀고 가까운 곳에서 상서(祥瑞)를 바치네.
사시(四時)의 기후는 옥촉(玉燭)처럼 고르고, 칠요(七曜)의 광명은 만방에 두루 비치네.
산악(山嶽)의 정기는 보필할 재상을 낳고, 황제(皇帝)는 충량(忠良)한 신하에게 일을 맡겼네.
오제(五帝) 삼황(三皇)의 덕(德)이 하나로 이룩되니, 우리 당(唐)나라 황제(皇帝)를 밝게 해 주리.
왕의 대(代)에 알천공(閼川公)·임종공(林宗公)·술종공(述宗公)·호림공(虎林公; 자장慈藏의 아버지)·염장공(廉長公)·유신공(庾信公)이 있었다. 이들은 남산(南山) 우지암(亏知巖)에 모여서 나랏일을 의논했다. 이때 큰 범 한 마리가 좌중에 뛰어들었다. 여러 사람들은 놀라 일어났지만 알천공(閼川公)만은 조금도 움직이지 않고 태연히 담소하면서 범의 꼬리를 잡아 땅에 메쳐 죽였다. 알천공의 완력이 이처럼 세었으므로 그를 수석(首席)에 앉혔었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은 유신공(庾信公)의 위엄에 심복(心腹)했다.
신라에는 네 곳의 신령스러운 땅이 있어서 나라의 큰 일을 의논할 때면 대신(大臣)들은 반드시 그곳에 모여서 일을 의논했다. 그러면 그 일이 반드시 이루어지는 것이었다. 이 네 곳의 첫째는 동쪽의 청송산(靑松山)이요, 둘쩨는 남쪽의 우지산(亏知山)이요, 셋째는 서쪽의 피전(皮田)이요, 넷째는 북쪽의 금강산(金剛山)이다. 이 왕 때에 비로소 정월 초하룻날 아침의 조례(朝禮)를 행했고, 또 시랑(侍郞)이라는 칭호도 이때에 처음으로 쓰기 시작했다.
김유신(金庾信)
호력(虎力) 이간(伊干)의 아들 서현각간(舒玄角干) 김(金)씨의 맏아들이 유신(庾信)이고 그 아우는 흠순(欽純)이다. 맏누이는 보희(寶姬)로서 소명(小名)은 아해(阿海)이며, 누이동생은 문희(文姬)로서 소명(小名)이 아지(阿之)이다. 유신공(庾信公)은 진평왕(眞平王) 17년 을묘(乙卯; 595)에 났는데, 칠요(七曜)의 정기를 타고났기 때문에 등에 일곱 별의 무늬가 있었다. 그에게는 신기하고 이상한 일이 많았다.
나이 18세가 되는 임신(壬申)년에 검술(劍術)을 익혀 국선(國仙)이 되었다. 이때 백석(白石)이란 자가 있었는데 어디서 왔는지 알 수가 없었지만 여러 해 동안 낭도(郎徒)의 무리에 소속되어 있었다. 이때 유신은 고구려(高句麗)와 백제(百濟)의 두 나라를 치려고 밤낮으로 깊은 의논을 하고 있었는데 백석이 그 계획을 알고 유신에게 고한다. “내가 공과 함께 먼저 저들 적국에 가서 그들의 실정(實情)을 정탐한 뒤에 일을 도모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유신은 기뻐하여 친히 백석을 데리고 밤에 떠났다. 고개 위에서 쉬고 있노라니 두 여인이 그를 따라와서 골화천(骨火川)에 이르러 자게 되었는데 또 한 여자가 갑자기 이르렀다. 공이 세 여인과 함께 기쁘게 이야기하고 있노라니 여인들은 맛있는 과자를 그에게 주었다. 유신은 그것을 받아 먹으면서 마음으로 그들을 믿게 되어 자기의 실정(實情)을 말하였다. 여인들이 말한다. “공의 말씀은 알겠습니다. 원컨대 공께서는 백석을 떼어 놓고 우리들과 함께 저 숲속으로 들어가면 실정을 다시 말씀하겠습니다.” 이에 그들과 함께 들어가니 여인들은 문득 신(神)으로 변하더니 말한다. “우리들은 나림(奈林)·혈례(穴禮)·골화(骨火) 등 세 곳의 호국신(護國神)이오. 지금 적국 사람이 낭(郎)을 우인해 가는데도 낭은 알지 못하고 따라가므로, 우리는 낭을 말리려고 여기까지 온 것이었소.” 말을 마치고 자취를 감추었다. 공은 말을 듣고 놀라 쓰러졌다가 두 번 절하고 나와서는 골화관(骨火館)에 묵으면서 백석에게 말했다. “나는 지금 다른 나라에 가면서 중요한 문서를 잊고 왔다. 너와 함께 집으로 돌아가 가지고 오도록 하자.” 드디어 함께 집에 돌아오자 백석을 결박해 놓고 그 실정을 물으니 백석이 말한다.
“나는 본래 고구려 사람이오(고본古本에 백제 사람이라고 한 것은 잘못이다. 추남楸南은 고구려 사람이요, 도한 음양陰陽을 역행逆行한 일도 보장왕寶藏王 때의 일이다). 우리 나라 여러 신하들이 말하기를, 신라의 유신은 우리 나라 점쟁이 추남(楸南; 고본古本에 춘남春南이라 한 것은 잘못임)이었는데, 국경 지방에 역류수(逆流水; 웅자雄雌라고도 하는데, 엎치락 뒤치락 하는 일)가 있어서 그에게 점을 치게 했었소. 이에 추남(楸南)이 아뢰기를, ‘대왕(大王)의 부인(夫人)이 음양(陰陽)의 도(道)를 역행(逆行)한 때문에 이러한 표징(表徵)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했소. 이에 대왕은 놀라고 괴이하게 여기고 왕비는 몹시 노했소. 이것은 필경 요망한 여우의 말이라 하여 왕에게 고하여 다른 일을 가지고 시험해서 물어 보아 맞지 않으면 중형(重刑)에 처하라고 했소. 이리하여 쥐 한 마리를 함 속에 감추어 두고 이것이 무슨 물건이냐 물었더니 그 사람은, 이것이 반드시 쥐일 것인데 그 수가 여덟입니다 했소. 이에 그의 말이 맞지 않는다고 해서 죽이려 하자 그 사람은 맹세하기를, 내가 죽은 뒤에는 꼭 대장이 되어 반드시 고구려를 멸망시킬 것이라 했소. 곧 그를 죽이고 쥐의 배를 갈라 보니 새끼 일곱 마리가 있었소. 그제야 그의 말이 맞는 것을 알았지요. 그날 밤 대왕의 꿈에 추남(楸南)이 신라 서현공(舒玄公) 부인의 품 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고 여러 신하들에게 물었더니 모두 ‘추남이 맹세하고 죽더니 과연 맞았습니다’ 했소. 그런 때문에 고구려에서는 나를 보내서 그대를 유인하게 한 것이오.” 공은 곧 백석을 죽이고 음식을 갖추어 삼신(三神)에게 제사지내니 이들은 모두 나타나서 제물을 흠향했다.
김유신의 집안 재매부인(財買夫人)이 죽자 청연(靑淵) 상곡(上谷)에 장사지내고 재매곡(財買谷)이라 불렀다. 해마다 봄이 되면 온 집안의 남녀들이 그 골짜기 남쪽 시냇가에 모여서 잔치를 열었다. 이럴 때엔 백 가지 꽃이 화려하게 피고 송화(松花)가 골짜기 안 숲속에 가득했다. 골짜기 어귀에 암자를 짓고 이름을 송화방(松花房)이라 하여 전해 오다가 원찰(願刹)로 삼았다. 54대 경명왕(景明王) 때에 공(公)을 봉해서 흥호대왕(興虎(武)大王)이라 했다. 능은 서산(西山) 모지사(毛只寺) 북쪽 동으로 향해 뻗은 봉우리에 있다.
태종(太宗) 춘추공(春秋公)
제29대 태종대왕(太宗大王)의 이름은 춘추(春秋), 성(姓)은 김씨(金氏)이다. 용수(龍樹; 혹은 용춘龍春) 각간(角干)으로 추봉(追封)된 문흥대왕(文興大王)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진평대왕(眞平大王)의 딸 천명부인(天明夫人)이며 비(妃)는 문명황후(文明皇后) 문희(文姬)이니 곧 유신공(庾信公)의 끝누이였다.
처음에는 문희의 언니 보희가 꿈에 서악(西岳)에 올라가서 오줌을 누는데 오줌이 서울 안에 가득 찼다. 이튿날 아침에 문희에게 꿈이야기를 하자 문희는 이 말을 듣고 “내가 그 꿈을 사겠어요”하고 말하니, 언니는 “무슨 물건으로 사려 하느냐”하고 물었다. “비단치마를 주면 되겠지요.” 언니가 “그렇게 하자”하여, 동생이 옷깃을 벌리고 받으려 하자 언니는 “어젯밤 꿈을 네게 준다”했고, 동생은 비단치마로 값을 치렀다. 그런 지 10일이 지났다. 정월(正月) 오기일(午忌日; 위의 사금갑射琴匣에 보였으니 최치원崔致遠의 설說이다)에 유신(庾信)이 춘추공과 함께 유신의 집 앞에서 공을 찼다(신라 사람은 공 차는 것을 농주弄珠의 희롱이라 한다). 이때 유신은 일부러 춘추의 옷을 밟아서 옷끈을 떨어뜨리게 하고 말하기를 “내 집에 들어가서 옷끈을 달도록 합시다”하매 춘추공은 그 말을 따랐다. 유신이 아해(阿海)를 보고 옷을 꿰매 드리라 하니 아해는 말한다. “어찌 그런 사소한 일로 해서 가벼이 귀공자(貴公子)와 가까이한단 말입니까”하고 사양했다(고본古本에는 병 때문에 나오지 않았다고 했다). 이에 유신은 아지(阿之)에게 이것을 명했다. 춘추공은 유신의 뜻을 알고 드디어 아지와 관계하고 이로부터 자주 왕래했다. 유신은 그 누이가 임신한 것을 알고 꾸짖었다. “너는 부모에게 알리지도 않고 아이를 배었으니 그게 무슨 일이냐.” 그리고는 온 나라 안에 말을 퍼뜨려 그 누이를 불태워 죽인다고 했다. 어느 날 선덕왕(善德王)이 남산(南山)에 거동한 틈을 타서 유신은 마당 가운데 나무를 쌓아 놓고 불을 질렀다. 연기가 일어나자 왕이 바라보고 무슨 연기냐고 물으니, 좌우에서 아뢰기를, “유신이 누이동생을 불태워 죽이는 것인가 봅니다”했다. 왕이 그 까닭을 물으니, 그 누이동생이 남편도 없이 임신한 때문이라고 했다. 왕이 “그게 누구의 소행이냐”고 물었다. 이때 춘추공은 왕을 모시고 앞에 있다가 얼굴빛이 몹시 변했다. 왕은 말한다. “그것은 네가 한 짓이니 빨리 가서 구하도록 하라.” 춘추공은 명령을 받고 말을 달려 왕명(王命)을 전하여 죽이지 못하게 하고 그 후에 버젓이 혼례를 올렸다.
진덕왕(眞德王)이 죽자 영휘(永徽) 5년 갑인(甲寅; 654)에 춘추공은 왕위에 올라 나라를 다스린 지 8년 만인 용삭(龍朔) 원년(元年) 신유(辛酉; 661)에 죽으니 나이 59세였다. 애공사(哀公寺) 동쪽에 장사지내고 비석을 세웠다.
왕은 유신과 함께 신비스러운 꾀와 힘을 다해서 삼한(三韓)을 통일하여 나라에 큰 공을 세웠다. 그런 때문에 묘호(廟號)를 태종(太宗)이라고 했다. 태자 법민(法敏)과 각간(角干) 인문(仁問)·각간 문왕(文王)·각간 노차(老且)·각간 지경(智鏡)·각간 개원(愷元) 등은 모두 문희가 낳은 아들들이었으니 전날에 꿈을 샀던 징조가 여기에 나타난 것이다. 서자(庶子)는 개지문(皆知文) 급간(級干)과 거득(車得) 영공(令公)·마득(馬得) 아간(俄間)이다. 딸까지 합치면 모두 다섯 명이다.
왕은 하루에 쌀 서 말(三斗) 밥과 꿩 아홉 마리를 먹었다. 그러나 경신(庚申; 660)에 백제(百濟)를 멸한 뒤로는 점심을 먹지 않고 다만 아침 저녁뿐이었다. 그래도 하루에 쌀 여섯 말, 술 여섯 말, 꿩 열 마리를 먹었다.
성안 물건값은 포목(布木) 한 필에 벼가 서른 섬 혹은 쉰 섬이어서 백성들은 성대(聖代)라고 불렀다.
왕이 태자로 있을 때 고구려를 치고자 군사를 청하려고 당(唐)나라에 간 일이 있었다. 이때 당나라 임금이 그의 풍채(風彩)를 보고 칭찬하여 신성(神聖)한 사람이라 하고 당나라에 머물러 두고 시위(侍衛)로 삼으려 했지만 굳이 청해서 돌아오고 말았다.
이때 백제 마지막 왕 의자(義慈)는 곧 호왕(虎(武)王)의 맏아들로서 영웅(英雄)스럽고 용맹하고 담력(膽力)이 있었다. 부모를 효성스럽게 섬기고 형제간에 우애가 있어 당시 사람들은 그를 해동증자(海東曾子)라 했다. 정관(貞觀) 15년 신축(辛丑; 641)에 왕위에 오르자 주색(酒色)에 빠져서 정사는 어지럽고 나라는 위태로웠다. 좌평(佐平; 백제百濟의 벼슬 이름) 성충(成忠)이 애써 간했지만 듣지 않고 도리어 옥에 가두니 몸이 파리해지고 피곤해서 거의 죽게 되었으나 성충은 글을 올려 말했다. “충신(忠臣)은 죽어도 임금을 잊지 않습니다. 원컨대 한 마디 말만 여쭙고 죽겠습니다. 신(臣)이 일찍이 시국의 변화를 살펴보오니 반드시 병란(兵亂)이 있을 것입니다. 대체로 용병(用兵)은 그 지세(地勢)를 잘 가려야 하는 것이니 상류(上流)에 진을 치고 적을 맞아 싸우면 반드시 보전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또 만일 다른 나라 군사가 오거든 육로(陸路)로는 탄현(炭峴; 침현沈峴이라고도 하니 백제의 요새지要塞地임)을 넘지 말 것이옵고, 수군(水軍)은 기벌포(伎伐浦; 곧 장암長嵓이니 손량孫梁이라고도 하고 지화포只火浦 또는 백강白江이라고도 함)에 적군이 들어오지 못하게 할 것입니다. 그리고 험한 곳에 의지하여 적을 막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왕은 그 말을 깨닫지 못했다. 현경(現慶) 4년 기미(己未; 659)에 백제 오회사(烏會寺; 오합사烏合寺라고도 함)에 크고 붉은 말 한 마리가 나타나 밤낮으로 여섯 번이나 절을 돌아다녔다. 2월에는 여우 여러 마리가 의자왕(義慈王)의 궁중으로 들어왔는데 그 중 한 마리는 좌평(佐平)의 책상 위에 올라앉았다. 4월에는 태자궁(太子宮) 안에서 암탉과 작은 참새가 교미했다. 5월에는 사자수(泗泚水; 부여扶餘에 있는 강 이름) 언덕 위에 큰 물고기가 나와서 죽어 있었는데 길이가 세 길이나 되었으며 이것을 먹은 사람은 모두 죽었다. 9월에는 궁중에 있는 홰나무가 마치 사람이 우는 것처럼 울었으며, 밤에는 귀신이 대궐 남쪽 길에서 울었다. 5년 경신(庚申; 660) 봄 1월엔 서울의 우물물이 핏빛이 되었다. 서쪽 바닷가에 작은 물고기가 나와 죽었는데 이것을 백성들이 다 먹을 수가 없었다. 또 사자수의 물이 핏빛이 되었다. 4월에는 청개구리 수만 마리가 나무 위에 모였다. 서울 시정인(市井人)들이 까닭없이 놀라 달아나는 것이 마치 누가 잡으러 오는 것 같았다. 이래서 놀라 자빠져 죽은 자가 100여 명이나 되었고 재물을 잃은 자는 그 수효를 모를 만큼 많았다. 6월에는 왕흥사(王興寺)의 중들이 보니 배가 큰 물결을 따라 절문으로 들어오는 것 같았다. 또 마치 들사슴과 같은 큰 개가 서쪽에서 사자수 언덕에 와서 대궐을 바라보고 짖더니 이윽고 어디로 갔는지 알 수가 없었으며, 성안에 있는 여러 개들이 길 위에 모여들어 혹은 짖기도 하고 울기도 하다가 얼마 후에야 흩어졌다. 또 귀신 하나가 궁중으로 들어오더니 큰 소리로 부르짖기를, “백제는 망한다, 백제는 망한다”하다가 이내 땅속으로 들어갔다. 왕이 이상히 여겨 사람을 시켜 땅을 파게 하니 석 자 깊이에 거북 한 마리가 있는데 그 등에 글이 씌어 있었다.
“백제는 둥근 달 같고, 신라는 새 달과 같네.”
이 글뜻을 무당에게 물으니 무당은, “둥근 달이라는 것은 가득 찬 것이니 차면 기우는 것입니다. 새 달은 차지 않은 것이니 차지 않으면 점점 차게 되는 것입니다”하자 왕은 노해서 무당을 죽여 버렸다. 어떤 사람이 말했다. “둥근 달은 성(盛)한 것이옵고, 새 달은 미약(微弱)한 것이오니, 생각건데 우리 나라는 점점 성하고 신라는 점점 약해진다는 뜻이 아니겠습니까.” 왕은 이 말을 듣고 기뻐했다.
태종(太宗)은 백제에 괴상한 변고가 많다는 소식을 듣고 5년 경신(庚申; 660)에 김인문(金仁問)을 사신으로 당나라에 보내서 군사를 청했다. 당 고종(高宗)은 좌호위장군(左虎(武)衛將軍) 형국공(荊國公) 소정방(蘇定方)으로 신구도 행군총관(神丘道 行軍摠管)을 삼아 좌위장군(左衛將軍) 유백영(劉伯英)과 좌호위장군(左虎衛將軍) 빙사귀(馮士貴)·좌효위장군(左驍衛將軍) 농효공(龐孝公) 등을 거느리고 13만의 군사를 이끌고 와서 치게 했다. 또 신라 왕 춘추(春秋)로 우이도 행군총관(嵎夷道 行軍摠管)을 삼아 신라의 군사를 가지고 합세하도록 했다.
소정방이 군사를 이끌고 성산(城山)에서 바다를 건너 신라 서쪽 덕물도(德勿島)에 이르자 신라 왕은 장군 김유신(金庾信)을 보내서 정병(精兵) 5만을 거느리고 싸움에 나가게 했다. 의자왕은 이 소식을 듣고 여러 신하들을 모아 싸우고 지킬 계책을 물으니 좌평(佐平) 의직(義直)이 나와 아뢴다. “당나라 군사는 멀리 큰 바다를 건너왔고 또 수전(水戰)에 익숙하지 못하여, 또 신라 군사는 큰 나라가 원조해 주는 것만 믿고 적을 가볍게 여기는 마음이 있습니다. 만일 당나라 군사가 싸움에 이롭지 못한 것을 보면 반드시 의심하고 두려워하여 감히 진격해 오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먼저 당나라 군사와 결전(決戰)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그러나 달솔(達率) 상영(常永) 등은 말한다. “그렇지 않습니다. 당나라 군사는 멀리서 왔기 때문에 속히 싸우려고 서두르고 있으니 그 예봉(銳鋒)을 당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한편 신라 군사는 여러 번 우리에게 패한 때문에 이제 우리 군사의 기세를 바라만 보아도 두려워하지 않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하오니 오늘날의 계교는 마땅히 당나라 군사의 길을 막고 그 군사들이 피로해지기를 기다릴 것입니다. 그러니 먼저 일부 조그만 군사로 신라를 쳐서 그 예기(銳氣)를 꺾은 연후에 편의를 보아서 싸운다면 군사를 하나도 죽이지 않고서 나라를 보전할 것입니다.” 이리하여 왕은 망설이고 어느 말을 따를지 모르고 있었다. 이때 좌평(佐平) 흥수(興首)가 죄짓고 고마며지현(古馬▩知縣)에 귀양가 있었으므로 사람을 보내어 물었다. “일이 급하니 어찌하면 좋겠는가.” 흥수는 말한다. “대체로 좌평 성충(成忠)의 말과 같사옵니다.” 대신들은 이 말을 믿지 않고 말하기를, “흥수는 죄인의 몸이어서 임금을 원망하고 나라를 사랑하지 않는 것이오니 그 말은 쓸 것이 되지 못합니다. 당나라 군사로 하여금 백강(白江; 기벌포伎伐浦)에 들어가서 강물을 따라 내려오되 배를 나란히 하지 못하게 할 것입니다. 또 신라군은 탄현(炭峴)에 올라와서 소로(小路)를 따라 내려오되 말[馬]을 나란히 하지 못하게 할 것입니다. 이렇게 해 놓고 군사를 놓아 친다면 마치 닭장에 든 닭과 그물에 걸린 물고기와 같을 것입니다” 했다. 왕은 “그 말이 옳다” 했다.
또 들으니 당나라 군사와 신라 군사가 이미 백강과 탄현을 지났다 한다. 의자왕은 장군 계백(階(偕)伯)을 보내 결사대(決死隊) 5,000명을 거느리고 황산(黃山)으로 나가 신라 군사와 싸우게 했더니 계백은 네 번 싸워 네 번 다 이겼다. 하지만 군사는 적고 힘이 다하여 마침내 패하고 계백은 전사했다. 이에 당나라 군사와 신라 군사는 합세해서 전진하여 진구(津口)까지 나가서 강가에 군사를 주둔시켰다. 이때 갑자기 새가 소정방의 진영(陣營) 위에서 맴돌므로 사람을 시켜서 점을 치게 했더니 “반드시 원수(元帥)가 상할 것입니다” 한다. 정방이 두려워하여 군사를 물리고 싸움을 중지하려 하므로 김유신이 소정방에게 이르기를, “어찌 나는 새의 괴이한 일을 가지고 천시(天時)를 어긴단 말이오. 하늘에 응하고 민심에 순종해서 지극히 어질지 못한 자를 치는데 어찌 상서롭지 못한 일이 있겠소”하고 신검(神劍)을 뽑아 그 새를 겨누니 새는 몸뚱이가 찢어져 그들의 자리 앞에 떨어진다. 이에 정방은 백강 왼쪽 언덕으로 나와서 산을 등지고 진을 치고 싸우니 백제군이 크게 패했다. 당나라 군사는 조수(潮水)를 타고 전선(戰船)이 꼬리를 물어 북을 치면서 전진했다. 정방은 보병과 기병을 이끌고 바로 백제의 도성(都城)으로 쳐들어가 30리쯤 되는 곳에 머물렀다. 이때 백제에서는 군사를 다 내어 막았지만 패해서 죽은 자가 1만여 명이나 되었다. 이리하여 당나라 군사는 이긴 기세(氣勢)를 타고서 성으로 들이닥쳤다.
의자왕은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을 알고 탄식한다. “내가 성충의 말을 듣지 않고 있다가 이 지경에 이르렀구나.” 의자왕은 드디어 태자 융(隆; 효孝라고도 했지만 잘못이다)과 함께 북비(北鄙)로 도망했다. 정방이 그 성을 포위하자 왕의 둘째아들 태(泰)가 스스로 왕이 되어 무리를 거느리고 성을 굳게 지켰다. 이때 태장의 아들 문사(文思)가 태(泰)에게 말한다. “왕이 태자와 함께 성에서 나가 달아났는데 숙부(叔父)가 맘대로 왕이 되었으니, 만일 당나라 군사가 포위한 것을 풀고 물러간다면 그때에는 우리들이 어떻게 온전할 수가 있겠습니까”하고는 좌우 사람들을 거느리고 성을 넘어 나아가자 백성들은 모두 그를 따르니 태(泰)는 이것을 말릴 수가 없었다. 소정방이 군사를 시켜 성첩(城堞)을 세우고 당나라 깃발을 꽂으니 태(泰)는 일이 매우 급해서 문을 열고 항복하기를 청했다. 이에 왕과 태자 융(隆), 왕자 태(泰), 대신 정복(貞福)과 여러 성이 모두 항복했다. 소정방은 왕 의자와 태자 융, 왕자 태, 왕자 연(演) 및 대신·장사(將士) 88명과 백성 1만 2,807명을 당나라 서울로 보냈다.
백제에는 원래 5부(部), 76군(郡), 200성(城), 36만 호(戶)가 있었는데 이때 당나라에서는 이곳에 웅진(熊津)·마한(馬韓)·동명(東明)·금련(金蓮)·덕안(德安) 등 다섯 도독부(都督府)를 두고 우두머리를 뽑아서 도독(都督)·자사(刺史)를 삼아 다스리게 했다. 낭장(郎將) 유인원(劉仁願)에게 명하여 사자성(泗泚城)을 지키게 하고, 도 좌위낭장(左衛郎將) 왕문도(王文度)로 웅진도독(熊津都督)을 삼아 백제에 남아 있는 백성들을 무마하게 했다. 소정방은 포로들을 이끌고 당나라 임금에게 뵈니, 임금은 이들을 책망만 하고 용서해 주었다.
의자왕이 그곳에서 병으로 죽자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 위위경(衛尉卿)을 증직(贈職)하고 그의 옛 신하들이 가서 조상하는 것을 허락했다. 또 명하여 손호(孫皓)와 진숙보(陳叔寶)의 무덤 옆에 장사지내게 하고 모두 비를 세워 주었다.
7년 임술(壬戌; 662)에 당에서는 소정방을 명하여 요동도행군대총관(遼東道行軍大摠管)을 삼았다가 다시 평양도(平壤道)로 고쳐 고구려군을 패강(浿江)에서 깨뜨리고 마읍산(馬邑山)을 빼앗아 진영(陣營)을 세우고 드디어 평양성(平壤城)을 포위했으나 때마침 큰 눈이 내려서 포위를 풀고 돌아가니, 양주안집대사(凉州安集大使)를 삼아 토번(吐藩)을 평정했다.
건봉(乾封) 2년(667)에 소정방이 죽자 당나라 황제는 슬퍼하여 좌효기대장군(左驍騎大將軍) 유주도독(幽州都督)을 증직하고 시호(諡號)를 장(莊)이라 했다(이상은 <당사唐史>에 있는 글이다).
<신라별기(新羅別記)>에 의하면, 문호(文虎(武))왕이 즉위한 5년 을축(乙丑; 665) 8월 경자(庚子)에 왕이 친히 군사를 거느리고 웅진성(熊津城)에 가서 가왕(假王) 부여(扶餘) 융(隆)과 만나 단(壇)을 만들고 백마(白馬)를 잡아 맹세하는데, 먼저 천신(天神)과 산천(山川)의 영(靈)에 제사를 지낸 뒤에 말의 피를 뿌리고 글을 지어 맹세했다.
“저번에 백제의 선왕(先王)이 순종(順從)하는 것과 반역하는 이치에 어두워 이웃 나라와 평화를 두텁게 하지 않고 인친(姻親)과 화목하지 않으며, 고구려와 결탁해서 왜국(倭國)과 서로 통하여, 그들과 함께 잔포(殘暴)한 짓을 했다. 신라를 침략하여 성읍(城邑)을 파괴하고 백성을 짓밟아 거의 편안한 해가 없었다. 중국의 천자(天子)는 한 물건이라도 제가 살 곳을 잃는 것을 민망히 여기고 백성들이 해독을 입는 것을 불쌍히 여겨, 자주 사신을 보내서 사이좋게 지내기를 타일렀었다. 그러나 백제는 지리(地理)의 험하고 먼 것을 믿고 천경(天經)을 업신여기니 황제(皇帝)는 크게 노하여 삼가 정벌(征伐)을 행하니 깃발이 가리키는 곳 한 번 싸움에 이 땅을 평정했다. 마땅히 궁실(宮室)과 주택(住宅)을 무너뜨려 못을 만들어서 자손들을 경계하고 그 폐단의 근원을 아주 뽑아 없애어 뒷 세상에 교훈을 보이려 한다. 귀순(歸順)해 오는 자는 회유하고 반역하는 자를 정벌하는 것은 선왕의 아름다운 법이요, 망한 나라를 흥하게 하고 끊어진 대(代)를 잇게 하는 것은 전철(前哲)의 공통된 법칙이다. 일은 반드시 옛것을 본받아야 하는 것은 전의 사책(史冊)에 전해 오는 것이기 때문에, 전백제왕(前百濟王) 사가정경(司稼正卿) 부여(扶餘) 융(隆)을 세워 웅진도독(熊津都督)을 삼아 그 선조(先祖)의 제사를 받들게 하고, 상재(桑梓)를 보전케 하는 것이다. 신라에 의지하여 길이 우방(友邦)이 되어 각각 묵은 감정을 없애고 좋은 의(誼)를 맺어 화친하게 지낼 것이며 삼가 조명(詔命)을 받들어 영원히 번국(藩國)이 될 것이다. 이에 사자(使者) 우위위장군(右威衛將軍) 노성현공(魯城縣公) 유인원(劉仁願)을 보내서 친히 권유하여 나의 뜻을 자세히 선포(宣布)하는 것이다. 혼인할 것을 약속하고 맹세를 소중히 여겨 희생(犧牲)을 잡아 피를 뿌리고 함께 시종(始終)을 두텁게 할 것이다. 재앙을 나누고 환란(患亂)을 서로 구원하여 은의(恩誼)를 형제처럼 할 것이다. 삼가 윤언(綸言)을 받들어 감히 버리지 말 것이며, 이미 맹세를 정한 뒤에는 함께 변하지 말도록 힘쓸 것이다. 만일 어기고 배반하여 그 덕을 변하여 군사를 일으켜 변방을 침범하는 때에는 신명(神明)이 이를 살펴서 백 가지 재앙을 내리시어 자손들도 키우지 못하고 사직(社稷)도 지키지 못하여 제사는 끊어져서 남는 씨가 없게 될 것이다. 그런 때문에 여기에 금서철계(金書鐵契)를 만들어 종묘(宗廟)에 간직해 두는 것이니 자손은 만대(萬代)가 되도록 감히 어기지 말 것이다. 신(神)은 이를 듣고 이에 흠향하고 복을 주시옵소서.”
맹세가 끝나자 폐백(幣帛)을 단 북쪽에 묻고 맹세한 글은 신라의 대묘(大廟)에 간직해 두었다. 이 맹세하는 글은 대방도독(帶方都督) 유인궤(劉仁軌)가 지은 것이다(위에 있는 <당사唐史>의 글을 상고해 보면, 소정방蘇定方이 의자왕義慈王과 태자太子 융隆 들을 당唐나라 서울에 보냈다고 했는데 여기에서는 부여왕扶餘王 융隆을 만났다고 했으니, 당唐나라 황제皇帝가 융隆의 죄를 용서하고 돌려보내서 웅진도독熊津都督을 삼은 것을 알 수 있다. 그런 때문에 맹문盟文에도 분명히 말했으니 이것으로 증거가 된다).
또 <고기(古記)>에는 이렇게 말했다. “총장(總章) 원년(元年) 무진(戊辰; 668, 총장總章 무진戊辰이라면 이적李勣의 일이니 하문下文에 소정방蘇定方이라고 한 것은 잘못이다. 만일 정방定方의 일이라면 연호는 용삭龍朔 2년 임술壬戌에 해당하며 평양平壤을 포위했을 때의 일이다)에 신라에서 청한 당나라 군사가 평양 교외에 주둔하면서 글을 보내 말하기를, ‘급히 군자(軍資)를 보내 달라’고 했다. 이에 왕이 여러 신하들을 모아 놓고 묻기를, ‘고구려에 들어가서 당나라 군사가 주둔한 곳으로 간다는 것은 그 형세가 몹시 위험하다. 그러나 우리가 청한 당나라 군사가 양식이 떨어졌는데 군량을 보내 주지 않는다는 것도 옳지 못하니 어찌 하면 좋겠는가’ 했다. 이에 김유신이 아뢰었다. ‘신 등이 군자(軍資)를 수송하겠사오니 대왕께서는 염려하지 마십시오’ 했다. 이에 유신(庾信)·인문(仁問) 등이 군사 수만 명을 거느리고 고구려 국경 안에 들어가 곡식 2만 곡(斛)을 갖다주고 돌아오니 왕이 크게 기뻐했다. 또 군사를 일으켜 당나라 군사와 합하고자 할 때 유신이 먼저 연기(然起)·병천(兵川) 두 사람을 보내서 그 합세할 시기를 물었다. 이때 당나라 장수 소정방이 종이에 난새[鸞]와 송아지[犢]의 두 그림을 그려 보냈다. 신라 사람들은 그 뜻을 알지 못하여 사람을 보내서 원효법사(元曉法師)에게 물었다. 원효는 해석하기를, ‘속히 군사를 돌이키라는 뜻이니 송아지와 난새를 그린 것은 두 물건이 끊어지는 것을 뜻한 것입니다’ 했다. 이에 유신은 군사를 돌려 패수(浿水)를 건너려 할 때 명(命)을 내려 ‘뒤떨어지는 자는 베이리라’ 했다. 이리하여 군사들이 앞을 다투어 강을 건너는데 반쯤 건너자 고구려 군사가 쫓아와서 아직 건너지 못한 자를 잡아 죽였다. 그러나 이튿날 유신은 고구려 군사를 반격하여 수만명을 잡아 죽였다.”
<백제고기(百濟古記)>에는 이렇게 말했다. “부여성(扶餘城) 북쪽 모퉁이에 큰 바위가 있는데 아래로 강물을 내려다보고 있다. 옛날부터 전해 오는 말에 의자왕과 여러 후궁(後宮)들은 죽음을 면하지 못할 것을 알고 서로 이르기를, ‘차라리 자살해 죽을지언정 남의 손에 죽지 않겠다’하고 서로 이끌고 여기에 와서 강에 몸을 던져 죽었다” 했다. 때문에 이 바위를 타사암(墮死岩)이라고 하나 이것은 속설(俗說)이 잘못 전해진 것이다. 다만 궁녀(宮女)들만이 여기에 떨어져 죽은 것이오 의자왕이 당나라에서 죽었다는 것은 <당사(唐史)>에 명문(明文)이 있다.
<신라고전(新羅古傳)>에는 이러하다. “소정방이 이미 고구려·백제 두 나라를 토벌하고 또 신라마저 치려고 머물러 있었다. 이때 유신이 그 뜻을 알아채고 당나라 군사를 초대하여 독약을 먹여 죽이고는 모두 쓸어 묻었다. 지금 상주(尙州) 지경에 당교(唐橋)가 있는데 이것이 그들을 묻은 곳이다.”(<당사唐史>를 상고하건대 그 죽은 까닭은 말하지 않고 다만 죽었다고만 했으니 무슨 까닭일까? 감추기 위한 것인가. 향전鄕傳이 근거가 없는 것인가. 만일 임술壬戌년 고구려高句麗 싸움에 신라 사람이 정방定方의 군사를 죽였다면 그 후일後日인 총장總章 무진戊辰에 어찌 군사를 청하여 고구려高句麗를 멸할 수가 있었겠는가. 이것으로 보면 향전鄕傳의 근거 없음을 알 수가 있다. 다만 무진戊辰에 고구려를 멸한 후에 唐나라에 신하로서 섬기지 않고 만대로 그 땅을 소유所有한 일은 있었으나 소정방蘇定方·이적李勣 두 공公을 죽이기까지 한 일은 없었다)
당나라 군사가 백제를 평정하고 돌아간 뒤에 신라 왕은 여러 장수에게 명하여 백제의 남은 군사를 쫓아서 잡게 하고 한산성(漢山城)에 주둔하니 고구려·말갈(靺鞨)의 두 나라 군사가 와서 포위하여 서로 싸웠으나 끝이 나지 않아 5월 11일에 시작해 6월 22일에 이르니 우리 군사는 몹시 위태로웠다. 왕이 듣고 여러 신하와 의논했으나 장차 어찌할 지 결정하지 못하고 있는데 유신이 달려와서 아뢴다. “일이 급하여 사람의 힘으로는 할 수가 없고, 오직 신술(神術)이라야 구원할 수가 있습니다”하고 성부산(星浮山)에 단(壇)을 모드고 신술을 쓰니 갑자기 큰 독만한 광채가 단 위에서 나오더니 별이 북쪽으로 날아갔다(이 일로 해서 성부산星浮山이라고 하나 산의 이름에 대해서는 다른 설說도 있다. 산山은 도림都林 남쪽에 있는데 솟은 한 봉우리가 이것이다. 서울에서 한 사람이 벼슬을 구하려고 그 아들을 시켜 큰 횃불을 바라보고 모두 말하기를, 그곳에 괴상한 별이 나타났다고 했다. 王이 이 말을 듣고 근심하고 두려워하여 사람을 모아 기도하게 했더니 그 아버지가 거기에 응모應募하려 했다. 그러나 일관日官이 아뢰기를 “이것은 별로 괴상한 일이 아니옵고 다만 한 집에 아들이 죽고 아비가 울 징조입니다” 했다. 그래서 드디어 기도를 그만두었다. 이날 밤 그 아들이 산에서 내려오다가 범에게 물려 죽었다). 한산성 안에 있던 군사들은 구원병이 오지 않는 것을 원망하여 서로 보고 울 뿐이었는데 이때 적병이 이를 급히 치고자 하자 갑자기 광채가 남쪽 하늘 끝으로부터 오더니 벼락이 되어 적의 포석(砲石) 30여 곳을 쳐부쉈다. 이리하여 적군의 활과 화살과 창이 부서지고 군사들은 모두 땅에 자빠졌다가 한참 만에야 깨어나서 모두 흩어져 달아나니 우리 군사는 무사히 돌아올 수 있었다.
태종(太宗; 무열왕武烈王)이 처음 왕위에 오르자, 어떤 사람이 돼지를 바쳤는데 머리는 하나요 몸뚱이는 둘이요, 발은 여덟이었다. 의론하는 자가 이것을 보고 말했다. “이것은 반드시 육합(六合)을 통일할 상서(祥瑞)입니다.” 이 왕대(王代)에 비로소 중국의 의관(衣冠)과 아홀(牙笏)을 쓰게 되었는데 이것은 자장법사(慈藏法師)가 당나라 황제에게 청해서 가져온 것이었다.
신문왕(神文王) 때에 당나라 고종(高宗)이 신라에 사신을 보내서 말했다. “나의 성고(聖考) 당태종(唐太宗)은 어진 신하 위징(魏徵)·이순풍(李淳風)들을 얻어 마음을 합하고 덕을 같이하여 천하를 통일했다. 그런 때문에 이를 태종황제(太宗皇帝)라고 했다. 너의 신라는 바다 밖의 작은 나라로서 태종(太宗)이란 칭호(稱號)를 써서 천자(天子)의 이름을 참람되이 하고 있으니 그 뜻이 충성되지 못하다. 속히 그 칭호를 고치도록 하라.” 이에 신라왕은 표(表)를 올려 말했다. “신라는 비록 작은 나라지만 성스러운 신하 김유신을 얻어 삼국을 통일했으므로 태종(太宗)이라 한 것입니다.” 당나라 황제가 그 글을 보고 생각하니, 그가 태자로 있을 때에 하늘에서 허공에 대고 부르기를, “삼삼천(三三天)의 한 사람이 신라에 태어나서 김유신이 되었느니라” 한 일이 있어서 책에 기록해 둔 일이 있는데, 이것을 꺼내 보고는 놀라고 두려움을 참지 못했다. 다시 사신을 보내어 태종의 칭호를 고치지 않아도 좋다고 했다.
장춘랑(長春郞)과 파랑(罷郞)
처음에 백제 군사와 황산에서 싸울 때 장춘랑(長春郞)과 파랑(波浪)이 진중(陣中)에서 죽었다. 그 뒤 백제를 칠 때 그들은 태종(太宗)의 꿈에 나타나서 말했다. “신 등이 옛날 나라를 위해서 몸을 바쳤고, 이제 백골(白骨)이 되어서도 나라를 완전히 지키려고 종군(從軍)하여 게으르지 않습니다. 하오나 당(唐)나라 장수 소정방(蘇定方)의 위엄에 눌려서 남의 뒤로만 쫓겨다니고 있습니다. 원컨대 왕께서는 우리에게 적은 군사를 주십시오.”
대왕(大王)은 놀라고 괴이하게 여겨 두 혼(魂)을 위하여 하룻동안 모산정(牟山亭)에서 불경(佛經)을 외고 또 한산주(漢山州)에 장의사(壯義寺)를 세워 그들의 명복(冥福)을 빌게 했다.
제 2권
기이(紀異) 제2
문호왕(文虎(武)王) 법민(法敏)
왕이 처음 즉위한 용삭(龍朔) 신유(辛酉; 661)에 사자수(泗泚水) 남쪽 바닷속에 한 여자의 시체(屍體)가 있는데, 키는 73척, 발의 길이는 6척, 음문(陰門)의 길이가 3척이었다. 혹은 말하기를 키가 18척이며 건봉(乾封) 2년 정묘(丁卯; 667)의 일이라고 했다.
총장(總章) 무진(戊辰; 668)에 왕은 군사를 거느리고 인문(仁問)·흠순(欽純) 등과 함께 평양(平壤)에 이르러 당(唐)나라 군사와 합세하여 고구려(高句麗)를 멸망시켰다. 당나라 장수 이적(李勣)은 고장왕(高藏王)을 잡아가지고 당나라로 돌아갔다(왕王의 성姓이 고高씨이므로 고장高藏이라 했다. <당서唐書> 고종기高宗紀를 상고해 보면, 현경現慶 5년 경신庚申(660)에 소정방蘇定方 등이 백제百濟를 정벌하고 그 뒤 12월에 대장군大將軍 계여하契如何로 패강도浿江道 행군대총관行軍大摠管을, 또 소정방蘇定方으로 요동도遼東道 대총관大摠管을 삼고, 유백영劉伯英으로 평양도平壤道 대총관大摠管을 삼아서 고구려를 쳤다. 또 다음해 신유辛酉 정월正月에는 소사업蕭嗣業으로 부여도扶餘道 총관摠管을 삼고, 임아상任雅相으로 패강도浿江道 총관摠管을 삼아 군사 35만 명을 거느리고 고구려를 치게 했다. 8월 갑술甲戌에 소정방蘇定方 등은 고구려와 패강浿江에서 싸우다가 패해서 도망했다. 건봉乾封 원元년 병인丙寅(666) 6월에 방동선龐同善·고임高臨·설인귀薛仁貴·이근행李謹行 등으로 이를 후원케 했다. 9월에 방동선龐同善이 고구려와 싸워서 패했다. 12월 기유己酉에 이적李勣으로 요동도遼東道 행군대총관行軍大摠管을 삼아 육총관六摠管의 군사를 거느리고 고구려를 치게 했다. 총장總章 원元년 무진戊辰(668) 9월 계사癸巳에 이적李勣이 고장왕高藏王을 사로잡았다. 12월 정사丁巳에 포로를 황제에게 바쳤다. 상원上元 원년元年 갑술甲戌(674) 2월에 유인궤劉仁軌로 계림도鷄林道 총관摠管을 삼아서 신라를 치게 했다. 우리 나라 <고기古記>에는 “당唐나라가 육로장군陸路將軍 공공孔恭과 수로장군水路將軍 유상有相을 보내서 신라의 김유신金庾信 등과 함께 고구려를 멸망시켰다”고 했다. 그런데 여기에는 인문仁問과 흠순欽純 등의 일만 말하고 유신庾信은 없으니 자세히 알 수 없는 일이다).
이때 당나라의 유병(游兵)과 여러 장병(將兵)들이 진(鎭)에 머물러 있으면서 장차 우리 신라(新羅)를 치려고 했으므로 왕이 알고 군사를 내어 이를 쳤다. 이듬해에 당나라 고종(高宗)이 인문(仁問) 등을 불러들여 꾸짖기를, “너희가 우리 군사를 청해다가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나서 이제 우리를 침해하는 것은 무슨 까닭이냐”하고 이내 원비(圓扉)에 가두고 군사 50만 명을 훈련하여 설방(薛邦)으로 장수를 삼아 신라를 치려고 했다.
이때 의상법사(義相法師)가 유학(留學)하러 당나라에 갔다가 인문을 찾아보자 인문은 그 사실을 말했다. 이에 의상이 돌아와서 왕께 아뢰니 왕은 몹시 두려워하여 여러 신하들을 모아 놓고 이것을 막아 낼 방법을 물었다. 각간(角干) 김천존(金天尊)이 말했다. “요새 명랑법사(明朗法師)가 용궁(龍宮)에 들어가서 비법(秘法)을 배워 왔으니 그를 불러 물어보십시오.” 명랑이 말했다. “낭산(狼山) 남쪽에 신유림(神遊林)이 있으니 거기에 사천왕사(四天王寺)를 세우고 도량(道場)을 개설(開設)하면 좋겠습니다.” 그때 정주(貞州)에서 사람이 달려와 보고한다. “당나라 군사가 무수히 우리 국경에 이르러 바다 위를 돌고 있습니다.” 왕은 명랑을 불러 물었다. “일이 이미 급하게 되었으니 어찌 하면 좋겠는가.” 명랑이 말한다. “여러 가지 빛의 비단으로 절을 가설(假設)하면 될 것입니다.” 이에 채색 비단으로 임시로 절을 만들고 풀[草]로 오방(五方)의 신상(神像)을 만들었다. 그리고 유가(瑜伽)의 명승(明僧) 열두 명으로 하여금 명랑을 우두머리로 하여 문두루(文豆婁)의 비밀한 법(法)을 쓰게 했다. 그때 당나라 군사와 신라 군사는 아직 교전(交戰)하기 전인데 바람과 물결이 사납게 일어나서 당나라 군사는 모두 물속에 침몰(沈沒)되었다. 그 후에 절을 고쳐 짓고 사천왕사(四天王寺)라 하여 지금까지 단석(壇席)이 없어지지 않았다(<국사國史>에는 이 절을 고쳐 지은 것이 조로調露 원년元年 기묘己卯(679)의 일이라고 했다).
그 후 신미년(辛未; 671)에 당나라는 다시 조헌(趙憲)을 장수로 하여 5만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쳐들어왔으므로 또 그전의 비법을 썼더니 배는 전과 같이 침몰되었다. 이때 한림랑(翰林郞) 박문준(朴文俊)은 인문을 따라 옥중에 있었는데 고종(高宗)이 문준을 불러서 묻는다. “너희 나라에는 무슨 비법이 있기에 두 번이나 대병(大兵)을 내었는데도 한 명도 살아서 돌아오지 못하느냐.” 문준이 아뢰었다. “배신(陪臣)들은 상국(上國)에 온 지 10여 년이 되었으므로 본국의 일은 알지 못합니다. 다만 멀리서 한 가지 일만을 들었을 뿐입니다. 저희 나라가 상국의 은혜를 두텁게 입어 삼국을 통일하였기에 그 은덕(恩德)을 갚으려고 낭산(狼山) 남쪽에 새로 천왕사(天王寺)를 짓고 황제의 만년 수명(萬年壽命)을 빌면서 법석(法席)을 길이 열었다는 일뿐입니다.” 고종은 이 말을 듣고 크게 기뻐하여 이에 예부시랑(禮部侍郞) 낙붕귀(樂鵬龜)를 신라에 사신으로 보내어 그 절을 살펴보도록 했다. 신라 왕은 당나라 사신이 온다는 사실을 먼저 알고 이 절을 사신에게 보여서는 안 될 것이라고 하여 그 남쪽에 따로 새 절을 지어 놓고 기다렸다. 사신이 와서 청한다. “먼저 황제의 수(壽)를 비는 천왕사에 가서 분향(焚香)하겠습니다.” 이에 새로 지은 절로 그를 안내하자 그 사신은 절 문 앞에 서서, “이것은 사천왕사(四天王寺)가 아니고, 망덕요산(望德遙山)의 절이군요”하고는 끝내 들어가지 않았다. 국인(國人)들이 금 1,000냥을 주었더니 그는 본국에 돌아가서 아뢰기를, “신라에서는 천왕사(天王寺)를 지어 놓고 황제의 수(壽)를 축원할 뿐이었습니다”했다. 이때 당나라 사신의 말에 의해 그 절을 망덕사(望德寺)라고 했다(혹 효소왕孝昭王 때의 일이라고 하나 잘못이다).
신라 왕은 문준이 말을 잘해서 황제도 그를 용서해 줄 뜻이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에 강수(强首) 선생에게 명하여 인문의 석방을 청하는 표문(表文)을 지어 사인(舍人) 원우(遠禹)를 시켜 당나라에 아뢰게 했더니 황제는 표문을 보고 눈물을 흘리면서 인문을 용서하고 위로해 돌려보냈다. 인문이 옥중에 있을 때 신라 사람은 그를 위하여 절을 지어 인용사(仁容寺)라 하고 관음도량(觀音道場)을 열었는데 인문이 돌아오다가 바다 위에서 죽었기 때문에 미타도량(彌陀道場)으로 고쳤다. 지금까지도 그 절이 남아 있다. 대왕(大王)이 나라를 다스린 지 21년 만인 영륭(永隆) 2년 신미(辛未; 681)에 죽으니 유명(遺命)에 의해서 동해중(東海中)의 큰 바위 위에 장사지냈다. 왕은 평시(平時)에 항상 지의법사(智義法師)에게 말했다. “나는 죽은 뒤에 나라를 지키는 용(龍)이 되어 불법을 숭봉(崇奉)해서 나라를 수호하려 하오.” 이에 법사가 말했다. “용은 짐승의 응보(應報)인데 어찌 용이 되신단 말입니까.” 왕이 말했다. “나는 세상의 영화(榮華)를 싫어한 지가 오래되오. 만일 추한 응보로 내가 짐승이 된다면 이야말로 내 뜻에 맞는 것이오.”
왕이 처음 즉위했을 때 남산(南山)에 장창(長倉)을 설치하니, 길이가 50보(步), 너비가 15보(步)로 미곡(米穀)과 병기(兵器)를 여기에 쌓아 두니 이것이 우창(右倉)이요, 천은사(天恩寺) 서북쪽 산 위에 있는 것은 좌창(左倉)이다. 다른 책에는, “건복(建福) 8년 신해(辛亥; 591)에 남산성(南山城)을 쌓았는데 그 둘레가 2,850보(步)다”했다. 그렇다면 이것은 진덕왕대(眞德王代)에 처음 쌓았다가 이때에 중수(重修)한 것이다. 또 부산성(富山城)을 처음으로 쌓기 시작하여 3년 만에 마치고 안북하변(安北河邊)에 철성(鐵城)을 쌓았다. 또 서울에 성곽(城郭)을 쌓으려 하여 이미 관리(官吏)를 갖추라고 명령하자 그때 의상법사(義相法師)가 이 말을 듣고 글을 보내서 아뢰었다. “왕의 정교(政敎)가 밝으시면 비록 풀 언덕에 금을 그어 성이라 해도 백성들은 감히 이것을 넘지 않을 것이며, 재앙을 씻어 깨끗이 하고 모든 것이 복이 될 것이나, 정교(政敎)가 밝지 못하면 비록 장성(長城)이 있다 하더라도 재화(災禍)를 없이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왕은 이 글을 보고 이내 그 역사(役事)를 중지시켰다.
인덕(麟德) 3년 병인 (丙寅;666) 3월 10일에 어떤 민가(民家)에서 길이(吉伊)라는 종이 한꺼번에 세 아들을 낳았다. 총장(總章) 3년 경오(庚午; 670) 정월 7일에는 한기부(漢岐部)의 일산급간(一山級干; 혹은 성산아간成山阿干)의 종이 한꺼번에 네 아이를 낳았는데 딸 하나에 아들 셋이었다. 나라에서 상으로 곡식 200석(石)을 주었다. 또 고구려를 친 뒤에 그 나라 왕손(王孫)이 귀화(歸化)하자 그를 진골(眞骨)의 지위에 두게 했다.
어느날 왕은 그의 서제(庶弟) 차득공(車得公)을 불러서 말하기를, “네가 재상이 되어 백관(百官)들을 고루 다스리고 사해(四海)를 태평하게 하라”하니 차득공은 말한다. “폐하께서 만일 소신(小臣)을 재상으로 삼으시려 하신다면 신은 원컨대 남몰래 국내를 돌아다니면서 민간부역(民間賦役)의 괴롭고 편안한 것과, 조세(租稅)의 가볍고 무거운 것과, 관리(官吏)의 청렴하고 재물을 탐하는 것을 알아 보고 난 뒤에 그 직책을 맡을까 합니다.” 왕은 그 말을 좇았다. 공(公)은 승의(僧衣)를 입고 비파(琵琶)를 들어 마치 거사(居士)의 모습을 하고 서울을 떠났다. 아슬라주(阿瑟羅州; 지금의 명주溟州)·우수주(牛首州; 지금의 춘주春州)·북원경(北原京; 지금의 충주忠州)을 거쳐 무진주(武珍州; 지금의 해양海陽)에 이르러 두루 촌락(村落)을 돌아다니노라니 무진주의 관리 안길(安吉)이 그를 이인(異人)인 줄 알고 자기 집으로 청해다가 정성을 다해서 대접했다. 밤이 되자 안길은 처첩(妻妾) 세 사람을 불러 말했다. “오늘밤에 거사(居士) 손님을 모시고 자는 자는 내가 몸을 마치도록 함께 살 것이오.” 두 아내는, “차라리 함께 살지 못할지언정 어떻게 남과 함께 잔단 말이오”했다. 그 중에 아내 한 사람이 말한다. “그대가 몸을 마치도록 함께 살겠다면 명령을 받들겠습니다.” 이튿날 일찍 떠나면서 거사는 말했다. “나는 서울 사람으로서 내 집은 황룡사(皇龍寺)와 황성사(皇聖寺) 두 절 중간에 있고, 내 이름은 단오(端午; 속언俗言에 단오端午를 차의車衣라고 함)요. 주인이 만일 서울에 오거든 내 집을 찾아 주면 고맙겠소.” 그 뒤에 차득공(車得公)은 서울로 돌아와서 재상이 되었다. 나라 법에 해마다 각 고을의 향리(鄕吏) 한 사람을 서울에 있는 여러 관청에 올려 보내서 지키게 했으니 이것이 곧 지금이 기인(其人)이다. 이때 안길이 차례가 되어 서울로 왔다. 두 절 사이로 다니면서 단오거사(端午居士)의 집을 물어도 아는 사람이 없다. 안길은 길 가에 오랫동안 서 있노라니 한 늙은이가 지나다가 그 말을 듣고 한참 동안 생각하더니 말한다. “두 절 사이에 있는 집은 대내(大內)이고 단오란 바로 차득공(車得公)이오. 그가 외군(外郡)에 비밀히 돌았을 때 아마 그대는 어떠한 사연과 약속이 있었던 듯하오.” 안길이 그 사실을 말하자, 노인은 말한다. “그대는 궁성(宮城) 서쪽 귀정문(歸正門)으로 가서 출입하는 궁녀(宮女)를 기다렸다가 말해 보오.” 안길은 그 말을 좇아서 무진주의 안길이 뵈러 문밖에 왔다고 했다. 차득공이 이 말을 듣고 달려 나와 손을 잡아 궁중으로 들어가더니 공(公)의 비(妃)를 불러내어 안길과 함께 잔치를 벌였는데 음식이 50가지나 되었다. 이 말을 임금께 아뢰고 성부산(星浮山; 혹은 성손평산星損平山) 밑에 있는 땅을 무진주 상수(上守)의 소목전(燒木田)으로 삼아 백성들의 벌채(伐採)를 금지하여 사람들이 감히 가까이 가지 못하니 안팎 사람들이 모두 부러워했다. 산 밑에 밭 30무(畝)가 있는데 씨 3석(石)을 뿌리는 밭이다. 이 밭에 풍년이 들면 무진주가 모두 풍년이 들고, 흉년이 들면 무진주도 또한 흉년이 들었다 한다.
만파식적(萬波息笛)
제31대 신문대왕(神文大王)의 이름은 정명(政明), 성은 김씨(金氏)이다. 개요(開耀) 원년(元年) 신사(辛巳; 681) 7월 7일에 즉위했다. 아버지 문무대왕(文武大王)을 위하여 동해(東海) 가에 감은사(感恩寺)를 세웠다(절 안에 있는 기록에는 이렇게 말했다. 문무왕文武王이 왜병倭兵을 진압하고자 이 절을 처음 창건創建했는데 끝내지 못하고 죽어 바다의 용龍이 되었다. 그 아들 신문왕神文王이 왕위王位에 올라 개요開耀 2년(682)에 공사를 끝냈다. 금당金堂 뜰 아래에 동쪽을 향해서 구멍을 하나 뚫어 두었으니 용龍이 절에 들어와서 돌아다니게 하기 위한 것이다. 대개 유언遺言으로 유골遺骨을 간직해 둔 곳은 대왕암大王岩이고, 절 이름은 감은사感恩寺이다. 뒤에 용龍이 나타난 것을 본 곳을 이견대利見臺라고 했다). 이듬해 임오(壬午) 5월 초하루(다른 책에는 천수天授 원년元年이라 했으나 잘못)에 해관(海官) 파진찬(波珍飡) 박숙청(朴夙淸)이 아뢰었다. “동해 속에 있는 작은 산 하나가 물에 떠서 감은사를 향해 오는데 물결에 따라 이리저리 왔다갔다 합니다.” 왕이 이상히 여겨 일관(日官) 김춘질(金春質; 혹은 춘일春日)을 명하여 점을 치게 했다. “대왕의 아버님께서 지금 바다의 용(龍)이 되어 삼한(三韓)을 진호(鎭護)하고 계십니다. 또 김유신공(金庾信公)도 삼삼천(三三天)의 한 아들로서 지금 인간 세계에 내려와 대신(大臣)이 되었습니다. 이 두 성인(聖人)이 덕(德)을 함께 하여 이 성을 지킬 보물을 주시려고 하십니다. 만일 폐하께서 바닷가로 나가시면 반드시 값으로 칠 수 없는 큰 보물을 얻으실 것입니다.” 왕은 기뻐하여 그달 7일에 이견대(利見臺)로 나가 그 산을 바라보고 사자(使者)를 보내어 살펴보도록 했다. 산 모양은 마치 거북의 머리처럼 생겼는데 산 위에 한 개의 대나무가 있어 낮에는 둘이었다가 밤에는 합해서 하나가 되었다. 사자(使者)가 와서 사실대로 아뢰었다. 왕은 감은사에서 묵는데 이튿날 점심 때 보니 대나무가 합쳐져서 하나가 되는데, 천지(天地)가 진동하고 비바람이 몰아치며 7일 동안이나 어두웠다. 그 달 16일에 가니 용 한 마리가 검은 옥대(玉帶)를 받들어 바친다. 왕은 용을 맞아 함께 앉아서 묻는다. “이 산이 대나무와 함께 혹은 갈라지고 혹은 합치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용이 대답한다. “비유해 말씀드리자면 한 손으로 치면 소리가 나지 않고 두 손으로 치면 소리가 나는 것과 같습니다. 이 대나무란 물건은 합쳐야 소리가 나는 것이오니, 성왕(聖王)께서는 소리로 천하를 다스리실 징조입니다. 왕께서는 이 대나무를 가지고 피리를 만들어 부시면 온 천하가 화평해질 것입니다. 이제 대왕의 아버님께서는 바닷속의 큰 용이 되셨고 유신은 다시 천신(天神)이 되어 두 성인이 마음을 같이 하여 이런 값으로 칠 수 없는 큰 보물을 보내시어 나로 하여금 바치게 한 것입니다.” 왕은 놀라고 기뻐하여 오색(五色) 비단과 금(金)과 옥(玉)을 주고는 사자(使者)를 시켜 대나무를 베어 가지고 바다에서 나왔는데 그때 산과 용은 갑자기 모양을 감추고 보이지 않았다. 왕이 감은사에서 묵고 17일에 지림사(祗林寺) 서쪽 시냇가에 이르러 수레를 멈추고 점심을 먹었다. 태자(太子) 이공(理恭; 즉 효소대왕孝昭大王)이 대궐을 지키고 있다가 이 소식을 듣고 말을 달려와서 하례하고는 천천히 살펴보고 아뢰었다. “이 옥대(玉帶)의 여러 쪽은 모두 진짜 용입니다.” 왕이 말한다. “네가 어찌 그것을 아느냐.” “이 쪽 하나를 떼어 물에 넣어 보십시오.” 이에 옥대의 왼편 둘째 쪽을 떼어서 시냇물에 넣으니 금시에 용이 되어 하늘로 올라가고 그 땅은 이내 못이 되었으니 그 못을 용연(龍淵)이라고 불렀다. 왕이 대궐로 돌아오자 그 대나무로 피리를 만들어 월성천존고(月城天尊庫)에 간직해 두었는데 이 피리를 불면 적병(敵兵)이 물러가고 병(病)이 나으며, 가뭄에는 비가 오고 장마지면 날이 개며, 바람이 멎고 물결이 가라앉는다. 이 피리를 만파식적(萬波息笛)이라 부르고 국보(國寶)로 삼았다. 효소왕(孝昭王) 때에 이르러 천수(天授) 4년 계사(癸巳; 693)에 부례랑(夫禮郞)이 살아서 돌아온 이상한 일로 해서 다시 이름을 고쳐 만만파파식적(萬萬波波息笛)이라 했다. 자세한 것은 그의 전기(傳記)에 실려 있다.
효소왕대(孝昭王代)의 죽지랑(竹旨郞; 죽만竹曼 또는 지관智官이라고도 한다)
제32대 효소왕(孝昭王) 때에 죽만랑(竹曼郞)의 무리 가운데 득오(得烏; 혹은 득곡得谷) 급간(級干)이 있어서 풍류황권(風流黃卷)에 이름을 올려 놓고 날마다 나오고 있었는데, 한 번은 10일이 넘도록 보이지 않았다. 죽만랑은 그의 어머니를 불러 그대의 아들이 어디 있는가를 물으니 어머니는 말한다. “당전(幢典) 모량부(牟梁部)의 익선아간(益宣阿干)이 내 아들을 부산성(富山城) 창직(倉直)으로 보냈으므로 빨리 가느라고 미처 그대에게 인사도 하지 못했습니다.” 죽만랑이 말한다. “그대의 아들이 만일 사사로운 일로 간 것이라면 찾아볼 필요가 없겠지만 이제 공사(工事)로 갔다니 마땅히 가서 대접해야겠소.” 이에 떡 한 그릇과 술 한 병을 가지고 좌인(左人; 우리말에 개질지皆叱知라는 것이니 이는 노복奴僕을 말한다)을 거느리고 찾아가니 낭(郎)의 무리 137명도 위의(威儀)를 갖추고 따라갔다. 부산성에 이르러 문지기에게, 득오실(得烏失)이 어디 있는가고 물으니 문지기는 대답한다. “지금 익선(益宣)의 밭에서 예(例)에 따라 부역(賦役)을 하고 있습니다.” 낭은 밭으로 찾아가서 가지고 간 술과 떡을 대접했다. 익선에게 휴가를 청하여 함께 돌아오려 했으나 익선은 굳이 반대하고 허락하지 않는다. 이때 사리(使吏) 간진(侃珍)이 추화군(推火郡) 능절(能節)의 조(租) 30석(石)을 거두어 싣고, 성안으로 가고 있었다. 죽만랑이 선비를 소중히 여기는 풍미(風味)를 아름답게 여기고, 익선의 고집불통을 비루하게 여겨 가지고 가던 30석을 익선에게 주면서 휴가를 주도록 함께 청했으나 그래도 허락하지 않는다. 이번엔 진절(珍節) 사지(舍知)의 말안장을 주니 그제야 허락했다. 조정의 화주(花主)가 이 말을 듣고 사자(使者)를 보내서 익선을 잡아다가 그 더럽고 추한 것을 씻어 주려 하니, 익선은 도망하여 숨어 버렸다. 이에 그의 맏아들을 잡아갔다. 때는 중동(仲冬) 몹시 추운 날인데 성안에 있는 못[池]에서 목욕을 시키자 얼어붙어 죽었다.
효소왕(孝昭王)이 그 말을 듣고 명령하여 모량리(牟梁里) 사람으로 벼슬에 오른 자는 모조리 쫓아내어 다시는 관청에 붙이지 못하게 하고, 승의(僧衣)를 입지 못하게 하고, 만일 중이 된 자라도 종을 치고 북을 울리는 절에는 들어가지 못하게 했다. 칙사(勅使)가 간진(侃珍)의 자손을 올려서 칭정호손(秤定戶孫)을 삼아 남달리 표창했다. 이때 원측법사(圓測法師)는 해동(海東)의 고승(高僧)이었지만 모량리(牟梁里) 사람인 때문에 승직(僧職)을 주지 않았다.
처음에 술종공(述宗公)이 삭주도독사(朔州都督使)가 되어 임지(任地)로 가는데, 마침 삼한(三韓)에 병란(兵亂)이 있어 기병(騎兵) 3,000명으로 그를 호송하게 했다. 일행이 죽지령(竹旨嶺)에 이르니 한 거사(居士)가 그 고갯길을 닦고 있었다. 공(公)이 이것을 보고 탄복하여 칭찬하니 거사도 공의 위세가 놀라운 것을 보고 좋게 여겨 서로 마음 속에 감동한 바가 있었다. 공이 고을의 임소(任所)에 부임한 지 한 달이 지나서 꿈에 거사가 방으로 들어오는 것을 보았는데 공의 아내도 같은 꿈을 꾸었다. 더욱 놀라고 괴상히 여겨 이튿날 사람을 시켜 거사의 안부를 물으니 그곳 사람들이 “거사는 죽은 지 며칠 되었습니다” 한다. 사자(使者)가 돌아와 고하는데 그가 죽은 것은 꿈을 꾸던 것과 같은 날이었다. 이에 공이 말한다. “필경 거사는 우리 집에 태어날 것이다.” 공은 다시 군사를 보내어 고개 위 북쪽 봉우리에 장사지내고, 돌로 미륵(彌勒)을 하나 만들어 무덤 앞에 세워 놓았다. 공의 아내는 그 꿈을 꾸던 날로부터 태기가 있어 아이를 낳으니 이름을 죽지(竹旨)라고 했다. 이 죽지랑(竹旨郞)이 커서 벼슬을 하게 되어 유신공(庾信公)과 함께 부수(副師)가 되어 삼한을 통일했다. 진덕(眞德)·태종(太宗)·문무(文武)·신문(神文)의 4대에 걸쳐 재상으로서 이 나라를 안정시켰다.
처음에 득오곡(得烏谷)이 죽만랑(竹曼郞)을 사모하여 노래를 지으니 이러하다.
간 봄 그리워하니, 모든 것이 시름이로세.
아담하신 얼굴, 주름살 지시려 하네.
눈 돌릴 사이에나마, 만나뵙도록 기회 지으리라.
낭(郎)이여! 그리운 마음에, 가고 오는 길.
쑥 우거진 마을에 잘 밤 있으리.
성덕왕(聖德王)
제33대 성덕왕(聖德王) 신룡(神龍) 2년 병오(丙午; 706)에 흉년이 들어 백성들이 몹시 굶주렸다. 그 이듬해인 정미년(丁未年; 707) 정월 초하루부터 7월 30일에 이르기까지 백성을 구제하기 위하여 곡식을 나누어 주는데, 한 식구에 하루 서 되(三升)씩으로 정했다. 일을 마치고 계산해 보니 도합 30만 500석이었다.
왕이 태종대왕(太宗大王)을 위해서 봉덕사(奉德寺)를 세우고 7일간 인왕도량(仁王道場)을 열고 대사령(大赦令)을 내렸다. 이때 비로소 시중(侍中)이라는 직책을 두었다(다른 책에는 효성왕孝成王 때의 일이라고 했다).
수로부인(水路夫人)
성덕왕(聖德王) 때 순정공(純貞公)이 강릉태수(江陵太守; 지금의 명주溟州)로 부임하는 도중에 바닷가에서 점심을 먹었다. 곁에는 돌 봉우리가 병풍과 같이 바다를 두르고 있어 그 높이가 천 길이나 되는데, 그 위에 철쭉꽃이 만발하여 있다. 공의 부인 수로(水路)가 이것을 보더니 좌우 사람들에게 말했다. “꽃을 꺾어다가 내게 줄 사람은 없는가.” 그러나 종자(從者)들은, “거기에는 사람이 갈 수 없는 곳입니다”하고 아무도 나서지 못한다. 이때 암소를 끌고 길을 지나가던 늙은이 하나가 있었는데 부인의 말을 듣고는 그 꽃을 꺾어 가사(歌詞)까지 지어서 바쳤다. 그러나 그 늙은이가 어떤 사람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 뒤 편안하게 이틀을 가다가 또 임해정(臨海亭)에서 점심을 먹는데 갑자기 바다에서 용이 나타나더니 부인을 끌고 바닷 속으로 들어갔다. 공이 땅에 넘어지면서 발을 굴렀으나 어찌 할 수가 없었다. 또 한 노인이 나타나더니 말한다. “옛 사람의 말에, 여러 사람의 말은 쇠도 녹인다 했으니 이제 바닷 속의 용인들 어찌 여러 사람의 입을 두려워하지 않겠습니까. 마땅히 경내(境內)의 백성들을 모아 노래를 지어 부르면서 지팡이로 강언덕을 치면 부인을 만나 볼 수가 있을 것입니다.” 공이 그대로 하였더니 용이 부인을 모시고 나와 도로 바쳤다. 공이 바닷속에 들어갔던 일을 부인에게 물으니 부인이 말한다. “칠보궁전(七寶宮殿)에 음식은 맛있고 향기롭게 깨끗한 것이 인간의 연화(煙火)가 아니었습니다.” 부인의 옷에서 나는 이상한 향기는 이 세상의 것이 아니었다.
수로부인은 아름다운 용모가 세상에 뛰어나 깊은 산이나 큰 못을 지날 때마다 여러 차례 신물(神物)에게 붙들려 갔다.
이때 여러 사람이 부르던 해가(海歌)의 가사는 이러했다.
거북아, 거북아, 수로부인을 내놓아라, 남의 부인 앗아간 죄 그 얼마나 크랴.
네 만일 거역하고 내놓지 않는다면, 그물로 잡아서 구워 먹으리
노인의 헌화가(獻花歌)는 이러했다.
자줏빛 바위 가에 잡은 암소 놓게 하시고,
나를 부끄러워하지 않으신다면,
저 꽃 꺾어 바치오리다.
효성왕(孝成王)
개원(開元) 10년 임술(壬戌; 722) 10월에 처음으로 모화군(毛火郡)에 관문(關門)을 쌓았는데 지금의 모화촌(毛火村)으로서 경주(慶州) 동남쪽 경계에 속한다. 이것은 곧 일본을 막는 요새(要塞)가 되기도 했다. 둘레는 6,792보(步) 5척(尺), 여기에 쓰인 인부(人夫)는 3만 9,262명이고 역사를 감독한 사람은 원진각간(元眞角干)이었다.
개원(開元) 21년 계유(癸酉; 733)에 당(唐)나라 사람들이 북적(北狄)을 치려 하여 신라에 군대를 청해 왔다. 이때 사신 604명이 신라에 왔다가 돌아갔다.
경덕왕(景德王)·충담사(忠談師)·표훈대덕(表訓大德)
당(唐)나라에서 덕경(德經) 등을 보내 오자 대왕(大王)이 예를 갖추어 이를 받았다. 왕이 나라를 다스린 지 24년에 오악(五岳)과 삼산신(三山神)들이 때때로 나타나서 대궐 뜰에서 왕을 모셨다. 3월 3일 왕이 귀정문(歸正門) 누각 위에 나가서 좌우 신하들에게 일렀다. “누가 길거리에서 위의(威儀) 있는 중 한 사람을 데려올 수 있겠느냐.” 이때 마침 위의 있고 깨끗한 고승(高僧) 한 사람이 길에서 이리저리 배회하고 있었다. 좌우 신하들이 이 중을 왕에게로 데리고 오니, 왕이 “내가 말하는 위의 있는 중이 아니다”하고 그를 돌려보냈다. 다시 중 한 사람이 있는데 납의(衲衣)를 입고 앵통(櫻筒)을 지고 남쪽에서 오고 있었는데 왕이 보고 기뻐하여 누각 위로 영접했다. 통 속을 보니 다구(茶具)가 들어 있었다. 왕은 물었다. “그대는 대체 누구요?” “소승(小僧)은 충담(忠談)이라고 합니다.” “어디서 오는 길이오?” “소승은 3월 3일과 9월 9일에는 차를 달여서 남산(南山) 삼화령(三花嶺)의 미륵세존(彌勒世尊)께 드리는데, 지금도 드리고 돌아오는 길입니다.” “나에게도 그 차를 한 잔 나누어 주겠는가요.” 중이 이내 차를 달여 드리니 차맛이 이상하고 찻잔 속에서 이상한 향기가 풍긴다. 왕이 다시 물었다.
“내가 일찍이 들으니 스님이 기파랑(耆婆郞)을 찬미(讚美)한 사뇌가(詞腦歌)가 그 뜻이 무척 고상(高尙)하다고 하니 그 말이 과연 옳은가요.”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나를 위하여 안민가(安民歌)를 지어 주시오.” 충담은 이내 왕의 명을 받들어 노래를 지어 바치니 왕은 아름답게 여기고 그를 왕사(王師)로 봉했으나 충담은 두 번 절하고 굳이 사양하여 받지 않았다. 안민가는 이러하다.
임금은 아버지요, 신하는 사랑스런 어머니시라.
백성을 어리석은 아이라 여기시니,
백성이 그 은혜를 알리.
꾸물거리면서 사는 물생(物生)들에게, 이를 먹여 다스리네.
이 땅을 버리고 어디로 가랴, 나라 안이 유지됨을 알리.
後句
임금답게 신하답게 백성답게 하면,
나라는 태평하리이다.
기파랑(耆婆郞)을 찬미한 노래
헤치고 나타난 달이, 흰 구름 쫓아 떠가는 것 아닌가.
새파란 시내에, 기파랑의 모습 잠겼어라.
일오천(逸烏川) 조약돌에서, 낭(郎)이 지니신 마음 좇으려 하네.
아아! 잣나무 가지 드높아,
서리 모를 그 씩씩한 모습이여!
경덕왕(景德王)은 옥경(玉莖)의 길이가 여덟 치나 되었다. 아들이 없어 왕비(王妃)를 폐하고 사량부인(沙梁夫人)에 봉했다. 후비(後妃) 만월부인(滿月夫人)의 시호(諡號)는 경수태후(景垂太后)이니 의충(依忠) 각간(角干)의 딸이었다. 어느날 왕은 표훈대덕(表訓大德)에게 명했다. “내가 복이 없어서 아들을 두지 못했으니 바라건대 대덕은 상제(上帝)께 청하여 아들을 두게 해 주오.” 표훈은 명령을 받아 천제(天帝)에게 올라가 고하고 돌아와 왕께 아뢰었다. “상제께서 말씀하시기를, 딸을 구한다면 될 수 있지만 아들은 될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왕은 다시 말한다. “원컨대 딸을 바꾸어 아들로 만들어 주시오.” 표훈은 다시 하늘로 올라가 천제께 청하자 천제는 말한다. “될 수는 있지만 그러나 아들이면 나라가 위태로울 것이다.” 표훈이 내려오려고 하자 천제는 또 불러 말한다. “하늘과 사람 사이를 어지럽게 할 수는 없는 일인데 지금 대사(大師)는 마치 이웃 마을을 왕래하듯이 하여 천기(天機)를 누설했으니 이제부터는 아예 다니지 말도록 하라.” 표훈은 돌아와서 천제의 말대로 왕께 알아듣도록 말했건만 왕은 다시 말한다. “나라는 비록 위태롭더라도 아들을 얻어서 대를 잇게 하면 만족하겠소.” 이리하여 만월왕후(滿月王后)가 태자를 낳으니 왕은 무척 기뻐했다. 8세 때에 왕이 죽어서 태자가 왕위에 오르니 이가 혜공대왕(惠恭大王)이다. 나이가 매우 어린 때문에 태후(太后)가 임조(臨朝)하였는데 정사가 다스려지지 못하고 도둑이 벌떼처럼 일어나 이루 막을 수가 없다. 표훈 대사의 말이 맞은 것이다.
왕은 이미 여자로서 남자가 되었기 때문에 돌날부터 왕위에 오르는 날까지 항상 여자의 놀이를 하고 자랐다. 비단 주머니 차기를 좋아하고 도류(道流)와 어울려 희롱하고 노니 나라가 크게 어지러워지고 마침내 선덕왕(宣德王)과 김양상(金良相)에게 죽음을 당했다.
표훈 이후에는 신라에 성인이 나지 않았다.
혜공왕(惠恭王)
대력(大曆) 초년에 강주(康州) 관청의 대당(大堂) 동쪽에서 땅이 점점 꺼져서 못이 되었는데(다른 책에는 대사大寺 동쪽의 조그만 못이라 했다) 세로가 13척, 가로가 7척이었다. 갑자기 잉어 5, 6마리가 나타나더니 계속해서 점점 커지고 여기에 따라 못도 커졌다.
2년 정미(丁未; 667)에는 또 천구성(天狗星)이 동루(東樓) 남쪽에 떨어졌는데 머리는 항아리만하고 꼬리는 3척 가량이나 되며, 빛은 활활 타오르는 불과 같고, 이 때문에 하늘과 땅도 또한 진동했다.
또 이 해에 금포현(今浦縣)의 오경(頃) 가량의 논 속에서 쌀이 모두 이삭으로 매달렸다. 7울에는 북궁(北宮) 뜰 안에 먼저 두 별이 떨어지고 또 한 별이 떨어지니 세 별이 모두 땅 속으로 들어갔다.
이보다 먼저 대궐 북쪽 뒷간 속에서 두 줄기 연(蓮)이 나고 또 봉성사(奉聖寺) 밭 속에서도 연이 생겨났으며 범이 궁성 안으로 들어온 것을 쫓아가 잡으려다가 놓쳤으며, 각간(角干) 대공(大恭)의 집 배나무 위에 참새가 무수히 모여들었다. <안국병법(安國兵法)> 하권(下卷)에 의하면, 이런 일이 있으면 천하가 크게 어지러워진다는 것이다. 이에 임금은 대사령(大赦令)을 내리고 몸을 닦고, 반성했다.
7월 3일에 각간 대공이 반란을 일으켜 서울과 오도(五道)의 주군(州郡) 도합 96명의 각간(角干)들이 서로 싸워 크게 어지러웠다. 각간 대공의 집이 망하자 그 집의 재산과 보물과 비단 등을 모두 왕궁(王宮)으로 옮겼는데, 신성(新城)의 장창(長倉)이 불에 타자 사량(沙梁)·모량(牟梁) 등 마을에 있던 역적들의 보물과 곡식을 또한 왕궁으로 운반해 들였다. 난리가 3개월만에 멎으니 상(賞)을 받은 사람도 제법 많았으나 죽음을 당한 자도 수없이 많았으니, 표훈이 “나라가 위태롭다”고 한 말이 바로 이것이다.
원성대왕(元聖大王)
이찬(伊飡) 김주원(金周元)이 맨처음에 상재(上宰)가 되고 왕은 각간(角干)으로서 상재의 다음 자리에 있었는데, 꿈이 복두(幞頭)를 벗고 흰 갓을 쓰고 열두 줄 가야금을 들고 천궁사(天官寺) 우물 속으로 들어갔다. 꿈에서 깨어 사람을 시켜 점을 치게 했더니 “복두(幞頭)를 벗은 것은 관직을 잃을 징조요, 가야금을 든 것은 칼을 쓸 징조요, 우물 속으로 들어간 것은 옥에 갇힐 징조입니다”했다. 왕은 이 말을 듣고 몹시 근심하여 두문불출(杜門不出)했다. 이때 아찬(阿飡) 여삼(餘三; 어떤 책에는 여산餘山이라 함)이 와서 뵙기를 청했으나 왕은 병을 핑계하고 나오지 않았다. 아찬이 다시 청하여 한 번 뵙기를 원하므로 왕이 이를 허락하니 아찬이 물었다. “공께서 꺼리는 것은 무엇입니까?” 왕이 꿈을 점쳤던 일을 자세히 말하니 아찬이 일어나서 절하고 말한다. “이는 좋은 꿈입니다. 공이 만일 왕위에 올라서도 나를 버리지 않으신다면 공을 위해서 꿈을 풀어 보겠습니다.” 왕이 이에 좌우 사람들을 물리고 아찬에게 해몽(解夢)하기를 청하니 아찬은 말한다. “복두를 벗은 것은 위에 앉는 이가 없다는 것이요, 흰 갓을 쓴 것은 면류관을 쓸 징조요, 열두 줄 가야금을 든 것은 12대손(代孫)이 왕위를 이어받을 징조요, 천관사 우물에 들어간 것은 궁궐에 들어갈 상서로운 징조입니다.” 왕이 말한다. “위에 주원(周元)이 있는데 내가 어떻게 상위(上位)에 있을 수가 있단 말이오?” 아찬이 “비밀히 북천신(北川神)에게 제사지내면 좋을 것입니다”하니 이에 따랐다.
얼마 안 되어 선덕왕(宣德王)이 세상을 떠나자 나라 사람들은 김주원(金周元)을 왕으로 삼아 장차 궁으로 맞아들이려 했다. 그의 집이 북천(北川) 북쪽에 있었는데 갑자기 냇물이 불어서 건널 수가 없었다. 이에 왕이 먼저 궁에 들어가 왕위에 오르자 대신(大臣)들이 모두 와서 따라 새 임금에게 축하를 드리니 이가 원성대왕(元聖大王)이다.
왕의 이름은 경신(敬信)이요 성(姓)은 김씨(金氏)이니 대개 길몽(吉夢)이 맞은 것이었다. 주원은 명주(溟洲)에 물러가 살았다. 경신이 왕위에 올랐으나 이 때 여산(餘山)은 이미 죽었기 때문에 그의 자손들을 불러 벼슬을 주었다. 왕에게는 손자가 다섯 있었으니, 혜충태자(惠忠太子)·헌평태자(憲平太子)·예영잡간(禮英匝干)·대룡부인(大龍夫人)·소룡부인(小龍夫人) 등이다.
대왕(大王)은 실로 인생의 곤궁하고 영화로운 이치를 알았으므로 신공사뇌가(身空詞腦歌; 노래는 없어져서 자세치 못하다)를 지을 수가 있었다. 왕의 아버지 대각간(大角干) 효양(孝讓)이 조종(祖宗)의 만파식적(萬波息笛)을 왕에게 전했다. 왕은 이것을 얻게 되었으므로 하늘의 은혜를 두텁게 입고 그 덕이 멀리까지 빛났던 것이다.
정원(貞元) 2년 병인(丙寅; 786) 10월 11일에 일본왕 문경(文慶; <일본제기日本帝紀>를 보면 제55대 왕 문덕文德이라고 했는데 아마 이인 듯하다. 그 밖에 문경文慶은 없다. 어떤 책에는 이 왕王의 태자太子라고 했다)이 군사를 일으켜 신라를 치려다가 신라에 만파식적이 있다는 말을 듣고 군사를 물리고 금(金) 50냥을 사자(使者)에게 주어 보내서 피리를 달라고 청하므로 왕이 사자에게 일렀다. “나는 들으니 상대(上代) 진평왕(眞平王) 때에 그 피리가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어디에 있는지 알 수가 없다.” 이듬해 7월 7일에 다시 사자를 보내어 금 1,000냥을 가지고 와서 청하며 말하기를 “내가 그 신비로운 물건을 보기만 하고 그대로 돌려보내겠습니다”하였다. 왕은 먼저와 같은 대답으로 이를 거절했다. 그리고 은(銀) 3,000냥을 그 사자에게 주고, 보내 온 금은 돌려주고 받지 않았다. 8월에 사자가 돌아가자 그 피리를 내황전(內黃殿)에 간수해 두었다.
왕이 즉위한 지 11년 을해(乙亥; 795)에 당(唐)나라 사자가 서울에 와서 한 달을 머물러 있다가 돌아갔는데, 하루 뒤에 두 여자가 내정(內廷)에 나와서 아뢴다. “저희들은 동지(東池)·청지(靑池; 청지靑池는 곧 동천사東泉寺의 샘이다. 절에 있는 기록을 보면 이 샘은 동해東海의 용龍이 왕래하면서 불법佛法을 듣던 곳이요 절은 진평왕眞平王이 지은 것으로서 오백五百 성중聖衆과 오층탑五層塔과 전민田民까지 함께 헌납했다고 했다)에 있는 두 용(龍)의 아내입니다. 그런데 당나라 사자가 하서국(河西國) 사람들을 데리고 와서 우리 남편인 두 용(龍)과 분황사(芬皇寺) 우물에 있는 용까지 모두 세 용의 모습을 바꾸어 작은 고기로 변하게 해서 통 속에 넣어 가지고 돌아갔습니다. 바라옵건대 폐하께서는 그 두 사람에게 명령하여 우리 남편들인 나라를 지키는 용을 여기에 머무르게 해 주십시오.” 왕은 하양관(河陽館)까지 쫓아가서 친히 연회를 열고 하서국 사람들에게 명령했다. “너희들은 어찌해서 우리 나라의 세 용을 잡아 여기까지 왔느냐. 만일 사실대로 고하지 않으면 반드시 사형(死刑)에 처할 것이다.” 그제야 하서국 사람들이 고기 세 마리를 내어 바치므로 세 곳에 놓아 주자, 각각 물 속에서 한 길이나 뛰고 기뻐하면서 가 버렸다. 이에 당나라 사람들은 왕의 명철(明哲)함에 감복했다.
어느날 왕이 황룡사(皇龍寺; 어떤 책에는 화엄사華嚴寺라 했고, 또 금강사金剛寺라고도 했으니 이것은 아마 절 이름과 불경佛經 이름을 혼동한 것인 듯싶다)의 중 지해(智海)를 대궐 안으로 청하여 화엄경(華嚴經)을 50일 동안 외게 했다. 사미(沙彌) 묘정(妙正)이 매양 김광정(金光井; 대현법사大賢法師가 이 이름을 지었다) 가에서 바리때를 씻는데 자라 한 마리가 우물 속에서 떴다가는 다시 가라앉곤 하므로 사미는 늘 먹다 남은 밥을 자라에게 주면서 희롱했다. 법석(法席)이 끝나려 할 무렵 사미 묘정은 자라에게 말했다. “내가 너에게 은덕을 베푼 지가 오랜데 너는 무엇으로 갚으려느냐?” 그런 지 며칠 후에 자라는 조그만 구슬 한 개를 입에서 토하더니 묘정에게 주려는 것같이 하므로 묘정은 그 구슬을 얻어 허리띠 끝에 달았다. 그 후로부터 대왕(大王)은 묘정을 보면 사랑하고 소중히 여겨 내전(內殿)에 맞아들여 좌우에서 떠나지 못하게 했다. 이 때 잡간(匝干) 한 사람이 당나라에 사신으로 가게 되었는데, 그도 묘정을 사랑해서 같이 가기를 청하자 왕은 이를 허락했다. 이들이 함께 당나라에 들어가니 당나라의 황제(皇帝)도 역시 묘정을 보자 매우 사랑하게 되고 승상(丞相)과 좌우 신하들도 모두 그를 존경하고 신뢰했다. 관상보는 사람 하나가 황제에게 아뢰었다. “사미를 살펴보니 하나도 길(吉)한 상(相)이 없는데 남에게 신뢰와 존경을 받으니 틀림없이 이상한 물건을 가졌을 것입니다.” 황제가 사람을 시켜서 몸을 뒤져 보니 허리띠 끝에 조그만 구슬이 매달려 있다. 황제는 말한다. “나에게 여의주(如意珠) 네 개가 있던 것을 지난 해에 한 개를 잃었는데 이제 이 구슬을 보니 내가 잃은 그 구슬이다.” 황제가 묘정에게 그 구슬을 가진 연유를 물으니 묘정은 그 사실을 자세히 말했다. 황제가 생각하니 구슬을 잃었던 날짜가 묘정이 구슬을 얻은 날과 똑같다. 황제가 그 구슬을 빼앗아 두고 묘정을 돌려보냈더니 그 뒤로는 아무도 묘정을 사랑하지도 않고 신뢰하지도 않았다.
왕의 능(陵)은 토함산(吐含山) 서쪽 동곡사(洞鵠寺; 지금의 崇德寺)에 있는데 최치원(崔致遠)이 지은 비문이 있다. 왕은 또 보은사(報恩寺)와 망덕루(望德樓)를 세웠고, 조부(祖父) 훈입잡간(訓入匝干)을 추봉(追封)하여 흥평대왕(興平大王)이라 하고, 증조(曾祖) 의관잡간(議官匝干)을 신영대왕(神英大王)이라 하고, 고조(高祖) 법선대아간(法宣大阿干)을 현성대왕(玄聖大王)이라 했다. 현성대왕의 아버지는 곧 마질차잡간(摩叱次匝干)이다.
조설(早雪)
제40대 애장왕(哀莊王) 말년 무자(戊子; 808) 8월 15일에 눈이 내렸다.
제41대 헌덕왕(憲德王) 때인 원화(元和) 13년 무술(戊戌; 818) 3월 14일에 많은 눈이 내렸다(어떤 책에는 병인丙寅이라 했으나 이는 잘못이다. 원화元和는 15년에 끝났기 때문에 병인丙寅은 없다).
제46대 문성왕(文聖王) 기미(己未; 839) 5월 19일에 많은 눈이 내렸다. 8월 1일에는 천지가 어두웠다.
흥덕왕(興德王)과 앵무새
제42대 흥덕대왕(興德大王)은 보력(寶曆) 2년 병오(丙午; 826)에 즉위했다. 얼마 되지 않아서 어떤 사람이 당(唐)나라에 사신(使臣)으로 갔다가 앵무새 한 쌍을 가지고 왔다. 오래지 않아 암놈이 죽자 홀로 남은 수놈은 슬피 울기를 그치지 않는다. 왕은 사람을 시켜 그 앞에 거울을 걸어 놓게 했더니 새는 거울 속의 그림자를 보고는 제 짝을 얻은 줄 알고 그 거울을 쪼다가 제 그림자인 것을 알고는 슬피 울다 죽었다. 이에 왕이 앵무새를 두고 노래를 지었다고 하나 가사(歌辭)는 알 수 없다.
신무대왕(神武大王)과 염장(閻長)과 궁파(弓巴)
제45대 신무대왕(神武大王)이 왕위(王位)에 오르기 전에 협사(俠士) 궁파(弓巴)에게 말했다. “나에게는 이 세상을 같이 살아나갈 수 없는 원수가 있다. 네가 만일 나를 위해서 이를 없애 준다면 내가 왕위에 오른 뒤에 네 딸을 맞아 왕비로 삼겠다.” 궁파가 이를 허락하니 마음과 힘을 같이하여 군사를 일으켜 서울로 쳐들어가서 그 일을 성취하였다. 그 뒤에 이미 왕위를 빼앗고 궁파의 딸을 왕비로 삼으려 하매 여러 신하들이 힘써 간한다. “궁파는 아주 미천한 사람이오니 왕께서 그의 딸을 왕비로 삼으려는 것은 옳지 못합니다.” 왕은 그 말을 따랐다. 그 때 궁파는 청해진(淸海鎭)에서 진(鎭)을 지키고 있었는데 왕이 약속을 어기는 것을 원망하여 반란을 일으키려 하자 장군 염장(閻長)이 이 말을 듣고 왕께 아뢰었다. “궁파가 장차 충성스럽지 못한 일을 하려 하오니 소신이 가서 이를 제거하겠습니다.” 왕은 기뻐하여 이를 허락했다. 염장은 왕의 뜻을 받아 청해진으로 가서 길을 안내하는 자를 통해서 말했다. “나는 왕에게 조그만 원망이 있어서 그대에게 의탁하여 몸과 목숨을 보전하려 하오.” 궁파는 이 말을 듣고 크게 노했다. “너희들이 왕에게 간(諫)해서 내 딸을 폐(廢)하고 어찌 나를 보려 하느냐?” 염장이 다시 사람을 통해서 말했다. “그것은 여러 신하들이 간한 것이고 나는 그 일에 간여하지 않았으니 그대는 나를 혐의치 마십시오.” 궁파는 이 말을 듣고 청사(廳舍)로 그를 불러들여 물었다. “그대는 무슨 일로 여기에 왔는가?” “왕의 뜻을 거슬린 일이 있기에 그대의 막하(幕下)에 의탁해서 해(害)를 면할까 하는 것이오.” “그렇다면 다행한 일이오.”하고 궁파는 술자리를 마련하여 무척 기뻐했다. 이에 염장은 궁파의 긴 칼을 빼어 궁파를 베어 죽이자 휘하(麾下)에 있던 군사들은 놀라서 모두 땅에 엎드린다. 이에 염장은 이들을 이끌고 서울로 와서 왕에게 복명(復命)했다. “이미 궁파를 베어 죽였습니다.” 왕은 기뻐해서 그에게 상을 내리고 아간(阿干) 벼슬을 주었다.
제48대 경문대왕(景文大王)
왕의 이름은 응렴(膺廉)이니 나이 18세에 국선(國仙)이 되었다. 약관(弱冠)에 이르자 헌안대왕(憲安大王)은 그를 불러 궁중에서 잔치를 베풀과 물었다. “낭(郎)은 국선이 되어 사방을 돌아다니면서 놀았으니 무슨 이상한 일을 본 것이 있는가.” “신(臣)은 아름다운 행실이 있는 자 셋을 보았습니다.” “그 말을 나에게 들려 주게.” “남의 웃자리에 있을 만한 사람이면서도 겸손하여 남의 밑에 있는 사람이 그 하나요, 세력 있고 부자이면서도 옷차림을 검소하게 한 사람이 그 둘이요, 본래부터 귀(貴)하고 세력이 있으면서도 그 위력을 부리지 않는 사람이 그 셋입니다.” 왕은 그 말을 듣고 낭이 어질다는 것을 알고 자기도 모르게 눈물을 떨어뜨리면서 말했다. “나에게 두 딸이 있는데 낭의 시중을 들게 하리라.” 낭이 자리를 피하여 절하고 머리를 조아려 물러가 부모에게 고했다. 부모는 놀라고 기뻐하여 그 자제(子弟)들을 모아 놓고 의논하기를, “왕의 맏공주(公主)는 모양이 몹시 초라하고 둘째 공주는 매우 아름답다 하니 그를 아내로 삼으면 다행이겠다”하였다. 낭의 무리들 중에 우두머리로 있는 범교사(範敎師)가 이 말을 듣고 낭의 집에 가서 낭에게 물었다. “대왕께서 공주를 공의 아내로 주고자 한다니 사실인가?” “그렇습니다.” “어느 공주에게 장가들려는가?” “부모께서 둘째 공주가 좋겠다고 하십니다.” 범교사는 말한다.
“낭이 만일 둘째 공주에게 장가를 든다면 나는 반드시 낭의 면전에서 죽을 것이고, 맏공주에게 장가간다면 반드시 세 가지 좋은 일이 있을 것이니 경계해서 하도록 하라.” “그 말씀대로 하겠습니다.” 그 뒤에 왕이 날을 가려서 낭에게 사자를 보내어 말했다. “두 딸 중에서 공의 뜻대로 결정하도록 하라.” 사자가 돌아와서 낭의 의사를 왕에게 보고했다. “맏공주를 받들겠다고 합니다.”
그런 지 3개월이 지나서 왕은 병이 위독했다. 여러 신하들을 불러 놓고 말한다. “내게는 사내자식이 없으니 죽은 뒤의 일은 마땅히 맏딸의 남편 응렴(膺廉)이 이어야 할 것이다.” 이튿날 왕이 죽으니 낭이 유언을 받들어 왕위에 올랐다. 이에 범교사는 왕에게 나아가 말했다. “제가 아뢴 세 가지 아름다운 일이 이제 모두 이루어졌습니다. 맏공주에게 장가를 드셨기 때문에 이제 왕위에 오른 것이 그 하나요, 예전에 흠모하시던 둘째 공주에게 이제 쉽게 장가드실 수 있게 되신 것이 그 둘이요, 맏공주에게 장가를 드셨기 때문에 왕과 부인이 매우 기뻐하신 것이 그 셋입니다.”
왕은 그 말을 듣고 고맙게 여겨서 대덕(大德)이란 벼슬을 주고 금(金) 130냥을 하사했다. 왕이 죽자 시호(諡號)를 경문(景文)이라고 했다.
일찍이 왕의 침전(寢殿)에는 날마다 저녁만 되면 수많은 뱀들이 모여들었다. 궁인(宮人)들이 놀라고 두려워하여 이를 쫓아내려 했지만 왕은 말했다. “내게 만일 뱀이 없으면 편하게 잘 수가 없으니 쫓지 말라.” 왕이 잘 때에는 언제나 뱀이 혀를 내밀어 온 가슴을 덮고 있었다.
왕위에 오르자 왕의 귀가 갑자기 길어져서 나귀의 귀처럼 되었는데 왕후와 궁인들은 모두 이를 알지 못했지만 오직 복두장(幞頭匠) 한 사람만은 이 일을 알고 있었으나 그는 평생 이 일을 남에게 말하지 않았다. 그 사람은 죽을 때에 도림사(道林寺) 대밭 속 아무도 없는 곳으로 들어가서 대를 보고 외쳤다. “우리 임금의 귀는 나귀 귀와 같다.” 그런 후로 바람이 불면 대밭에서 소리가 났다. ‘우리 임금의 귀는 나귀 귀와 같다.’ 왕은 이 소리가 듣기 싫어서 대를 베어 버리고 그 대신 산수유(山茱萸) 나무를 심었다. 그랬더니 바람이 불면 거기에서는 다만 ‘우리 임금의 귀는 길다’고 하는 소리가 났다(도림사道林寺는 예전에 서울로 들어가는 곳에 있는 숲 가에 있었다).
국선 요원랑(邀元郞)·예흔랑(譽昕郞)·계원(桂元)·숙종랑(叔宗郞) 등이 금란(金蘭)을 유람하는데 은근히 임금을 위해서 나라를 다스리려는 뜻이 있었다. 이에 노래 세 수(首)를 짓고, 다시 심필(心弼) 사지(舍知)를 시켜서 공책을 주어 대구화상(大矩和尙)에게 보내어 노래 세 수를 짓게 하니 첫째는 현금포곡(玄琴抱曲)이요, 둘째는 대도곡(大道曲)이요, 셋째는 문군곡(問群曲)이었다. 대궐에 들어가 왕께 아뢰니 왕은 기뻐하여 칭찬하고 상을 주었다. 노래는 알 수가 없다.
처용랑(處容郞)과 망해사(望海寺)
제49대 헌강대왕(憲康大王) 때에는 서울로부터 지방에 이르기까지 집과 담이 연하고 초가(草家)는 하나도 없었다. 음악과 노래가 길에 끊이지 않았고, 바람과 비는 사철 순조로웠다. 어느날 대왕(大王)이 개운포(開雲浦; 학성鶴城 서남쪽에 있으니 지금의 울주蔚州이다)에서 놀다가 돌아가려고 낮에 물 가에서 쉬고 있는데 갑자기 구름과 안개가 자욱해서 길을 잃었다. 왕이 괴상히 여겨 좌우 신하들에게 물으니 일관(日官)이 아뢴다. “이것은 동해(東海) 용(龍)의 조화이오니 마땅히 좋은 일을 해서 풀어야 할 것입니다.” 이에 왕은 일을 맡은 관원에게 명하여 용을 위하여 근처에 절을 짓게 했다. 왕의 명령이 내리자 구름과 안개가 걷혔으므로 그곳을 개운포라 했다.
동해의 용은 기뻐해서 아들 일곱을 거느리고 왕의 앞에 나타나 덕(德)을 찬양하여 춤을 추고 음악을 연주했다. 그 중의 한 아들이 왕을 따라 서울로 들어가서 왕의 정사를 도우니 그의 이름을 처용(處容)이라 했다. 왕은 아름다운 여자로 처용의 아내를 삼아 머물러 있도록 하고, 또 급간(級干)이라는 관직(官職)까지 주었다. 처용의 아내가 무척 아름다웠기 때문에 역신(疫神)이 흠모해서 사람으로 변하여 밤에 그 집에 가서 남몰래 동침했다. 처용이 밖에서 자기 집에 돌아와 두 사람이 누워 있는 것을 보자 이에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면서 물러나왔다. 그 노래는 이러하다.
동경(東京) 밝은 달에, 밤들어 노닐다가
들어와 자리를 보니, 다리 가랑이 넷일러라.
둘은 내해이고, 둘은 뉘해인고.
본디 내해지만, 빼앗겼으니 어찌할꼬.
그때 역신이 본래의 모양을 나타내어 처용의 앞에 꿇어앉아 말했다. “내가 공의 아내를 사모하여 이제 잘못을 저질렀으나 공은 노여워하지 않으니 감동하여 아름답게 여기는 바입니다. 맹세코 이제부터는 공의 모양을 그린 것만 보아도 그 문 안에 들어가지 않겠습니다.” 이 일로 인해서 나라 사람들은 처용의 형상을 문에 그려 붙여서 사귀(邪鬼)를 물리치고 경사스러운 일을 맞아들이게 되었다.
왕은 서울로 돌아오자 이내 영취산(靈鷲山) 동쪽 기슭의 경치 좋은 곳을 가려서 절을 세우고 이름을 망해사(望海寺)라 했다. 또는 이 절을 신방사(新房寺)라 했으니 이것은 용을 위해서 세운 것이다.
왕이 또 포석정(鮑石亭)에 갔을 때 남산(南山)의 신(神)이 왕 앞에 나타나 춤을 추었는데 좌우의 사람에겐 그 신이 보이지 않고 왕만이 혼자서 보았다. 사람이 나타나 앞에서 춤을 추니 왕 자신도 춤을 추면서 형상을 보였다. 신의 이름을 혹 상심(詳審)이라고도 했으므로 지금까지 나라 사람들은 이 춤을 전해서 어무상심(御舞詳審), 또는 어무산신(御舞山神)이라 한다. 혹은 말하기를, 신이 먼저 나와서 춤을 추자 그 모습을 살펴 공인(工人)에게 명해서 새기게 하여 후세 사람들에게 보이게 했기 때문에 상심(象審)이라고 했다 한다. 혹은 상염무(霜髥舞)라고도 하는데 이것은 그 형상에 따라서 이름지은 것이다.
왕이 또 금강령(金剛嶺)에 갔을 때 북악(北岳)의 신이 나타나 춤을 추었는데, 이를 옥도검(玉刀劍)이라 했다. 또 동례전(同禮殿)에서 잔치를 할 때에는 지신(地神)이 나와서 춤을 추었으므로 지백급간(地伯級干)이라 했다.
<어법집(語法集)>에 말하기를, “그때 산신(山神)이 춤을 추고 노래부르기를, ‘지리다도파(智理多都波)’라 했는데 ‘도파(都波)’라고 한 것은 대개 지혜로 나라를 다스리는 사람이 미리 사태를 알고 많이 도망하여 도읍이 장차 파괴된다는 뜻이다”했다. 즉 지신과 산신은 나라가 장차 멸망할 것을 알기 때문에 춤을 추어 이를 경계한 것이나 나라 사람들은 깨닫지 못하고 도리어 상서(祥瑞)가 나타났다 하여 술과 여색(女色)을 더욱 즐기다가 나라가 마침 내 망하고 말았다고 한다.
진성여대왕(眞聖女大王)과 거타지(居陁知)
제51대 진성여왕(眞聖女王)이 임금이 된 지 몇 해 만에 유모(乳母) 부호부인(鳧好夫人)과 그의 남편 위홍잡간(魏弘匝干) 등 3, 4명의 총신(寵臣)들이 권력을 마음대로 해서 정사를 어지럽히자 도둑들이 벌떼처럼 일어났다.
나라 사람들이 근심하여 이에 다라니(陁羅尼)의 은어(隱語)를 지어 써서 길 위에 던졌다. 왕과 권세를 잡은 신하들은 이것을 얻어 보고 말했다. “이 글은 왕거인(王居仁)이 아니고는 지을 사람이 있겠느냐.” 이리하여 거인을 옥에 가두자 거인은 시(詩)를 지어 하늘에 호소했다. 이에 하늘이 그 옥에 벼락을 쳐서 거인을 살아나게 했는데 그 시는 이러했다.
연단(燕丹)의 피어린 눈물 무지개가 해를 뚫었고,
추연(鄒衍)의 품은 슬픔 여름에도 서리 내리네.
지금 나의 불우함 그들과 같거니,
황천(皇天)은 어이해서 아무런 상서로움도 없는가.
또 다라니(陁羅尼)의 은어(隱語)는 이러했다.
나무망국 찰니나제 판니판니소판니 우우삼아간 부이사파가
南無亡國 刹尼那帝 判尼判尼蘇判尼 于于三阿干 鳧伊娑婆訶
해설하는 사람은 이렇게 말했다. “찰니나제(刹尼那帝)란 여왕(女王)을 가리킨 것이요, 판니판니소판니(判尼判尼蘇判尼)는 두 소판(蘇判)을 말한 것이다. 소판은 관작(官爵)의 이름이요, 우우삼아간(于于三阿干)은 3, 4명의 총신(寵臣)을 말한 것이요, 부이(鳧伊)는 부호(鳧好)를 말한 것이다.”
이 왕 때의 아찬(阿飡) 양패(良貝)는 왕의 막내아들이었다. 당(唐)나라에 사신으로 갈 때에 후백제(後百濟)의 해적(海賊)들이 진도(津島)에서 길을 막는다는 말을 듣고 활 쏘는 사람 50명을 뽑아 따르게 했다. 배가 곡도(鵠島; 우리말로는 골대도骨大島라 한다)에 이르니 풍랑이 크게 일어나 10여 일 동안 묵게 되었다. 양패공(良貝公)은 이것을 근심하여 사람을 시켜 점을 치게 하였더니, “섬에 신지(神池)가 있으니 거기에 제사를 지내면 좋겠습니다”했다. 이에 못 위에 제물을 차려 놓자 못물이 한 길이나 넘게 치솟는다. 그날 밤 꿈에 노인이 나타나서 양패공에게 말한다. “활 잘 쏘는 사람 하나를 이 섬 안에 남겨 두면 순풍(順風)을 얻을 것이오.” 양패공이 깨어 그 일을 좌우에게 물었다. “누구를 남겨 두는 것이 좋겠소.” 여러 사람이 말한다. “나무 조각 50개에 저희들의 이름을 각각 써서 물에 가라앉게 해서 제비를 뽑으시면 될 것입니다.” 공은 이 말을 좇았다.
이때 군사 중에 거타지(居陁知)의 이름이 물에 잠겼으므로 그 사람을 남겨 두니 문득 순풍이 불어서 배는 거침없이 잘 나갔다. 거타지는 조심스럽게 섬 위에 서 있는데 갑자기 노인 하나가 못 속에서 나오더니 말한다. “나는 서해약(西海若)이오. 중 하나가 해가 뜰 때면 늘 하늘로부터 내려와 다라니(陁羅尼)의 주문(呪文)을 외면서 이 못을 세 번 돌면 우리 부부와 자손들이 물 위에 뜨게 되오. 그러면 중은 내 자손들의 간(肝)을 빼어 먹는 것이오. 그래서 이제는 오직 우리 부부와 딸 하나만이 남아 있을 뿐인데 내일 아침에 그 중이 또 반드시 올 것이니 그대는 활로 쏘아 주시오.” 거타는 말했다.
“활 쏘는 일이라면 나의 장기(長技)이니 명령대로 하겠습니다.” 노인은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물 속으로 들어가고 거타는 숨어서 기다렸다. 이튿날 동쪽에서 해가 뜨자 과연 중이 오더니 전과 같이 주문을 외면서 늙은 용의 간을 빼먹으려 했다. 이때 거타가 활을 쏘아 맞히니 중은 이내 늙은 여우로 변하여 땅에 쓰러져 죽었다. 이에 노인이 나와 치사를 한다. “공의 은덕으로 내 성명(性命)을 보전하게 되었으니 내 딸을 아내로 삼기를 바라오.” 거타가 말한다. “따님을 나에게 주시고 나를 저버리지 않는다면 참으로 원하는 바입니다.” 노인은 그 딸을 한 가지의 꽃으로 변하게 해서 거타의 품 속에 넣어 주고, 두 용에게 명하여 거타를 모시고 사신(使臣)의 배를 따라 그 배를 호위하여 당나라에 들어가도록 했다. 당나라 사람은 신라의 배를 용 두 마리가 호위하고 있는 것을 보고 이 사실을 황제(皇帝)에게 말했다. 이에 황제는 말한다. “신라의 사신은 필경 비상한 사람일 게다.” 이에 잔치를 베풀어 여러 신하들의 윗자리에 앉히고 금과 비단을 후하게 주었다. 본국으로 돌아오자 거타는 꽃가지를 내어 여자로 변하게 하여 함께 살았다.
효공왕(孝恭王)
제52대 효공왕(孝恭王) 때인 광화(光化) 15년 임신(壬申; 912. 사실은 주朱(후後)양梁의 건화乾化 2년이다)에 봉성사(奉聖寺) 외문(外門) 동서쪽 21간(間)에 까치가 집을 지었다.
또 신덕왕(神德王) 즉위 4년 을해(乙亥; 915. 고본古本에는 천우天祐 12년이라고 했으나 마땅히 정명貞明 원년元年이라 해야 한다)에 영묘사(靈廟寺) 안 행랑(行廊)에 까치집이 34개나 되고, 까마귀 집이 40개나 되었다.
또 3월에는 서리가 두 번이나 내렸고 6월에는 참포(斬浦)의 물과 바닷물의 물결이 사흘 동안이나 서로 싸웠다.
경명왕(景明王)
제54대 경명왕(景明王) 때인 정명(貞明) 5년 무인(戊寅; 918)에 사천왕사(四天王寺) 벽화(壁畵) 속의 개가 울었다. 이 때문에 3일 동안 불경을 외어 이를 물리쳤으나 반일(半日)이 지나자 그 개가 또 울었다.
7년 경진(庚辰; 920) 2월에는 황룡사탑(皇龍寺塔) 그림자가 금모사지(今毛舍知)의 집 뜰 안에 한 달 동안이나 거꾸로 서서 비쳐 보였다.
또 10월에 사천왕사(四天王寺) 오방신(五方神)의 활줄이 모두 끊어졌으며, 벽화 속의 개가 뜰로 달려나왔다가 다시 벽의 그림 속으로 들어갔다.
경애왕(景哀王)
제55대 경애왕(景哀王)이 즉위한 동광(同光) 2년 갑신(甲申; 924) 2월 19일에 황룡사(皇龍寺)에서 백좌(百座)를 열어 불경(佛經)을 풀이했다. 겸해서 선승(禪僧) 300명에게 음식을 먹이고 대왕(大王)이 친히 향을 피워 불공(佛供)을 드렸다. 이것이 백좌(百座)를 설립한 선교(禪敎)의 시작이었다.
김부대왕(金傅大王)
재56대 김부대왕(金傅大王)의 시호는 경순(敬順)이다. 천성(天成) 2년 정해(丁亥; 927) 9월에 후백제(後百濟)의 견훤(甄萱)이 신라를 침범해서 고울부(高蔚府)에 이르니, 경애왕(景哀王)은 우리 고려(高麗) 태조(太祖)에게 구원을 청하였다. 태조는 장수에게 명령하여 강한 군사 1만 명을 거느리고 구하게 했으나 구원병(救援兵)이 미처 도착하기 전에 견훤은 그 해 11월에 신라 서울로 쳐들어갔다. 이때 왕은 비빈(妃嬪) 종척(宗戚)들과 포석정(鮑石亭)에서 잔치를 열고 즐겁게 놀고 있었기 때문에 적병이 오는 것도 알지 못하다가 창졸간에 어찌할 줄을 몰랐다. 왕과 비(妃)는 달아나 후궁(後宮)으로 들어가고 종척(宗戚) 및 공경대부(公卿大夫)와 사녀(士女)들은 사방으로 흩어져 달아나다가 적에게 사로잡혔으며, 귀천(貴賤)을 가릴 것 없이 모두 땅에 엎드려 노비(奴婢)가 되기를 빌었다. 견훤은 군사를 놓아 공사간(公私間)의 재물을 약탈하고 왕궁(王宮)에 들어가서 거처했다. 이에 좌우 사람을 시켜 왕을 찾게 하니 왕은 비첩(婢妾) 몇 사람과 후궁에 숨어 있었다. 이를 군중(軍中)으로 잡아다가 왕은 억지로 자결(自決)해 죽게 하고 왕비를 욕보였으며, 부하들을 놓아 왕의 빈첩(嬪妾)들을 모두 욕보였다. 왕의 족제(族弟)인 부(傅)를 세워 왕으로 삼으니 왕은 견훤이 세운 셈이 되었다. 왕위(王位)에 오르자 전왕(前王)의 시체를 서당(西堂)에 안치하고 여러 신하들과 함께 통곡했다. 이 때 우리 태조(太祖)는 사신(使臣)을 보내서 조상했다.
이듬해 무자(戊子; 928)년 봄 3월에 태조(太祖)는 50여 기병(騎兵)을 거느리고 신라 서울에 이르니 왕은 백관(百官)과 함께 교외에서 맞아 대궐로 들어갔다. 서로 대하여 정리와 예의를 다하고 임해전(臨海殿)에서 잔치를 열었다. 술이 얼근하자 왕은 말했다. “나는 하늘의 도움을 받지 못해서 화란(禍亂)을 불러일으켰고, 견훤으로 하여금 불의(不義)한 짓을 마음껏 행하게 해서 우리 나라를 망쳐 놓았습니다. 이 얼마나 원통한 일입니까.” 이내 눈물을 흘리면서 우니 좌우 사람들도 울지 않는 사람이 없었고 태조 역시 눈물을 흘렸다. 태조는 여기에서 수십일을 머무르다가 돌아갔는데 부하 군사들은 엄숙하고 정제해서 조금도 침범하지 않으니 서울의 사녀(士女)들이 서로 경하(慶賀)해 말했다. “전에 견훤이 왔을 때는 마치 늑대와 범을 만난 것 같더니 지금 왕공(王公)이 온 것은 부모를 만난 것 같다.”
8월에 태조는 사자를 보내서 왕에게 금삼(錦衫)과 안장 없는 말을 주고 또 여러 관료(官僚)와 장사(將士)들에게 차등을 두어 물건을 주었다.
청태(淸泰) 2년 을미(乙未; 935) 10월에 사방 땅이 모두 남의 나라 소유가 되고 나라는 약하고 형세가 외로우니 스스로 지탱할 수가 없었으므로 여러 신하들과 함께 국토(國土)를 들어 고려 태조(太祖)에게 항복할 것을 의논했다. 그러나 여러 신하들의 의논이 분분하여 끝나지 않는지라 왕태자(王太子)가 말했다. “나라의 존망(存亡)은 반드시 하늘의 명에 있는 것이니 마땅히 충신(忠臣)·의사(義士)들과 함께 민심(民心)을 수습해서 힘이 다한 뒤에야 그만둘 일이지 어찌 1,000년의 사직(社稷)을 경솔하게 남에게 내주겠습니까?” 왕은 말한다. “외롭고 위태롭기가 이와 같으니 형세는 보전될 수 없다. 이미 강해질 수도 없고 더 약해질 수도 없으니 죄없는 백성들로 하여금 간뇌도지(肝腦塗地)케 하는 것은 내가 차마 할 수 없는 일이다.” 이에 시랑(侍郞) 김봉휴(金封休)를 시켜서 국서(國書)를 가지고 태조에게 가서 항복하기를 청했다. 그러나 태자는 울면서 왕을 하직하고 바로 개골산(皆骨山)으로 들어가서 삼베 옷을 입고 풀을 먹다가 세상을 마쳤다. 그의 막내아들은 머리를 깎고 화엄종(華嚴宗)에 들어가 중이 되어 승명(僧名)을 범공(梵空)이라 했는데 그 뒤로 법수사(法水寺)와 해인사(海印寺)에 있었다 한다.
태조는 신라의 국서를 받자 태상(太相) 왕철(王鐵)을 보내서 맞게 했다. 왕은 여러 신하들을 거느리고 우리 태조에게로 돌아가니, 향거보마(香車寶馬)가 30여 리에 뻗치고 길은 사람으로 꽉 차고, 구경꾼들이 담과 같이 늘어섰다. 태조는 교외에 나가서 영접하여 위로하고 대궐 동쪽의 한 구역(지금의 정승원正承院)을 주고, 장녀(長女) 낙랑공주(樂浪公主)를 그의 아내로 삼았다. 왕이 자기 나라를 작별하고 남의 나라에 와서 살았다 해서 이를 난조(鸞鳥)에 비유하여 공주의 칭호를 신란공주(神鸞公主)라고 고쳤으며, 시호(諡號)를 효목(孝穆)이라 했다. 왕을 봉(封)해서 정승(正承)을 삼으니 자리는 태자(太子)의 위이며 녹봉(祿俸) 1,000석을 주었다. 시종(侍從)과 관원(官員)·장수들도 모두 채용해서 쓰도록 했으며, 신라를 고쳐 경주(慶州)라 하여 이를 경순왕(敬順王)의 식읍(食邑)으로 삼았다.
처음에 왕이 국토를 바치고 항복해 오자 태조는 무척 기뻐하여 후한 예로 그를 대접하고, 사람을 시켜 말했다. “이제 왕이 내게 나라를 주시니 주시는 것이 매우 큽니다. 원컨대 왕의 종실(宗室)과 혼인을 해서 구생(舅甥)의 좋은 의(誼)를 길이 하고 싶습니다.” 왕이 대답했다. “우리 백부(伯父) 억렴(億廉; 왕王의 아버지 효종각간孝宗角干은 추봉追封된 신흥대왕神興大王의 아우이다)에게 딸이 있는데 덕행(德行)과 용모가 모두 아름답습니다. 이 사람이 아니고는 내정(內政)을 다스릴 사람이 없습니다.” 태조가 그에게 장가를 드니 이가 신성왕후(神成王后) 김씨(金氏)이다(우리 왕조王朝 등사랑登仕郞 김관의金寬毅가 지은 <왕대종록王代宗錄>에 이와 같은 말이 있다. “신성왕후神成王后 이씨李氏는 본래 경주慶州 대위大尉 이정언李正言이 협주수俠州守로 있을 때 태조太祖가 그 고을에 갔다가 그를 왕비王妃로 맞았다. 그런 때문에 그를 협주군俠州君이라고도 한다 했다. 그의 원당願堂은 현화사玄化寺이며, 3월 25일이 기일忌日로, 정릉貞陵에 장사지냈다. 아들 하나를 낳으니 안종安宗이다.” 이 밖에 25 비주妃主 가운에 김씨金氏의 일은 실려 있지 않으니 자세히 알 수 없다. 그러나 사신史臣의 의론을 봐도 역시 안종安宗을 신라의 외손外孫이라 했다. 그러니 마땅히 사전史傳을 옳다고 해야 할 것이다).
태조의 손자 경종(景宗) 주(伷)는 정승공(政承公)의 딸을 맞아 왕비를 삼으니, 이가 헌승황후(憲承皇后)이다. 이에 정승공(政承公)을 봉해서 상부(尙父)를 삼았다. 태평흥국(太平興國) 3년 무인(戊寅; 978)에 죽으니 시호를 경순(敬順)이라 했다. 상부(尙父)로 책봉하는 고명(誥命)에서 이렇게 말했다.
“조칙(詔勅)을 내리노니 희주(姬周)가 나라를 처음 세울 때는 먼저 여상(呂尙)을 봉했고 유한(劉漢)이 나라를 세울 때에는 먼저 소하(蕭何)를 봉했다. 이로부터 온 천하가 평정되었고 널리 기업(基業)이 열렸다. 용도(龍圖) 30대를 세우고 섭린(躡麟)은 400년을 이으니 해와 달이 거듭 밝고 천지가 서로 조화되었다. 비록 무위(無爲)의 군주(君主)로서 시작되었으나 역시 보좌(輔佐)하는 신하로 해서 일을 이루었던 것이다. 관광순화 위국공신 상주국 낙랑왕정승 식읍팔천호 김부(觀光順化 衛國功臣 上柱國 樂浪王政承 食邑八千戶 金傅)는 대대로 계림(鷄林)에 살고 있어서 벼슬은 왕의 작위(爵位)를 받았고, 그 영특한 기상은 하늘을 업신여길 만하고 문장(文章)은 땅을 진동할 만한 재주가 있었다. 부(富)는 오랫동안 계속되었고 귀(貴)는 모토(茅土)에 거(居)했으며 육도삼략(六韜三略)은 가슴 속에 들어 있고 칠종오신(七縱五申)을 손바닥으로 잡아 쥐었다. 우리 태조는 비로소 이웃 나라와 화목하게 지내는 우호(友好)를 닦으시니 일찍부터 내려오는 풍도를 알아서 이내 부마(駙馬)의 인의(姻誼)를 맺어 안으로 큰 절의(節義)에 보답했다. 이미 나라가 통일되고 군신(君臣)이 완전히 삼한(三韓)으로 합쳤으니 아름다운 이름은 널리 퍼지고 올바른 규범(規範)은 빛나고 높았다. 상부도성령(尙父都省令)의 칭호를 더해 주고 추충신의 숭덕수절공신(推忠愼義 崇德守節功臣)의 호(號)를 주니 훈봉(勳封)은 전과 같고 식읍(食邑)은 전후를 합쳐서 1만 호(戶)가 되었다. 유사(有司)는 날을 가려서 예(禮)를 갖추어 책명(冊命)하는 것이니 일을 맡은 자는 시행하도록 하라. 개보(開寶) 8년(975) 10월 일.”
“대광내의령 겸 총한림 신 핵선(大匡內議令 兼 摠翰林 臣 翮宣)은 받들어 행하여 위와 같이 칙령(勅令)을 받들고 직첩(職牒)이 도착하는 대로 봉행(奉行)하라. 개보(開寶) 8년 10월 일.”
“시중(侍中) 서명(署名), 내봉령(內奉令) 서명(署名), 군부령(軍部令) 서명(署名), 군부령(軍部令) 무서(無署), 병부령(兵部令) 무서(無署), 병부령(兵部令) 서명(署名), 광평시랑(廣坪(評)侍郞) 서명(署名), 광평시랑(廣坪(評)侍郞) 무서(無署), 내봉시랑(內奉侍郞) 무서(無署), 내봉시랑(內奉侍郞) 서명(署名), 군부경(軍部卿) 무서(無署), 군부경(軍部卿) 서명(署名), 병부경(兵部卿) 무서(無署), 병부경(兵部卿) 서명(署名),
추충신의 숭덕수절공신 상부도성령 상주국 낙랑군왕 식읍일만호 김부(推忠愼義 崇德守節功臣 尙父都省令 上柱國 樂浪郡王 食邑一萬戶 金傅)에게 고(告)하노니 위와 같이 칙령(勅令)을 받들고 부신(符信)이 도착하는 대로 봉행(奉行)하라.
주사(主事) 무명(無名), 낭중(郎中) 무명(無名), 서령사(書令史) 무명(無名), 공목(孔目) 무명(無名). 개보(開寶) 8년 10월 일에 내림.”
<사론>(史論)에는 이렇게 말했다.
“신라(新羅)의 박씨(朴氏)와 석(昔氏)는 모두 알에서 나왔다. 김씨는 황금(黃金) 궤 속에 들어서 하늘로부터 내려왔다고 한다. 혹은 황금으로 된 수레를 타고 왔다고 하는데 이것은 더욱 황당해서 믿을 수가 없다. 그러나 세속에서는 서로 전하여 사실이라고 한다. 이제 다만 그 시초를 살펴보건대 위에 있는 이는 그 몸을 위해서는 검소했고 남을 위해서는 너그러웠다. 그 관직을 설치하는 것은 간략히 했고 그 일을 행하는 것은 간소하게 했다. 성심껏 중국(中國)을 섬겨서 조빙(朝聘)하는 사신이 제항(梯航)으로 연락불절하여 항상 자제(子弟)들을 중국에 보내어 숙위(宿衛)하게 하고 국학(國學)에 들어가서 공부하게 했다. 이리하여 성현(聖賢)의 풍화를 이어받고 오랑캐의 풍속을 개혁시켜서 예의 있는 나라로 만들었다. 또 중국 군사의 위엄을 빌어 백제(百濟)와 고구려(高句麗)를 평정하고, 그 땅을 취하여 군현(郡縣)을 삼았으니 가히 장한 일이라 하겠다. 그러나 불법(佛法)을 숭상해서 그 폐단을 알지 못하고 심지어는 마을마다 탑과 절을 즐비하게 세워 백성들은 모두 중이 되어 군대(軍隊)니 농민(農民)이 점점 줄어들었다. 그리하여 나라가 날로 쇠퇴해 가니 어찌 어지러워지지 않을 것이며 또 망하지 않겠는가. 이 때에 경애왕(景哀王)은 더욱 음란하고 놀기에만 바빠 궁녀(宮女)들과 좌우 근신(近臣)들과 더불어 포석정(鮑石亭)에 나가 술자리를 베풀고 즐겨 견훤(甄萱)이 오는 것도 몰랐으니, 저 문 밖의 한금호(韓擒虎)나 누각(樓閣) 위의 장려와(張麗華)와 다를 것이 없었다. 경순왕(敬順王)이 태조(太祖)에게 귀순(歸順)한 것은 비록 할 수 없이 한 일이기는 하나 또한 아름다운 일이라 하겠다. 만일 힘껏 싸우고 죽기로 지켜서 고려 군사에게 반항했더라면 힘은 꺾이고 기세는 다해서 반드시 그 가족을 멸망시키고 죄없는 백성들에게까지 해가 미쳤을 것이다. 그런데 고명(告命)을 기다리지 않고 부고(府庫)를 봉하고 군현(郡縣)의 이름을 기록하여 귀순했으니 조정에 대해서는 공로가 있고 백성들에 대해서는 덕이 있는 것이 매우 크다 하겠다. 옛날 전씨(錢氏)가 오월(吳越)의 땅을 송(宋)나라에 바친 일을 소자첨(蘇子瞻)은 충신(忠臣)이라고 했으니, 이제 신라의 공덕(功德)은 그보다 훨씬 크다고 하겠다. 우리 태조는 비빈(妃嬪)이 많고 그 자손들도 또한 번성했다. 현종(顯宗)은 신라의 외손(外孫)으로서 왕위(王位)에 올랐으며, 그 뒤에 왕통(王統)을 계승한 이는 모두 그의 자손이었다. 이것이 어찌 그 음덕(陰德)이 아니겠는가.”
신라가 이미 땅을 바쳐 나라가 없어지자 아간(阿干) 신회(神會)는 외직(外職)을 내놓고 돌아왔는데 도성(都城)이 황폐한 것을 보고 서리리(黍離離)의 탄식함이 있어 이에 노래를 지었으나 그 노래는 없어져서 알 수가 없다.
남부여(南扶餘)와 전백제(前百濟)와 북부여(北扶餘; 北扶餘는 이미 위에 나와 있다)
부여군(扶餘郡)은 전 백제(百濟)의 도읍이니, 혹 소부리군(所夫里郡)이라고도 한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 의하면, “백제의 성왕(聖王) 26년 무오(戊午) 봄에 도읍을 사자(泗泚)로 옮기고 국호를 남부여(南扶餘)라 했다” 하고, 주(注)에 “그 지명(地名)은 소부리(所夫里)이니 사자(泗泚)는 지금의 고성진(古省津)이요 소부리는 부여의 딴 이름이다” 했다.
또 양전장부(量田帳簿)에 의하면, “소부리군은 농부의 주첩(柱貼)이다” 했으니 지금 말하는 부여군이란 옛 이름을 되찾은 셈이다. 백제 왕의 성(姓)이 부씨(扶氏)였으므로 그렇게 말했던 것이다.
혹 여주(餘州)라고도 말하는 것은, 군(郡)의 서쪽에 있는 자복사(資福寺) 고좌(高座)에 수놓은 장막이 있는데 그 수놓은 글에 말하기를, “통화(統和) 15년 정유(丁酉; 997) 5월 일 여주 공덕대사(功德大寺)의 수장(繡帳)이다” 했다. 또 옛날에는 하남(河南)에 임주자사(林州刺史)를 두었는데 그때 도적(圖籍) 중에 여주라는 두 글자가 있었으니 임주(林州)는 지금의 가림군(佳林郡)이고 여주는 지금의 부여군이다.
<백제지리지(百濟地理志)>에는 <후한서(後漢書)>에 있는 말을 인용해서 이렇게 말했다. ‘삼한(三韓)이 대개 78개 국인데 백제는 그 중의 한 나라이다.’
<북사(北史)>에는 이렇게 말했다. ‘백제(百濟)는 동쪽으로는 신라(新羅)에 접하고 서남쪽은 큰 바다에 접하며, 북쪽은 한강(漢江)을 경계로 했다. 그 도읍은 거발성(居拔城) 또는 고마성(固麻城)이라고 하며, 이 밖에 다시 오방성(五方城)이 있다.’
<통전(通典)>에는 이렇게 말했다. ‘백제는 남쪽으로 신라에 접하고 북쪽으로는 고구려에 이르며, 서쪽으로는 큰 바다에 닿았다.’
<구당서(舊唐書)>에서는 또 이렇게 말했다. ‘백제는 부여의 딴 종족이다. 동북쪽은 신라이고 서쪽은 바다를 건너서 월주(越州)에 이르며 남쪽은 바다를 건너서 왜국에 이르고, 북쪽은 고구려이다. 그 왕이 거처하는 곳에 동서(東西)의 두 성이 있다.’
<신당서(新唐書)>를 보면 이러하다. ‘백제는 서쪽으로 월주(越州)와 경계를 이루고, 남쪽은 왜국인데 모두 바다를 건너게 된다. 북쪽은 고구려이다.’
<삼국사(三國史)> 본기(本紀)에는 이렇게 말했다. ‘백제의 시조는 온조(溫祚)요, 그의 아버지는 추모왕(雛牟王)인데 혹은 주몽(朱蒙)이라고도 하니, 그는 북부여(北扶餘)에서 난리를 피하여 졸본부여(卒本扶餘)에 왔었다. 그곳 왕에게 아들이 없고 다만 딸 셋이 있었는데 주몽을 보자 범상치 않은 사람인 것을 알고 둘째딸을 아내로 주었다. 얼마 안 되어 부여주(扶餘州)의 왕이 죽자 주몽이 왕위를 이어받았다. 주몽은 두 아들을 낳았는데 맏이는 비류(沸流)이고 다음은 온조(溫祚)다. 그들은 후에 태자(太子)에게 용납되지 않을 것을 걱정하여 드디어 오간(烏干)·마려(馬黎) 등 10여 명 신하들과 함께 남쪽으로 가니 백성들도 이를 따르는 자가 많았다. 한산(漢山)에 이르러 부아악(負兒岳)에 올라서 살 만한 곳이 있는가 찾아보았다. 비류가 바닷가에 가서 살자고 하자 열 명의 신하들은 간하기를 “이 하남(河南)땅은, 북쪽으로는 한수(漢水)가 흐르며 동쪽으로는 높은 산을 의지했고, 남쪽으로 기름진 못을 바라보고, 서쪽으로는 큰 바다가 가로놓여 있어서 천험(天險)과 지리(地利)가 좀체로 얻기 어려운 형세입니다. 그러니 여기에 도읍을 정하는 것이 어찌 좋지 않겠습니까?” 했다. 그러나 비류는 이 말을 듣지 않고 백성을 나누어 미추홀(彌雛忽)에 가서 살았다. 한편 온조는 하남위례성(河南慰禮城)에 도읍하여 열 명의 신하를 보필(輔弼)로 삼아 나라 이름을 십제(十濟)라 했으니, 이 때는 한(漢)나라 성제(成帝) 홍가(鴻佳(嘉)) 3년이었다. 비류는, 미추홀이란 곳이 습기가 많고 물이 짜서 편안히 살 수가 없었다. 위례성에 돌아와 보니 도읍은 안정되고 백성들은 편안히 살고 있으므로 마침내 부끄러워하고 후회해서 죽었다. 이에 그의 신하와 백성들은 모두 위례성으로 돌아왔다. 그 뒤에, 백성들이 올 때에 기뻐했다고 해서 나라 이름을 백제라고 고쳤다. 그 세계(世系)는 고구려와 마찬가지로 부여에서 나왔기 때문에 씨(氏)를 해(解)라고 했다. 그 뒤 성왕(聖王) 때에 도읍을 사비(泗泚)로 옮겼으니 이것이 지금의 부여군이다(미추홀彌雛忽은 인주仁州이고 위례慰禮는 지금의 직산稷山이다).
<고전기(古典記)>에 의하면 이러하다. 동명왕(東明王)의 셋째아들 온조(溫祚)는 전한(前漢) 홍가(鴻佳) 3년 계유(癸酉)(묘卯; 前 18)에 졸본부여에서 위례성(慰禮城)으로 와서 도읍을 정하고 왕이라 일컬었다. 14년 병진(丙辰)에 도읍을 한산(漢山)으로 옮겨 389년을 지냈으며, 13세 근초고왕(近肖古王) 때인 함안(咸安) 원년(元年; 371)에 고구려의 남평양(南平壤)을 빼앗아 도읍을 북한성(北漢城; 지금의 양주楊洲)으로 옮겨 105년을 지냈다. 22세 문주왕(文周王)이 즉위하던 원휘(元徽) 3년 을묘(乙卯; 475)에는 도읍을 웅천(熊川; 지금의 공주公州)으로 옮겨 63년을 지내고, 26세 성왕(聖王) 대에 도읍을 소부리(所夫里)로 옮기고 국호를 남부여(南扶餘)라 하여 31세 의자왕(義慈王)에 이르기까지 120년을 지냈다.
당(唐)나라 현경(顯慶) 5년(660)은 의자왕이 왕위에 있던 20년으로 신라 김유신(金庾信)이 소정방(蘇定方)과 백제를 쳐서 평정하던 해이다. 백제에는 본래 다섯 부(部)가 있어 37군(郡)·200성(城)·76만호(戶)로 나뉘었었다. 그런데 당에서는 그 땅에 웅진(熊津)·마한(馬韓)·동명(東明)·금련(金蓮)·덕안(德安) 등 다섯 도독부(都督府)를 두고, 그 추장(酋長)들로 도독부(都督府), 자사(刺史)를 삼았는데 얼마 안 되어 신라가 그 땅을 모두 병합했다. 그리고 거기에 웅주(熊州)·전주(全州)·무주(武州) 등 세 주(州)와 여러 군현(郡縣)을 두었다.
또 호암사(虎嵓寺)에는 정사암(政事嵓)이란 바위가 있는데, 나라에서 장차 재상(宰相)감을 의논할 때에 뽑힐 사람 3, 4명의 이름을 써서 상자에 넣고 봉해서 바위 위에 두었다가 얼마 후에 열어 보아 이름 위에 도장이 찍힌 자리가 있는 사람을 재상으로 삼았기 때문에 그런 이름이 있다.
또 사자하(泗泚河) 가에는 바위 하나가 있는데 소정방이 일찍이 그 바위 위에 앉아서 물고기와 용을 낚았다 하여 바위 위에는 용이 꿇어앉았던 자취가 있으므로 그 바위를 용암(龍巖)이라고 한다.
또 고을 안에는 산이 세 개가 있어서 그곳을 일산(日山)·오산(吳山)·부산(浮山)이라고 하는데 백제가 전성(全盛)하던 때에 신(神)들이 그 산 위에 살면서 서로 날아 왕래하기를 조석으로 끊이지 않았다.
사자수(泗泚水) 언덕에는 또 돌 하나가 있는데 10여 명이 앉을 만하다. 백제 왕이 왕흥사(王興寺)에 가서 부처에게 예(禮)를 드리려 할 때면 먼저 그 돌에서 부처를 바라보고 절을 하면 그 돌이 저절로 따뜻해졌다 해서 그 돌을 환석(煥石)이라고 한다.
또 사자하(泗泚河)의 양쪽 언덕은 마치 그림 병풍과 같아서 백제 왕이 매양 그곳에서 잔치를 열고 노래하고 춤추면서 즐겼다. 그런 때문에 지금도 이곳을 대왕포(大王浦)라고 일컫는다.
또 시조(始祖) 온조왕은 동명왕(東明王)의 셋째아들로서 몸이 장대하고 효도와 우애가 지극하고, 말 타기와 활 쏘기를 잘했다. 또 다루왕(多婁王)은 너그럽고 관후했으며 위엄과 인망이 있었다. 또 사비왕(沙沸王; 혹은 사이왕沙伊王)은 구수왕(仇首王)이 죽은 뒤에 왕위를 계승했으나 나이가 어려서 정사를 보살필 수가 없었기 때문에 즉시 이를 폐하고 고이왕(古爾王)을 세웠다. 혹은 말하기를, 낙초(樂初) 2년 기미(己未)에 사비왕(沙沸王)이 죽고 고이왕이 왕위에 올랐다고 한다.
무왕(武王; 고본古本에는 무강武康이라고 했으나 잘못이다. 백제百濟에는 무강武康이 없다)
제30대 무왕(武王)의 이름은 장(璋)이다. 그 어머니가 과부(寡婦)가 되어 서울 남쪽 못 가에 집을 짓고 살았는데 못 속의 용(龍)과 관계하여 장을 낳았던 것이다. 어릴 때 이름은 서동(薯童)으로 재주와 도량이 커서 헤아리기 어려웠다. 항상 마[薯蕷]를 캐다가 파는 것으로 생업(生業)을 삼았으므로 사람들이 서동이라고 이름지었다. 신라 진평왕(眞平王)의 셋째공주 선화(善花; 혹은 선화善化)가 뛰어나게 아름답다는 말을 듣고는 머리를 깎고 서울로 가서 마을 아이들에게 마를 먹이니 이내 아이들이 친해져 그를 따르게 되었다. 이에 동요를 지어 아이들을 꾀어서 부르게 하니 그것은 이러하다.
선화공주(善化公主)님은 남몰래 정을 통하고
서동방(薯童房)을 밤에 몰래 안고 간다.
동요(童謠)가 서울에 가득 퍼져서 대궐 안에까지 들리자 백관(百官)들이 임금에게 극력 간해서 공주를 먼 곳으로 귀양보내게 하여 장차 떠나려 하는 데 왕후(王后)는 순금(純金) 한 말을 주어 노자로 쓰게 했다. 공주가 장차 귀양지에 도착하려는데 도중에 서동이 나와 공주에게 절하면서 모시고 가겠다고 했다. 공주는 그가 어디서 왔는지는 알지 못했지만 그저 우연히 믿고 좋아하니 서동은 그를 따라가면서 비밀히 정을 통했다. 그런 뒤에 서동의 이름을 알았고, 동요가 맞는 것도 알았다. 함께 백제로 와서 모후(母后)가 준 금을 꺼내 놓고 살아 나갈 계획을 의논하자 서동이 크게 웃고 말했다. “이게 무엇이오?” 공주가 말했다. “이것은 황금이니 이것을 가지면 백 년의 부를 누릴 것입니다.” “나는 어릴 때부터 마를 캐던 곳에 황금을 흙덩이처럼 쌓아 두었소.” 공주는 이 말을 듣고 크게 놀라면서 말했다. “그것은 천하의 가장 큰 보배이니 그대는 지금 그 금이 있는 곳을 아시면 우리 부모님이 계신 대궐로 보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좋소이다.” 이에 금을 모아 산더미처럼 쌓아 놓고, 용화산(龍華山) 사자사(師子寺)의 지명법사(知命法師)에게 가서 이것을 실어 보낼 방법을 물으니 법사가 말한다. “내가 신통(神通)한 힘으로 보낼 터이니 금을 이리로 가져 오시오.” 이리하여 공주가 부모에게 보내는 편지와 함께 금을 사자사(師子寺) 앞에 갖다 놓았다. 법사는 신통한 힘으로 하룻밤 동안에 그 금을 신라 궁중으로 보내자 진평왕(眞平王)은 그 신비스러운 변화를 이상히 여겨 더욱 서동을 존경해서 항상 편지를 보내어 안부를 물었다. 서동은 이로부터 인심을 얻어서 드디어 왕위에 올랐다.
어느날 무왕이 부인과 함께 사자사에 가려고 용화산(龍華山) 밑 큰 못 가에 이르니 미륵삼존(彌勒三尊)이 못 가운데서 나타나므로 수레를 멈추고 절을 했다. 부인이 왕에게 말한다. “모름지기 여기에 큰 절을 지어 주십시오. 그것이 제 소원입니다.” 왕은 그것을 허락했다. 곧 지명법사에게 가서 못을 메울 일을 물으니 신비스러운 힘으로 하룻밤 사이에 산을 헐어 못을 메워 평지를 만들었다. 여기에 미륵삼존의 상(像)을 만들고 회전(會殿)과 탑(塔)과 낭무(廊廡)를 각각 세 곳에 세우고 절 이름을 미륵사(彌勒寺; <국사國史>에서는 왕흥사王興寺라고 했다)라 했다. 진평왕이 여러 공인(工人)들을 보내서 그 역사를 도왔는데 그 절은 지금도 보존되어 있다(<삼국사三國史>에는 이 분을 법왕法王의 아들이라고 했는데, 여기에서는 과부의 아들이라고 했으니 자세히 알 수 없다).
후백제(後百濟)의 견훤(甄萱)
<삼국사(三國史)> 본전(本傳)에 보면 이러하다. 견훤(甄萱)은 상주(尙州) 가은현(加恩縣) 사람으로, 함통(咸通) 8년 정해(丁亥; 867)에 났다. 근본 성(姓)은 이(李)였는데 뒤에 견(甄)으로 씨(氏)를 고쳤다. 아버지 아자개(阿慈个)는 농사지어 생활했었는데, 광계(光啓) 연간에 사불성(沙弗城; 지금의 상주尙州)에 웅거하여 스스로 장군(將軍)이라 했다. 아들이 넷이 있어 모두 세상에 이름이 알려졌는데 그 중에 견훤(甄萱)은 남보다 뛰어나고 지략(智略)이 많았다.
<이제가기(李磾家記)>에 보면 이렇게 말했다. 진흥대왕(眞興大王)의 비(妃) 사도(思刀)의 시호는 백융부인(白駥夫人)이다. 그 셋째아들 구륜공(仇輪公)의 아들 파진간(波珍干) 선품(善品)의 아들 각간(角干) 작진(酌珍)이 왕교파리(王咬巴里)를 아내로 맞아 각간 원선(元善)을 낳으니 이가 바로 아자개이다. 아자개의 첫째부인은 상원부인(上院夫人)이요, 둘째부인은 남원부인(南院夫人)으로 아들 다섯과 딸 하나를 낳았으니 그 맏아들이 상부(尙父) 훤(萱)이요, 둘째아들이 장군 능애(能哀)요, 셋째아들이 장군 용개(龍盖)요, 넷째아들이 보개(寶盖)요, 다섯째아들이 장군 소개(小盖)이며, 딸이 대주도금(大主刀金)이다.
또 <고기(古記)>에는 이렇게 말했다. 옛날에 부자 한 사람이 있어 모양이 몹시 단정했다. 딸이 아버지께 말하기를 “밤마다 자줏빛 옷을 입은 남자가 침실에 와서 관계하고 갑니다”하자 아버지는 “너는 긴 실을 바늘에 꿰어 그 남자의 옷에 꽂아 두어라”하여 그 말대로 시행했다. 날이 밝아 그 실이 간 곳을 찾아보니 북쪽 담 밑에 있는 큰 지렁이 허리에 꽂혀 있다. 이로부터 태기가 있어 사내아이를 낳았는데 나이 15세가 되자 스스로 견훤(甄萱)이라 일컬었다. 경복(景福) 원년(元年) 임자(壬子; 892)에 이르러 왕이라 일컫고 완산군(完山郡)에 도읍을 정했다. 나라를 다스린지 43년 청태(淸泰) 원년(元年) 갑오(甲午; 934)에 견훤의 세 아들 즉 신검(神劒)·용검(龍劒)·양검(良劒)이 즉위하여 천복(天福) 원년(元年) 병신(丙申; 936)에 고려 군사와 일선군(一善郡)에서 싸워서 패하니 후백제(後百濟)는 아주 없어졌다.
처음에 견훤이 나서 포대기에 싸였을 때, 아버지는 들에서 밭을 갈고 어머니는 아버지에게 밥을 가져다 주려고 아이를 수풀 아래 놓아 두었더니 범이 와서 젖을 먹이니 마을 사람들은 이 말을 듣고 이상하게 여겼다. 아이가 장성하자 몸과 모양이 웅장하고 기이했으며 뜻이 커서 남에게 얽매이지 않고 비범했다. 군인이 되어 서울로 들어갔다가 서남의 해변으로 가서 변경을 지키는데 창을 베개삼아 적군을 지키니 그의 기상(氣象)은 항상 사졸(士卒)에 앞섰으며 그 공로로 비장(裨將)이 되었다. 당(唐)나라 소종(昭宗) 경복(景福) 원년(元年)은 신라 진성왕(眞聖王)의 재위 6년이다. 이때 왕의 총애를 받는 신하가 곁에 있어서 국권(國權)을 농간하니 기강(紀綱)이 어지럽고 해이하였으며, 기근(饑饉)이 더해지니 백성들은 떠돌아다니고 도둑들이 벌떼처럼 일어났다. 이에 견훤은 남몰래 반역할 마음을 품고 무리를 모아 서울의 서남 주현(州縣)들을 공격하니 가는 곳마다 백성들이 호응하여 한 달 동안에 무리는 5,000이나 되었다. 드디어 무진주(武珍州)를 습격하여 스스로 왕이 되었으나 감히 공공연하게 왕이라 일컫지는 못하고 스스로 신라서남도통 행전주자사 겸 어사중승상주국 한남국개국공(新羅西南都統 行全州刺史 兼 御史中承上柱國 漢南國開國公)이라 했으니 용화(龍化) 원년(元年) 기유(己酉; 889)였다. 이것을 혹 경복(景福) 원년(元年) 임자(壬子; 892)의 일이라고도 한다.
이때 북원(北原)의 오둑 양길(良吉)의 세력이 몹시 웅대하여 궁예(弓裔)는 자진해서 그 부하가 되었다. 견훤이 이 소식을 듣고 멀리 양길에게 직책을 주어 비장(裨將)으로 삼았다. 견훤이 서쪽으로 순행(巡行)하여 완산주(完山州)에 이르니 고을 백성들이 영접하면서 위로했다. 견훤은 민심을 얻은 것이 기뻐서 좌우 사람들에게 말했다. “백제가 나라를 시작한 지 600여 년에 당나라 고종(高宗)은 신라의 요청으로 소정방(蘇定方)을 보내서 수군(水軍) 13만 명이 바다를 건너오고 신라의 김유신(金庾信)은 있는 군사를 거느리고 황산(黃山)을 거쳐 당나라 군사와 합세하여 백제를 쳐서 멸망시켰으니 어찌 감히 도읍을 세워 옛날의 분함을 씻지 않겠는가.” 드디어 스스로 후백제 왕이라 일컫고 벼슬과 직책을 나누었으니 이는 당나라 광화(光化) 3년이요 신라 효공왕(孝恭王) 4년(900)이다.
정명(貞明) 4년 무인(戊寅; 918)에 철원경(鐵原京)의 민심이 졸지에 변하여 우리 태조(太祖)를 추대하여 왕위에 오르게 하니 견훤은 이 소식을 듣고 사자(使者)를 보내서 경하(慶賀)하고 공작선(孔雀扇)과 지리산(智異山)의 죽전(竹箭) 등을 바쳤다. 견훤은 우리 태조에게 겉으로는 화친하는 체하면서 속으로는 시기하였다. 그는 태조에게 총마(驄馬)를 바치더니 3년 겨울 10월에는 기병(騎兵) 3,000을 거느리고 조물성(曹物城; 지금의 어딘지 자세히 알 수 없음)까지 오자 태조(太祖)도 역시 정병(精兵)을 거느리고 와서 싸웠으나 견훤의 군사가 날래어 승부(勝負)를 결단할 수가 없었다. 이에 태조는 일시적으로 화친하여 견훤의 군사들이 피로하기를 기다리려고 글을 보내서 화친할 것을 요구하고 종제(從弟) 왕신(王信)을 인질로 보내니 견훤도 역시 그 사위 진호(眞虎)를 보내서 교환했다. 12월에 견훤은 거서(居西; 지금의 어딘지 자세히 알 수 없다) 등 20여 성을 쳐서 차지하고 사자를 후당(後唐)에 보내서 번신(藩臣)이라 일컬으니 후당에서는 그에게 검교태위 겸 시중판백제군사(檢校太尉 兼 侍中判百濟軍事)의 벼슬을 주고, 전과 같이 도독행전주자사 해동서면도통지휘병마판치등사 백제왕(都督行全州刺史 海東西面都統指揮兵馬判置等事 百濟王)이라 하고 식읍(食邑) 2,500호를 주었다. 4년에 진호가 갑자기 죽자 견훤은 일부러 죽인 것이라고 의심해서 즉시 왕신을 가두고 사람을 보내서 전년에 보낸 총마를 돌려보내라고 하니 태조는 웃고 그 말을 돌려보냈다. 천성(天成) 2년 정해(丁亥; 927) 9월에 견훤은 근품성(近品成; 지금의 산양현山陽縣)을 쳐 빼앗아 불을 질렀다. 이에 신라 왕이 태조에게 구원을 청하자 태조는 장차 군사를 내려는데 견훤은 고울부(高鬱府; 지금의 울주蔚州)를 쳐서 취하고 족시림(族始林; 혹은 계림鷄林 서쪽 들이라고 했다)으로 진군하여 졸지에 신라 서울로 들어갔다. 이때 신라 왕은 부인과 함께 포석정(鮑石亭)에 나가 놀고 있었으므로 더욱 쉽게 패했다. 견훤은 왕의 부인을 억지로 끌어다가 욕보이고 왕의 족제(族弟) 김부(金傅)로 왕위를 잇게 한 뒤에 왕의 아우 효렴(孝廉)과 재상 영경(英景)을 사로잡고, 나라의 귀한 보물과 무기와 자제(子弟)들, 그리고 여러 가지 공인(工人) 중에 우수한 자들을 모두 데리고 갔다. 태조는 정예(精銳)한 기병(騎兵) 5,000을 거느리고 공산(公山) 아래에서 견훤을 맞아서 크게 싸웠으나 태조의 장수 김락(金樂)과 신숭겸(申崇謙)은 죽고 모든 군사가 패했으며, 태조만이 겨우 죽음을 면했을 뿐 대항하지 못했기 때문에 견훤은 많은 죄악을 짓게 되었다. 견훤은 전쟁에 이긴 기세를 타서 대목성(大木城)과 경산부(京山府)와 강주(康州)를 노략하고 부곡성(缶谷城)을 공격했는데 의성부(義成府)의 태수(太守) 홍술(洪述)은 대항해 싸우다가 죽었다. 태조는 이 소식을 듣고 말했다. “나는 오른손을 잃었다.”
42년 경인(庚寅: 930)에 견훤은 고창군(古昌郡; 지금의 안동부安東府)을 치려고 군사를 크게 일으켜 석산(石山)에 영채를 마련하니 태조는 백보(百步) 가량을 공격해서 고을 북쪽 병산(甁山)에 영채를 마련했다. 여러 번 싸웠으나 견훤이 패하여 시랑(侍郞) 김악(金渥)이 사로잡혔다. 다음날 견훤이 군사를 거두어 순주성(順州城)을 습격하니 성주(城主) 원봉(元逢)은 막지 못하고 성을 버리고 밤에 도망했다. 태조는 몹시 노하여 그 고을을 낮추어 하지현(下枝縣; 지금의 풍산현豊山縣. 원봉元逢이 본래 순주성順州城 사람인 까닭이다)을 삼았다.
신라(新羅)의 군신(君臣)들은 망해 가는 세상에 다시 일어날 수가 없으므로 우리 태조를 끌어들여 좋은 의(誼)를 맺어서 자기들을 후원해 주도록 했다. 견훤이 이 소식을 듣고 또다시 신라 서울에 들어가 나쁜 짓을 하려 하는데, 태조가 먼저 들어갈까 두려워해서 태조에게 편지를 보냈다. “전일에 국상(國相) 김웅렴(金雄廉) 등이 장차 그대를 서울로 불러들이려 한 것은 작은 자라가 큰 자라의 소리에 호응하는 것과 같으며, 종달새가 매의 죽지를 찢으려 드는 것과 같으니, 반드시 백성들을 도탄(塗炭)에 빠뜨리고 종묘(宗廟)와 사직(社稷)을 빈 터전으로 만들 것이오. 나는 이 때문에 먼저 조적(祖逖)의 채찍을 가지고 홀로 한금호(韓擒虎)의 도끼를 휘둘러 백관(百官)들에게 맹세하기를 백일(白日)과 같이 했고, 육부(六部)를 의리 있는 풍도로 설유(說諭)했더니 뜻밖에 간신(奸臣)은 도망하고 임금[경애왕景哀王]은 세상을 떠났소. 이에 경명왕(景明王)의 외종제(外從弟)인 헌강왕(憲康王)의 외손(外孫)을 받들어 왕위에 오르게 해서 위태로운 나라를 다시 세우고 없는 임금을 다시 있게 만들었소. 그런데 그대는 내 충고(忠告)를 자세히 살피지 않고 한갓 흘러 다니는 말만을 듣고 온갖 계교로 왕위를 엿보고 여러 가지로 나라를 침노했으나 오히려 내가 탄 말의 머리도 보지 못했고 내 쇠털 하나도 뽑지 못했소. 이 겨울 초순에는 도두(都頭) 색상(索湘)이 성산(星山)의 진(陣) 밑에서 손을 묶어 항복했고, 또 이달 안에는 좌장(左將) 김락(金樂)이 미리사(美利寺) 앞에서 전사(戰死)했소. 이밖에 죽인 것도 많고 사로잡은 것도 적지 않았소. 그 강하고 약한 것이 이와 같으니 이기고 질 것은 알 만한 일이오. 내가 바라는 일은 활을 평양성(平壤城) 문루(門樓)에 걸고 말에게 패강(浿江)의 물을 먹이는 일이오. 그러나 지난달 7일에 오월국(吳越國)의 사신 반상서(班尙書)가 와서 국왕(國王)의 조서(詔書)를 전하기를, ‘경(卿)은 고려와 오랫동안 좋은 화의(和誼)를 통하고 함께 이웃 나라의 맹약(盟約)을 맺은 줄 알았었소. 그런데 인질로 간 사람이 죽은 것을 보고 드디어 화친(和親)하던 옛 뜻을 잃어버리고 서로 국경을 침범하여 전쟁이 쉬지 않게 되었소. 이제 일부러 사신을 경의 고을로 보내고 또 고려에도 글을 보내어 마땅히 각각 서로 친목해서 길이 평화를 도모하도록 한 것이오.’ 내가 생각하는 의리는 왕실을 높이는 데에 독실하고 마음은 큰 나라를 섬기는 데 깊었었소. 이제 오월왕(吳越王)이 조칙(詔勅)을 타이르는 것을 듣고 즉시 받들어 행하고자 하나, 다만 그대가 그만두고 싶어도 그만둘 수가 없고 국경에 있으면서도 싸우려는 것을 걱정하는 바요. 이제 그 조서(詔書)를 베껴서 보내는 터이니 청컨대 유의해서 자세히 살피시오. 또 토끼와 사냥개가 다 함께 지치고 보면 마침내는 반드시 남의 조롱을 받는 법이오. 조개와 황새가 서로 버티다가는 역시 남의 웃음거리가 되는 것이오. 마땅히 미복(迷復)을 경계하여 후회하는 일을 스스로 불러오지 말도록 하시오.”
천성(天成) 2년(927) 정월에 태조는 회답을 보냈다. “오월국(吳越國)의 통화사(通和使) 반상서(班尙書)가 전한 조서(詔書) 한 통을 받들고, 겸하여 그대가 보낸 긴 편지도 받아 보았소. 화초부사(華軺膚使)가 조서를 가지고 왔고, 척소호음(尺素好音)과 겸해서 가르침도 받았소. 지검(芝檢)을 받아 비록 감격은 더했지만 편지를 펴 보고 의심스러운 마음을 없애기 어려웠소. 이제 돌아가는 사신에게 부탁하여 내가 하고 싶은 말을 하려 하오. 나는 위로 하늘의 명령을 받들고 아래로 백성들의 추대에 못 이겨서 외람되이 장수의 직권(職權)을 맡아서 천하를 경륜할 기회를 얻었던 것이오. 저번에 삼한(三韓)이 액운(厄運)을 당하고 모든 국토에 흉년이 들어 황폐해져서 백성들은 모두 황건(黃巾)에 소속되고, 논밭은 적토(赤土)가 아닌 땅이 없었소. 난리의 시끄러움을 그치게 하고 나라의 재앙을 구하려 하여 이에 스스로 선린(善隣)의 우호(友好)를 맺으니 과연 수천 리 되는 국토가 농상(農桑)으로 생업(生業)을 즐기고, 사졸(士卒)은 7,8년 동안 한가롭게 쉬었소. 그러던 것이 계유(癸酉)년 10월에 갑자기 일이 생겨서 교전(交戰)하게 되었소. 그대가 처음에는 적을 가볍게 여겨 곧장 전진해 와서 마치 당랑(螳螂)이 수레바퀴를 막는 것 같이 하더니, 마침내 어려움을 알고 용감히 물러가서 마치 모기가 산을 짊어진 것과 같이 했소. 그리고 손을 모아 공손한 말로 하늘을 가리켜 맹세하기를, ‘오늘 이후로는 길이 화목하며, 혹시라도 이 맹세를 어긴다면 신(神)이 벌을 줄 것이라’하였소. 이에 나도 전쟁을 중지하는 무(武)를 숭상하고 사람을 죽이지 않는 인(仁)을 기약하여 드디어 여러 겹 포위했던 것을 풀어 피로한 군사들을 쉬게 했으며, 인질 보내는 것도 거절하지 않고 다만 백성만을 편안하게 하려 했으니, 이것은 곧 내가 남쪽 사람들에게 큰 덕(德)을 베푼 것이었소. 그런데 맹약(盟約)의 피가 마르기도 전에 흉악한 세력이 다시 일어나 봉채(蜂蠆)의 독이 생민(生民)을 침해하고 미친 이리와 호랑이가 서울땅을 가로막아 금성(金城)이 군색하고 황옥(黃屋)을 몹시 놀라게 할 줄 어찌 생각했겠소? 큰 의리에 의거해서 주(周)나라 왕실을 높이는 것이 그 누가 환공(桓公)·문공(文公)의 패업(霸業)과 같겠는가. 기회를 타서 한(漢)나라를 도모한 것은 오직 왕망(王莽)·동탁(董卓)의 간사함을 볼 뿐이오. 왕의 지극히 높은 지위로서 몸을 굽혀 그대에게 자(子)라고 하게 하여 높고 낮은 차서를 잃게 하였으니 상하(上下)가 모두 조심해서 원보(元輔)의 충순(忠純)이 아니면 어찌 사직(社稷)을 편안케 할 수 있으랴 했소, 나의 마음에는 악한 것이 없고 뜻은 왕실(王室)을 높이는 데 간절하여 장차 조정을 구원해서 나라를 위태로운 데서 구해 내려 했소. 그대는 터럭만한 작은 이익을 보고 천지의 두터운 은혜를 저버려 임금을 죽이고 대궐을 불사르며 대신(大臣)들을 죽이고 사민(士民)을 도륙했소. 궁녀(宮女)들은 잡아서 수레에 실어 가고 보물은 빼앗아서 짐 속에 실었으니 그 흉악함은 걸왕(桀王)·주왕(紂王)보다 더하고 어질지 못함은 경짐승[獍]과 올빼미보다 더 심했소. 나는 붕천(崩天)의 원한과 각일(却日)의 깊은 정성으로, 매가 참새를 쫓듯이 국가에 대해 견마(犬馬)의 수고로움을 다하려 했소. 그리하여 두 번째 군사를 일으켜 2년이 지났는데, 육로(陸路)로 진격하는 데는 천둥과 번개처럼 빨리 달렸고, 수로(水路)로 치는 데는 범과 용처럼 용맹스러워 움직이면 반드시 공을 세우고 일을 하는 데 헛일이 없었소. 윤경(尹卿)을 바닷가로 쫓으면 쌓인 갑옷이 산더미 같았고, 추조(雛造)를 성 가에서 잡았을 때에는 시체가 들을 덮었소. 연산군(燕山君)에서는 길환(吉奐)을 군전(軍前)에서 베었고, 마리성(馬利城; 아마 이산군伊山郡인 듯싶다) 가에서는 수오(隨晤)를 깃발 아래서 죽였소. 임존성(任存城; 지금의 대흥군大興郡)을 함락시키던 날에는 형적(刑積) 등 수백 명이 목숨을 버렸고, 청천현(淸川縣; 상주尙州 영내領內의 현縣 이름)을 깨칠 때에는 직심(直心) 등 4, 5 무리가 머리를 바쳤소. 동수(桐藪; 지금의 동화사桐華寺)는 깃발만 바라보고 도망해 흩어졌고, 경산(京山)은 구슬을 입에 물고 항복했소. 강주(康州)는 남쪽으로부터 귀순해 왔고, 나부(羅府)는 서쪽에서 와서 소속되었소. 공격하는 것이 이와 같았으니 수복(收復)될 날이 어찌 멀겠소? 반드시 저수(泜水)의 영채에서 장이(張耳)의 묵은 원한을 씻고, 오강(烏江) 기슭에서 한왕(漢王)의 한번 승전(勝戰)한 마음을 이룩해서 마침내 바람과 물결을 쉬게 하여 길이 천하를 맑게 할 것이오. 이는 하늘이 돕는 바이니 천명(天命)이 어디로 돌아가겠소? 더구나 오월왕(吳越王) 전하의 덕은 포황(包荒)에도 흡족하고 인(仁)은 어린 백성에게도 깊어 특히 대궐에서 명령을 내려 우리 나라에서 난리를 그치라고 효유하였소. 이미 가르침을 받았으니 어찌 받들어 행하지 않겠소? 만일 그대도 이 조서(詔書)를 받들어 흉악한 싸움을 그친다면, 다만 오월국의 어진 은혜에 보답할 뿐만 아니라 또한 동방(東方)의 끊어진 대(代)도 이을 수 있을 것이오. 그러나 만일 허물을 고치지 않는다면, 후회해도 미치지 못할 것이오.”(이 글은 최치원崔致遠이 지었다)
장흥(長興) 3년(932)에 견훤의 신하 공직(龔直)이 용맹스럽고 지략(智略)이 있었는데 태조(太祖)에게로 와서 항복하니 견훤은 공직의 두 아들과 딸 하나를 잡아서 다리 힘줄을 지져서 끊었다. 9월에 견훤은 일길(一吉)을 보내어 수군(水軍)을 이끌고 고려 예성강(禮成江)으로 들어가 3일 동안 머무르면서 염주(鹽州)·백주(白州)·진주(眞州) 등 세 주(州)의 배 100여 척을 빼앗아 불사르고 돌아갔다.
청태(淸泰) 원년(元年) 갑오(甲午; 934)에 견훤은 태조가 운주(運州; 자세히 알 수 없다)에 주둔해 있다는 말을 듣고 갑옷 입은 군사를 뽑아 욕식(蓐食)시켜 빨리 가게 하였는데, 미처 영채에 이르기 전에 장군(將軍) 유금필(庾黔弼)이 강한 기병(奇兵)으로 쳐서 3,000여 명을 목베니 웅진(熊津) 이북(以北)의 30여 성은 이 소문을 듣고 자진해서 항복하였으며, 견훤의 부하였던 술사(術士) 종훈(宗訓)과 의사(醫師) 지겸(之謙), 용장(勇將) 상봉(尙逢)·최필(崔弼) 등도 모두 태조에게 항복했다.
병신(丙申; 936)년 정월에 견훤은 그 아들에게 말했다. “내가 신라말(新羅末)에 후백제를 세운 지 여러 해가 되어 군사는 북쪽의 고려 군사보다 배나 되는데도 오히려 이기지 못하니 필경 하늘이 고려를 위하여 가수(假手)하는 것 같다. 어찌 북쪽 고려 왕에게 귀순해서 생명을 보전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 그러나 그 아들 신검(神劍)·용검(龍劍)·양검(良劍) 등 세 사람은 모두 응하지 않았다. <이제가기(李磾家記)>에는 이렇게 말했다. “견훤에게는 아들 아홉이 있으니, 맏이는 신검(神劍), 둘째는 태사(太師) 겸뇌(謙腦), 셋째는 좌승(佐承) 용술(龍述), 넷째는 태사(太師) 총지(聰智), 다섯째는 대아간(大阿干) 종우(宗祐), 여섯째는 이름을 알 수 없고, 일곱째는 좌승(佐承) 위흥(位興), 여덟째는 태사(太師) 청구(靑丘)이며, 딸 하나는 국대부인(國大夫人)이니 모두 상원부인(上院夫人)의 소생(所生)이다.” 또 말하기를, “견훤은 처첩(妻妾)이 많아서 아들 10여 명을 두었는데, 넷째아들 금강(金剛)은 키가 크고 지혜가 많아 견훤이 특히 그를 사랑하여 왕위를 전하려 하니 그 형 신검·양검·용검 등이 알고 몹시 근심했다. 이때 양검은 강주도독(康州都督), 용검은 무주도독(武州都督)으로 있고, 홀로 신검만이 견훤의 곁에 있었다. 이찬(伊飡) 능환(能奐)이 사람을 강주와 무주에 보내서 양검 등과 모의했다. 청태(淸泰) 2년 을미(乙未; 935) 3월에 이들은 영순(英順) 등과 함께 신검을 권해서 견훤을 금산(金山) 불당(佛堂)에 가두고 사람을 보내서 금강을 죽이고 신검이 자칭 대왕이라 하고 나라 안의 모든 죄수들을 사면(赦免)해 주었다”고 한다.
처음에 견훤이 아직 잠자리에서 일어나기 전에 멀리 대궐 뜰에서 고함치는 소리가 들리므로 이게 무슨 소리냐고 묻자 신검이 아버지에게 아뢰었다. “왕께서는 늙으시어 군국(軍國)의 정사(政事)에 어두우시므로 장자(長子) 신검이 부왕(父王)의 자리를 대신하게 되었다고 해서 여러 장수들이 기뻐하는 소리입니다.” 조금 후에 아버지를 금산사(金山寺) 불당(佛堂)으로 옮기고 파달(巴達) 등 30 명의 장사(壯士)를 시켜서 지키게 하니, 동요(童謠)에 이렇게 말했다.
가엾은 완산(完山) 아이
아비를 잃어 울고 있네.
당시 견훤은 후궁과 나이 어린 남녀 두 명, 시비(侍婢) 고비녀(古比女), 나인(內人) 능예남(能乂男) 등과 함께 갇혀 있었다. 그러다가 4월에 이르러 견훤은 술을 빚은 뒤에 지키는 장사 30명에게 먹여 취하게 하고는 고려로 도망해 왔다. 이에 태조는 소원보향예(小元甫香乂)·오염(吳琰)·충질(忠質) 등을 보내서 수로(水路)로 가서 맞아오게 했다. 고려에 이르자 태조는 견훤의 나이가 10년 위라고 하여 높여서 상부(尙父)라 하여 남궁(南宮)에 편안히 있게 하고 양주(楊洲)의 식읍(食邑)·전장(田莊)과 노비 40명, 말 아홉 필을 주고, 먼저 항복해 와 있는 신강(信康)으로 아전(衙前)을 삼았다. 견훤의 사위 장군 영규(英規)가 비밀히 그 아내에게 말했다. “대왕께서 나라를 위해서 애쓰신 지 40여 년에 공업(功業)이 거의 이루어지려 하는데 하루아침에 집안 사람의 화(禍)로 나라를 잃고 고려에 따르니, 대체로 정녀(貞女)는 두 남편을 모시지 않고 충신(忠臣)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 법이오. 만일 내 임금을 버리고 반역한 아들[神劍]을 섬긴다면 무슨 낯으로 천하의 의사(義士)들을 본단 말이오. 더구나 고려의 왕공(王公)은 인후근검(仁厚勤儉)하여 민심을 얻었다 하니 이는 아마 하늘의 계시(啓示)로, 필경 삼한(三韓)의 임금이 될 것이니 어찌 글을 올려 우리 임금을 위안하고, 겸해서 왕공에게 은근히 하여 뒷날의 복을 도모하지 않겠소?” 그 아내가 말했다. “당신의 말씀이 바로 저의 뜻입니다.” 이에 천복(天福) 원년(元年) 병신(丙申; 936) 2월에 사람을 보내서 태조에게 자기의 뜻을 말했다. “왕께서 의기(義旗)를 드시면 저는 내응(內應)하여 고려 군사를 맞이하겠습니다.” 태조는 기뻐하여 사자에게 예물을 후히 주어 보내고 영규에게 치사했다. “만일 그대의 은혜를 입어 한번 합세해서 길에서 막히는 일이 없게 한다면 곧 먼저 장군께 뵙고, 다음에 올라 부인께 절하여, 형으로 섬기고 누님으로 받들어 반드시 끝까지 후하게 보답하겠소. 천지와 귀신은 모두 이 말을 들을 것이오.” 6월에 견훤이 태조에게 말했다. “노신(老臣)이 전하께 항복해 온 것은 전하의 위엄을 빌어 반역한 자식을 죽이기 위한 것이니 엎드려 바라건대 대왕은 신병(神兵)을 빌어 적자난신(賊子亂臣)을 죽이시면 신이 비록 죽어도 유감이 없겠습니다.” 태조가 말했다. “그들을 치지 않으려는 것이 아니라 그 때를 기다리는 것이오.” 이에 먼저 태자 무(武)와 장군 술희(述希)에게 보병(步兵)과 기병(騎兵) 10만을 거느려 천안부(天安府)로 나가게 하고, 9월에 태조는 삼군(三軍)을 거느리고 천안(天安)에 이르러 군사를 합하여 일선군(一善郡)으로 진격해 나가니 신검이 군사를 거느리고 막았다. 갑오일(甲午日)에 일리천(一利川)을 사이에 두고 서로 대치하니 고려 군사는 동북방을 등지고 서남쪽을 향해 진을 쳤다. 태조는 견훤과 함께 군대를 사열하는데, 갑자기 칼과 창 같은 흰 구름이 일어나 적군(敵軍)을 향해 가므로 북을 치고 나가자 후백제의 장군 효봉(孝奉)·덕술(德述)·애술(哀述)·명길(明吉) 등은 고려 군사의 형세가 크고 정돈된 것을 바라보고 갑옷을 버리고 진 앞에 나와 항복했다. 태조는 이를 위로하고 장수가 있는 곳을 물으니 효봉 등은 말한다. “원수(元帥) 신검(神劍)은 중군(中軍)에 있습니다.” 태조는 장군 공훤(公萱) 등에게 명하여 삼군을 일시에 진군시켜 협격(挾擊)하니 백제군은 무너져 달아났다. 황산(黃山) 탄현(炭峴)에 이르자 신검은 두 아우와 장군 부달(富達)·능환(能奐) 등 40여 명과 함께 항복했다. 태조는 항복을 받고 나머지는 모두 위로하여 처자(妻子)와 함께 서울로 돌아가도록 허락했다. 태조가 능환(能奐)에게 물었다. “처음에 양검 등과 비밀히 모의하여 대왕을 가두고 그 아들을 세운 것은 네 꾀이니, 신하된 의리(義理)에 이래야 마땅하단 말이냐.” 능환은 머리를 숙이고 말을 하지 못한다. 태조는 명하여 이를 베어라 했다. 신검이 참람되이 왕위를 빼앗은 것은 남의 위협으로, 그의 본심이 아니었으며 또 항복하여 죄를 빌어 특히 그 죽음을 용서하였더니, 견훤은 분하게 여겨 등창이 나서 수일만에 황산(黃山) 불사(佛舍)에서 죽으니 때는 9월 8일이고 나이는 70이었다.
태조는 군령(軍令)은 엄하고 분명해서 군사들이 조금도 범하지 않아 주현(州縣)이 편안하여 늙은이와 어린이가 모두 만세를 불렀다. 태조는 영규(英規)에게, “전왕(前王)이 나라를 잃은 후에 그의 신하된 사람으로서 한 사람도 위로해 주는 이가 없었는데 오직 경(卿)의 내외만이 천리 밖에서 글을 보내서 성의를 보였고, 겸해서 아름다운 명예를 나에게 돌렸으니 그 의리를 잊을 수 없소.”하고 좌승(左承)이란 벼슬과 밭 1,000경(頃)을 내리고, 역마(驛馬) 35필을 빌려 주어 가족들을 맞게 했으며 그 두 아들에게도 벼슬을 주었다.
견훤은 당나라 경복(景福) 원년(元年; 892)에 나라를 세워 진(晉)나라 천복(天福) 원년(元年; 936)에 이르니, 45년 만인 병신(丙申)년에 망했다.
<사론(史論)>에 이렇게 말했다. “신라는 운수가 다하고 올바른 도리를 잃어 하늘이 돕지 않고 백성이 돌아갈 곳이 없이 되었다. 이에 뭇 도둑이 틈을 타서 일어나서 마치 고슴도치의 털과 같았다. 그 중에서도 강한 도둑은 궁예(弓裔)와 견훤(甄萱) 두 사람이었다. 궁예는 본래 신라의 왕자로서 도리어 제 나라를 원수로 삼아 심지어는 선조의 화상(畵像)을 칼로 베었으니 그 어질지 않은 것이 너무 심했다. 견훤은 신라의 백성으로 태어나서 신라의 녹을 먹으면서 화심(禍心)을 품어 나라의 위태로움을 기화로 신라의 도읍을 쳐서 임금과 신하를 마치 짐승처럼 죽였으니 참으로 천하의 원흉(元兇)이다. 때문에 궁예는 그 신하에게서 버림을 당했고, 견훤은 그 아들에게서 화(禍)가 생겼으니 모두 스스로 취한 것인데 누구를 원망한단 말인가. 비록 항우(項羽)·이밀(李密)의 뛰어난 재주로도 한(漢)과 당(唐)이 일어나는 것을 대적하지 못했거늘, 하물며 궁예와 견훤 같은 흉한 자들이 어찌 우리 태조를 대항할 수 있었으랴.
가락국기(駕洛國記; 고려高麗 문종조文宗朝 대강大康 연간年間에 김관지주사金官知州事 문인文人이 지은 것이니 그 대략을 여기에 싣는다)
천지(天地)가 처음 열린 이후로 이곳에는 아직 나라 이름이 없었다. 그리고 또 군신(君臣)의 칭호도 없었다. 이럴 때에 아도간(我刀干)·여도간(汝刀干)·피도간(彼刀干)·오도간(五刀干)·유수간(留水干)·유천간(留天干)·신천간(神天干)·오천간(五天干)·신귀간(神鬼干) 등 아홉 간(干)이 있었다. 이들 추장(酋長)들이 백성들을 통솔했으니 모두 100호(戶)로서 7만 5,000명이었다. 이 사람들은 거의 산과 들에 모여서 살았으며 우물을 파서 물을 마시고 밭을 갈아 곡식을 먹었다.
후한(後漢)의 세조(世祖) 광무제(光武帝) 건무(建武) 18년 임인(壬寅; 42) 3월 계욕일(禊浴日)에 그들이 살고 있는 북쪽 귀지(龜旨; 이것은 산봉우리를 말함이니, 마치 십붕十朋이 엎드린 모양과도 같기 때문에 이렇게 말한 것이다)에서 무엇을 부르는 이상한 소리가 났다. 백성 2, 3백 명이 여기에 모였는데 사람의 소리 같기는 하지만 그 모양이 숨기고 소리만 내서 말한다. “여기에 사람이 있느냐?” 아홉 간(干) 등이 말한다. “우리들이 있습니다.” 그러자 또 말한다. “내가 있는 곳이 어디냐.” “귀지(龜旨)입니다.” 또 말한다. “하늘이 나에게 명하기를 이곳에 나라를 새로 세우고 임금이 되라고 하였으므로 일부러 여기에 내려온 것이니, 너희들은 모름지기 산봉우리 꼭대기의 흙을 파면서 노래를 부르되 ‘거북아 거북아, 머리를 내밀라. 만일 내밀지 않으면 구워먹겠다’하고, 뛰면서 춤을 추어라. 그러면 곧 대왕을 맞이하여 기뻐 뛰놀게 될 것이다.” 구간(九干)들은 이 말을 좇아 모두 기뻐하면서 노래하고 춤추다가 얼마 안 되어 우러러 쳐다보니 다만 자줏빛 줄이 하늘에서 드리워져서 땅에 닿아 있다. 그 노끈의 끝을 찾아보니 붉은 보자기에 금으로 만든 상자가 싸여 있으므로 열어보니 해처럼 둥근 황금 알 여섯 개가 있었다. 여러 사람들은 모두 놀라고 기뻐하여 함께 백배(百拜)하고 얼마 있다가 다시 싸안고 아도간(我刀干)의 집으로 돌아와 책상 위에 놓아 두고 여러 사람은 각기 흩어졌다. 이런 지 12시간이 지나, 그 이튿날 아침에 여러 사람들이 다시 모여서 그 합을 여니 여섯 알은 화해서 어린아이가 되어 있는데 용모(容貌)가 매우 훤칠했다. 이들을 평상 위에 앉히고 여러 사람들이 절하고 하례(賀禮)하면서 극진히 공경했다. 이들은 나날이 자라서 10여 일이 지나니 키는 9척으로 은(殷)나라 천을(天乙)과 같고 얼굴은 용과 같아 한(漢)나라 고조(高祖)와 같다. 눈썹이 팔자(八字)로 채색이 나는 것은 당(唐)나라 고조(高祖)와 같고, 눈동자가 겹으로 된 것은 우(虞)나라 순(舜)과 같았다. 그가 그달 보름에 왕위(王位)에 오르니 세상에 처음 나타났다고 해서 이름을 수로(首露)라고 했다. 혹은 수릉(首陵; 수릉首陵은 죽은 후의 시호諡號다)이라고도 했다. 나라 이름을 대가락(大駕洛)이라 하고 또 가야국(伽耶國)이라고도 하니 이는 곧 여섯 가야(伽耶) 중의 하나다. 나머지 다섯 사람도 각각 가서 다섯 가야의 임금이 되니 동쪽은 황산강(黃山江), 서남쪽은 창해(滄海), 서북쪽은 지리산(地理山), 동북쪽은 가야산(伽耶山)이며 남쪽은 나라의 끝이었다. 그는 임시로 대궐을 세우게 하고 거처하면서 다만 질박(質朴)하고 검소하니 지붕에 이은 이엉을 자르지 않고, 흙으로 쌓은 계단은 겨우 3척이었다.
즉위 2년 계묘(癸卯; 43) 정월에 왕이 말하기를, "내가 서울을 정하려 한다“하고는 이내 임시 궁궐의 남쪽 신답평(新沓坪; 이는 옛날부터 묵은 밭인데 새로 경작耕作했기 때문에 신답평新畓坪이라 했다. 답자沓字는 속자俗字다)에 나가 사방의 산악(山嶽)을 바라보다가 좌우 사람을 돌아보고 말한다.
“이 땅은 협소(狹小)하기가 여뀌[蓼] 잎과 같지만 수려(秀麗)하고 기이하여 가위 16나한(羅漢)이 살 만한 곳이다. 더구나 1에서 3을 이루고 그 3에서 7을 이루니 7성(聖)이 살 곳으로 가장 적합하다. 여기에 의탁하여 강토(疆土)를 개척해서 마침내 좋은 곳을 만드는 것이 어떻겠느냐.” 여기에 1,500보(步) 둘레의 성과 궁궐(宮闕)과 전당(殿堂) 및 여러 관청의 청사(廳舍)와 무기고(武器庫)와 곡식 창고를 지을 터를 마련한 뒤에 궁궐로 돌아왔다. 두루 나라 안의 장정과 공장(工匠)들을 불러 모아서 그달 20일에 성 쌓는 일을 시작하여 3월 10일에 공사를 끝냈다. 그 궁궐(宮闕)과 옥사(屋舍)는 농사일에 바쁘지 않은 틈을 이용하니 그해 10월에 비로소 시작해서 갑진(甲辰; 44)년 2월에 완성되었다. 좋은 날을 가려서 새 궁으로 거동하여 모든 정사를 다스리고 여러 일도 부지런히 보살폈다. 이 때 갑자기 완하국(琓夏國) 함달왕(含達王)의 부인(夫人)이 아기를 배어 달이 차서 알을 낳으니, 그 알이 화해서 사람이 되어 이름을 탈해(脫解)라 했는데, 이 탈해가 바다를 좇아서 가락국에 왔다. 키가 3척이요 머리 둘레가 1척이나 되었다. 그는 기꺼이 대궐로 나가서 왕에게 말하기를, “나는 왕의 자리를 빼앗으러 왔소.”하니 왕이 대답했다. “하늘이 나를 명해서 왕위에 오르게 한 것은 장차 나라를 안정시키고 백성들을 편안케 하려 함이니, 감히 하늘의 명(命)을 어겨 왕위를 남에게 줄 수도 없고, 또 우리 국민을 너에게 맡길 수도 없다.” 탈해가 말하기를 “그렇다면 술법(術法)으로 겨뤄 보려는가?”하니 왕이 좋다고 하였다. 잠깐 동안에 탈해가 변해서 매가 되니 왕은 변해서 독수리가 되고, 또 탈해가 변해서 참새가 되니 왕은 새매로 화하는데 그 변하는 것이 조금도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탈해가 본 모양으로 돌아오자 왕도 역시 전 모양이 되었다. 이에 탈해가 엎드려 항복한다. “내가 술법을 겨루는 마당에 있어서 매가 독수리에게, 참새가 새매에게 잡히기를 면한 것은 대개 성인(聖人)께서 죽이기를 미워하는 어진 마음을 가진 때문입니다. 내가 왕과 더불어 왕위를 다툼은 실로 어려울 것입니다.” 탈해는 문득 왕께 하직하고 나가서 이웃 교외의 나루터에 이르러 중국에서 온 배가 대는 수로(水路)로 해서 갔다. 왕은 그가 머물러 있으면서 반란을 일으킬까 염려하여 급히 수군(水軍) 500척을 보내서 쫓게 하니 탈해가 계림(鷄林)의 땅 안으로 달아나므로 수군은 모두 돌아왔다. 그러나 여기에 실린 기사(記事)는 신라의 것과는 많이 다르다.
건무(建武) 24년 무신(戊申; 48) 7월 27일에 구간(九干) 등이 조회할 때 말씀드렸다. “대왕께서 강림(降臨)하신 후로 좋은 배필을 구하지 못하셨으니 신들 집에 있는 처녀 중에서 가장 예쁜 사람을 골라서 궁중에 들여보내어 대왕의 짝이 되게 하겠습니다.” 그러자 왕이 말했다. “내가 여기에 내려온 것은 하늘의 명령일진대, 나에게 짝을 지어 왕후(王后)를 삼게 하는 것도 역시 하늘의 명령이 있을 것이니 경들은 염려 말라.” 왕은 드디어 유천간(留天干)에게 명해서 경주(輕舟)와 준마(駿馬)를 가지고 망산도(望山島)에 가서 서서 기다리게 하고, 신귀간(神鬼干)에게 명하여 승점(乘岾; 망산도望山島는 서울 남쪽의 섬이요, 승점乘岾은 경기京畿 안에 있는 나라다)으로 가게 했더니 갑자기 바다 서쪽에서 붉은 빛의 돛을 단 배가 붉은 기를 휘날리면서 북쪽을 바라보고 오고 있었다. 유천간 등이 먼저 망산도에서 횃불을 올리니 사람들이 다투어 육지로 내려 뛰어오므로 신귀간은 이것을 바라보다 대궐로 달려와서 왕께 아뢰었다. 왕은 이 말을 듣고 무척 기뻐하여 이내 구간(九干) 등을 보내어 목연(木蓮)으로 만든 키를 갖추고 계수나무로 만든 노를 저어 가서 그들을 맞이하여 곧 모시고 대궐로 들어가려 하자 왕후가 말했다. “나는 본래 너희들을 모르는 터인데 어찌 감히 경솔하게 따라갈 수 있겠느냐.” 유천간 등이 돌아가서 왕후의 말을 전달하니 왕은 옳게 여겨 유사(有司)를 데리고 행차해서, 대궐 아래에서 서남쪽으로 60보쯤 되는 산기슭에 장막을 쳐서 임시 궁전을 만들어 놓고 기다렸다. 왕후는 산 밖의 별포(別浦) 나루터에 배를 대고 육지에 올라 높은 언덕에서 쉬고, 입은 비단바지를 벗어 산신령(山神靈)에게 폐백으로 바쳤다. 이 밖에 대종(待從)한 잉신(媵臣) 두 사람의 이름은 신보(申輔)·조광(趙匡)이고, 그들의 아내 두 사람의 이름은 모정(慕貞)·모량(慕良)이라고 했으며, 데리고 온 노비까지 합해서 20여 명인데, 가지고 온 금수능라(錦繡綾羅)와 의상필단(衣裳疋緞)·금은주옥(金銀珠玉)과 구슬로 만든 패물들은 이루 기록할 수 없을 만큼 많았다. 왕후가 점점 왕이 계신 곳에 가까워 오니 왕은 나아가 맞아서 함께 장막 궁전으로 들어왔다. 잉신(媵臣) 이하 여러 사람들은 뜰 아래에서 뵙고 즉시 물러갔다. 왕은 유사(有司)에게 명하여 잉신 내외들을 안내하게 하고 말했다.
“사람마다 방 하나씩을 주어 편안히 머무르게 하고 그 이하 노비들은 한 방에 5,6명씩 두어 편안히 있게 하라.” 말을 마치고 난초로 만든 마실 것과 혜초(蕙草)로 만든 술을 주고, 무늬와 채색이 있는 자리에서 자게 하고, 심지어 옷과 비단과 보화까지도 주고 군인들을 많이 내어 보호하게 했다. 이에 왕이 왕후와 함께 침전(寢殿)에 드니 왕후가 조용히 왕에게 말한다. “저는 아유타국(阿踰陁國)의 공주인데, 성(姓)은 허(許)이고 이름은 황옥(黃玉)이며 나이는 16세입니다. 본국에 있을 때 금년 5월에 부왕과 모후(母后)께서 저에게 말씀하시기를, ‘우리가 어젯밤 꿈에 함께 하늘의 상제(上帝)를 뵈었는데, 상제께서는, 가락국의 왕 수로(首露)를 하늘이 내려보내서 왕위에 오르게 하였으니 신령스럽고 성스러운 사람이다. 또 나라를 새로 다스리는 데 있어 아직 배필을 정하지 못했으니 경들은 공주를 보내서 그 배필을 삼게 하라 하시고, 말을 마치자 하늘로 올라가셨다. 꿈을 깬 뒤에도 상제의 말이 아직도 귓가에 그대로 남아 있으니, 너는 이 자리에서 곧 부모를 작별하고 그곳으로 떠나라’하셨습니다. 이에 저는 배를 타고 멀리 증조(蒸棗)를 찾고, 하늘로 가서 반도(蟠桃)를 찾아 이제 모양을 가다듬고 감히 용안(龍顔)을 가까이하게 되었습니다.” 왕이 대답했다. “나는 나면서부터 성스러워서 공주가 멀리 올 것을 미리 알고 있어서 신하들의 왕비를 맞으라는 청을 따르지 않았소. 그런데 이제 현숙한 공주가 스스로 오셨으니 이 몸에는 매우 다행한 일이오.” 왕은 드디어 그와 혼인해서 함께 두 밤을 지내고 또 하루 낮을 지냈다. 이에 그들이 타고 온 배를 돌려보내는 데 뱃사공이 모두 15명이라 이들에게 각각 살 10석과 베 30필씩을 주어 본국으로 돌아가게 했다.
8월 1일에 왕은 대궐로 돌아오는데 왕후와 한 수레를 타고, 잉신 내외도 역시 나란히 수레를 탔으며, 중국에서 나는 여러 가지 물건도 모두 수레에 싣고 천천히 대궐로 들어오니 이때 시간은 오정(午正)이 가까웠다. 왕후는 중궁(中宮)에 거처하고 잉신 내외와 그들의 사속(私屬)들은 비어 있는 두 집에 나누어 들게 하고, 나머지 따라온 자들도 20여 칸 되는 빈관(賓館) 한 채를 주어서 사람 수에 맞추어 구별해서 편안히 있게 했다. 그리고 날마다 물건을 풍부하게 주고, 그들이 싣고 온 보배로운 물건들은 내고(內庫)에 두어서 왕후의 사시(四時) 비용으로 쓰게 했다. 어느날 왕이 신하들에게 말했다. “구간(九干)들은 여러 관리의 어른인데, 그 지위와 명칭이 모두 소인(小人)이나 농부들의 칭호이니 이것은 벼슬 높은 사람의 명칭이 못된다. 만일 외국사람들이 듣는다면 반드시 웃음거리가 될 것이다.”
이리하여 아도(我刀)를 고쳐서 아궁(我躬)이라 하고, 여도(汝刀)를 고쳐서 여해(汝諧), 피도(彼刀)를 피장(彼藏), 오도(五刀)를 오상(五常)이라 하고, 유수(留水)와 유천(留天)의 이름은 윗 글자는 그대로 두고 아래 글자만 고쳐서 유공(留功)·유덕(留德)이라 하고 신천(神天)을 고쳐서 신도(神道), 오천(五天)을 고쳐서 오능(五能)이라 했다. 신귀(神鬼)의 음(音)은 바꾸지 않고 그 훈(訓)만 신귀(臣貴)라고 고쳤다. 또 계림(鷄林)의 직제(職制)를 취해서 각간(角干)·아질간(阿叱干)·급간(級干)의 품계를 두고, 그 아래의 관리는 주(周)나라 법과 한(漢)나라 제도를 가지고 나누어 정하니 이것은 옛것을 고쳐서 새것을 취하고, 관직(官職)을 나누어 설치하는 방법이다. 이에 비로소 나라를 다스리고 집을 정돈하며, 백성들을 자식처럼 사랑하니 그 교화(敎化)는 엄숙하지 않아도 위엄이 서고, 그 정치는 엄하지 않아도 다스려졌다. 더구나 왕이 왕후와 함께 사는 것은 마치 하늘에게 땅이 있고, 해에게 달이 있고, 양(陽)에게 음(陰)이 있는 것과 같았으며 그 공은 도산(塗山)이 하(夏)를 돕고, 당원(唐媛)이 교씨(嬌氏)를 일으킨 것과 같았다. 그 해에 왕후는 곰을 얻는 꿈을 꾸고 태자 거등공(居登公)을 낳았다.
영제(靈帝) 중평(中平) 6년 기사(己巳; 189) 3월 1일에 왕후가 죽으니 나이는 157세였다. 온 나라 사람들은 땅이 꺼진 듯이 슬퍼하여 귀지봉(龜旨峰) 동북 언덕에 장사하고, 왕후가 백성들을 자식처럼 사랑하던 은혜를 잊지 않으려 하여 처음 배에서 내리던 도두촌(渡頭村)을 주포촌(主浦村)이라 하고, 비단바지를 벗은 높은 언덕을 능현(綾峴)이라 하고, 붉은 기가 들어온 바닷가를 기출변(旗出邊)이라고 했다.
잉신(媵臣) 천부경(泉府卿) 신보(申輔)와 종정감(宗正監) 조광(趙匡) 등은 이 나라에 온 지 30년 만에 각각 두 딸을 낳았는데 그들 내외는 12년을 지나 모두 죽었다. 그 밖의 노비의 무리들도 이 나라에 온 지 7,8년이 되는데도 자식을 낳지 못했으며, 오직 고향을 그리워하는 슬픔을 품고 모두 죽었으므로, 그들이 거처하던 빈관(賓館)은 텅 비고 아무도 없었다.
왕후가 죽자 왕은 매양 외로운 베개를 의지하여 몹시 슬퍼하다가 10년을 지난 헌제(獻帝) 입안(立安) 4년 기묘(己卯; 199) 3월 23일에 죽으니, 나이는 158세였다. 나라 사람들은 마치 부모를 잃은 듯 슬퍼하여 왕후가 죽던 때보다 더했다. 대궐 동북쪽 평지에 빈궁(殯宮)을 세우니 높이가 한 길이면 둘레가 300보(步)인데 거기에 장사 지내고 이름을 수릉왕묘(首陵王廟)라고 했다.
그의 아들 거등왕(居登王)으로부터 9대손인 구충왕(仇衝王)까지 이 사당에 배향(配享)하고, 매년 정월(正月) 3일과 7일, 5월 5일과 8월 5일과 15일에 푸짐하고 깨끗한 제물을 차려 제사를 지내어 대대로 끊이지 않았다.
신라 제30대 법민왕(法敏王) 용삭(龍朔) 원년 신유(辛酉; 661) 3월에 왕은 조서를 내렸다. “가야국(伽耶國) 시조(始祖)의 9대손 구형왕(仇衡王)이 이 나라에 항복할 때 데리고 온 아들 세종(世宗)의 아들인 솔우공(率友公)의 아들 서운잡간(庶云匝干)의 딸 문명황후(文明皇后)께서 나를 낳으셨으니, 시조 수로왕은 어린 나에게 15대조가 된다. 그 나라는 이미 없어졌지만 그를 장사지낸 사당은 지금도 남아 있으니 종묘(宗廟)에 합해서 계속하여 제사를 지내게 하리라.” 이에 그 옛 터에 사자(使者)를 보내서 사당에 가까운 상전(上田) 30경(頃) 공영(供營)의 자(資)로 하여 왕위전(王位田)이라 부르고 본토(本土)에 소속시키니, 수로왕의 17대손 갱세급간(賡世級干)이 조정의 뜻을 받들어 그 밭을 주관하여 해마다 명절이면 술과 단술을 마련하고 떡과 밥·차·과실 등 여러 가지를 갖추고, 제사를 지내어 해마다 끊이지 않게 하고, 그 제삿날은 거등왕이 정한 연중(年中) 5일을 변동하지 않으니, 이에 비로소 그 정성어린 제사는 우리 가락국에 맡겨졌다. 거등왕이 즉위한 기묘(己卯; 199)에 편방(便房)을 설치한 뒤로부터 구형왕(仇衡王) 말년에 이르는 330년 동안에 사당에 지내는 제사는 길이 변함이 없었으나 구형왕이 왕위를 잃고 나라를 떠난 후부터 용삭(龍朔) 원년 신유(辛酉; 661)에 이르는 60년 사이에는 이 사당에 지내는 제사를 가끔 빠뜨리기도 했다. 아름답도다, 문무왕(文武王; 법민왕法敏王의 시호)이여! 먼저 조상을 받들어 끊어졌던 제사를 다시 지냈으니 효성스럽고 또 효성스럽도다.
신라 말년에 충지잡간(忠至匝干)이란 자가 있었는데 높은 금관성(金官城)을 쳐서 빼앗아 성주장군(城主將軍)이 되었다. 이에 영규아간(英規阿干)이 장군의 위엄을 빌어 묘향(廟享)을 빼앗아 함부로 제사를 지내더니, 단오(端午)를 맞아 고사(告祠)하는데 공연히 대들보가 부러져 깔려죽었다. 이에 장군(將軍)이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다행히 전세(前世)의 인연으로 해서 외람되이 성왕(聖王)이 계시던 국성(國城)에 제사를 지내게 되었으니 마땅히 나는 그 영정(影幀)을 그려 모시고 향(香)과 등(燈)을 바쳐 신하된 은혜를 갚아야겠다.”하고, 삼척(三尺) 교견(鮫絹)에 진영(眞影)을 그려 벽 위에 모시고 아침 저녁으로 촛불을 켜 놓고 공손히 받들더니, 겨우 3일 만에 진영의 두 눈에서 피눈물이 흘러서 땅 위에 괴어 거의 한 말이나 되었다. 장군은 몹시 두려워하여 그 진영을 모시고 사당으로 나가서 불태워 없애고 곧 수로왕의 친자손 규림(圭林)을 불러서 말했다. “어제는 상서롭지 못한 일이 있었는데 어찌해서 이런 일들이 거듭 생기는 것일까? 이는 필시 사당의 위령(威靈)이 내가 진영을 그려서 모시는 것을 불손(不遜)하게 여겨 크게 노하신 것인가보다. 영규(英規)가 이미 죽었으므로 나는 몹시 두려워하여, 화상도 이미 불살라 버렸으니 반드시 신(神)의 베임을 받을 것이다. 그대는 왕의 진손(眞孫)이니 전에 하던 대로 제사를 받드는 것이 옳겠다.” 규림이 대를 이어 제사를 지내 오다가 나이 88세에 죽으니 그 아들 간원경(間元卿)이 계속해서 제사를 지내는데 단오날 알묘제(謁廟祭) 때 영규의 아들 준필(俊必)이 또 발광(發狂)하여, 사당으로 와서 간원(間元)이 차려 놓은 제물을 치우고 자기가 제물을 차려 제사를 지내는데 삼헌(三獻)이 끝나지 못해서 갑자기 병이 생겨서 집에 돌아가서 죽었다. 옛 사람의 말에 이런 것이 있다. “음사(淫祀)는 복(福)이 없을 뿐 아니라 도리어 재앙을 받는다.” 먼저는 영규가 있고 이번에는 준필이 있으니 이들 부자(父子)를 두고 한 말인가.
또 도둑의 무리들이 사당 안에 금과 옥이 많이 있다고 해서 와서 그것을 도둑질해 가려고 했다. 그들이 처음에 왔을 때는, 몸에 갑옷을 입고 투구를 쓰고 활에 살을 당긴 한 용사가 사당 안에서 나오더니 사면을 향해서 비오듯이 화살을 쏘아서 7,8명이 맞아 죽으니, 나머지 도둑의 무리들은 달아나 버렸다. 며칠 후에 다시 오자 길이 30여 척이나 되는 눈빛이 번개와 같은 큰 구렁이가 사당 옆에서 나와 8,9명을 물어 죽이니 겨우 살아 남은 자들도 모두 자빠지면서 도망해 흩어졌다. 그리하여 능원(陵園) 안에는 반드시 신물(神物)이 있어 보호한다는 것을 알았다.
건안(建安) 4년 기묘(己卯; 199)에 처음 이 사당을 세운 때부터 지금 임금께서 즉위하신 지 31년 만인 대강(大康) 2년 병진(丙辰; 1076)까지 도합 878년이 되었으나 층계를 쌓아 올린 아름다운 흙이 허물어지거나 무너지지 않았고, 심어 놓은 아름다운 나무도 시들거나 죽지 않았으며, 더구나 거기에 벌여 놓은 수많은 옥조각들도 부서진 것이 없다. 이것으로 본다면 신체부(辛替否)가 말한 “옛날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어찌 망하지 않은 나라와 파괴되지 않은 무덤이 있겠느냐.”고 한 말은, 오직 가락국(駕洛國)이 옛날에 일찍이 망한 것은 그 말이 맞았지만 수로왕(首露王)의 사당이 허물어지지 않은 것은 신체부(辛替否)의 말을 믿을 수 없다 하겠다.
이 중에 또 수로왕을 사모해서 하는 놀이가 있다. 매년 7월 29일엔 이 지방 사람들과 서리(胥吏)·군졸(軍卒)들이 승점(乘岾)에 올라가서 장막을 치고 술과 음식을 먹으면서 즐겁게 논다. 이들이 동서쪽으로 서로 눈짓을 하면 건장한 인부들은 좌우로 나뉘어서 망산도(望山島)에서 말발굽을 급히 육지를 향해 달리고 뱃머리를 둥둥 띄워 물 위로 서로 밀면서 북쪽 고포(古浦)를 향해서 다투어 달리니, 이것은 대개 옛날에 유천간(留天干)과 신귀간(神鬼干) 등이 왕후가 오는 것을 바라보고 급히 수로왕에게 아뢰던 옛 자취이다.
가락국이 망한 뒤로는 대대로 그 칭호가 한결같지 않았다. 신라 제31대 정명왕(政明王; 신문왕神文王)이 즉위한 개요(開耀) 원년 신사(辛巳; 681)에는 금관경(金官京)이라 이름하고 태수(太守)를 두었다. 그 후 259년에 우리 고려 태조(太祖)가 통합(統合)한 뒤로는 여러 대를 내려오면서 임해현(臨海縣)이라 하고 배안사(排岸使)를 두어 48년을 계속했으며, 다음에는 임해군(臨海郡) 혹은 김해부(金海府)라고 하고 도호부(都護府)를 두어 27년을 계속했으며, 또 방어사(防禦使)를 두어 64년 동안 계속했다.
순화(淳化) 2년(991)에 김해부(金海府)의 양전사(量田使) 중대부(中大夫) 조문선(趙文善)은 조사해서 보고했다. “수로왕의 능묘(陵廟)에 소속된 밭의 면적이 많으니 마땅히 15결(結)을 가지고 전대로 제사를 지내게 하고, 그 나머지는 부(府)의 역정(役丁)들에게 나누어 주는 것이 좋겠습니다.” 이 일을 맡은 관청에서 그 장계(狀啓)를 가지고 가서 보고하자, 그때 조정에서는 명령을 내렸다. “하늘에서 내려온 알이 화해서 성군(聖君)이 되었고 이내 왕위(王位)에 올라 나이 158세나 되셨으니 자 삼황(三皇) 이후로 이에 견줄 만한 분이 드물다. 수로왕께서 붕(崩)한 뒤 선대(先代)부터 능묘(陵廟)에 소속된 전답을 지금에 와서 줄인다는 것은 참으로 두려운 일이다.”하고는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양전사(量田使)가 또 거듭 아뢰자 조정에서도 이를 옳게 여겨 그 반은 능묘에서 옮기지 않고, 반은 그곳의 역정(役丁)에게 나누어 주게 했다. 절사(節使; 양전사量田使)는 조정의 명을 받아 이에 그 반은 능원(陵園)에 소속시키고 반은 부(府)의 부역하는 호정(戶丁)에게 주었다. 이 일이 거의 끝날 무렵에 양전사(量田使)가 몹시 피곤하더니 어느날 밤에 꿈을 꾸니 7,8명의 귀신이 보이는데 밧줄을 가지고 칼을 쥐고 와서 말한다. “너에게 큰 죄가 있어 목베어 죽여야겠다. 양전사는 형(刑)을 받고 몹시 아파하다가 놀라서 깨어 이내 병이 들었는데 남에게 알리지도 못하고 밤에 도망해 가다가 그 병이 낫지 않아서 관문(關門)을 지나자 죽었다. 이 때문에 양전도장(量田都帳)에는 그의 도장이 찍히지 않았다. 그 뒤에 사신이 와서 그 밭을 검사해 보니 겨우 11결(結) 12부(負) 9속(束)뿐이며 3결(結) 87부(負) 1속(束)이 모자랐다. 이에 모자라는 밭을 어찌했는가를 조사해서 내외궁(內外宮)에 보고하여, 임금의 명령으로 그 부족한 것을 채워 주게 했는데 이 때문에 고금(古今)의 일을 탄식하는 사람이 있었다.
수로왕(首露王)의 8대손 김질왕(金銍王)은 정치에 부지런하고 또 참된 일을 매우 숭상하여 시조모(始祖母) 허황후(許皇后)를 위해서 그의 명복(冥福)을 빌고자 했다. 이에 원가(元嘉) 29년 임진(壬辰; 452)에 수로왕과 허황후가 혼인하던 곳에 절을 세워 절 이름을 왕후사(王后寺)라 하고 사자(使者)를 보내어 절 근처에 있는 평전(平田) 10결(結)을 측량해서 삼보(三寶)를 공양하는 비용으로 쓰게 했다.
이 절이 생긴 지 500년 후에 장유사(長遊寺)를 세웠는데, 이 절에 바친 밭이 도합 300결(結)이나 되었다. 이에 장유사의 삼강(三綱)이, 왕후사(王后寺)가 장유사의 밭 동남쪽 지역 안에 있다고 해서 왕후사를 폐해서 장사(莊舍)를 만들어 가을에 곡식을 거두어 겨울에 저장하는 장소와 말을 기르고 소를 치는 마구간으로 만들었으니 슬픈 일이다.
세조(世祖) 이하 9대손의 역수(曆數)를 아래에 자세히 기록하니 그 명(銘)은 이러하다.
처음에 천지가 열리니, 이안(利眼)이 비로소 밝았네.
비록 인륜(人倫)은 생겼지만, 임금의 지위는 아직 이루지 않았네.
중국은 여러 대를 거듭했지만, 동국(東國)은 서울이 갈렸네.
계림(鷄林)이 먼저 정해지고, 가락국(駕洛國)이 뒤에 경영(經營)되었네.
스스로 맡아 다스릴 사람 없으면, 누가 백성을 보살피랴.
드디어 상제(上帝)께서, 저 창생(蒼生)을 돌봐 주었네.
여기 부명(符命)을 주어, 특별히 정령(精靈)을 보내셨네.
산 속에 알을 내려보내고 안개 속에 모습을 감추었네.
속은 오히려 아득하고, 겉도 역시 컴컴했네.
바라보면 형상이 없는 듯 하나 들으니 여기 소리가 나네.
무리들은 노래 불러 아뢰고, 춤을 추어 바치네.
7일이 지난 후에, 한때 안정되었네.
바람이 불어 구름이 걷히니, 푸른 하늘이 텅 비었네.
여섯 개 둥근 알이 내려오니, 한 오리 자줏빛 끈이 드리웠네.
낯선 이상한 땅에, 집과 집이 연이었네.
구경하는 사람 줄지었고, 바라보는 사람 우글거리네.
다섯은 각 고을로 돌아가고, 하나는 이 성에 있었네.
같은 때 같은 자취는, 아우와 같고 형과 같았네.
실로 하늘이 덕을 낳아서, 세상을 위해 질서를 만들었네.
왕위(王位)에 처음 오르니, 온 세상은 맑아지려 했네.
궁전 구조는 옛법을 따랐고, 토계(土階)는 오히려 평평했네.
만기(萬機)를 비로소 힘쓰고, 모든 정치를 시행했네.
기울지도 치우치지도 않으니, 오직 하나이고 오직 정밀했네.
길 가는 자는 길을 양보하고, 농사짓는 자는 밭을 양보했네.
사방은 모두 안정해지고, 만백성은 태평을 맞이했네.
갑자기 풀잎의 이슬처럼, 대춘(大椿)의 나이를 보전하지 못했네.
천지의 기운이 변하고 조야(朝野)가 모두 슬퍼했네.
금과 같은 그의 발자취요, 옥과 같이 떨친 그 이름일세.
후손이 끊어지지 않으니, 사당의 제사가 오직 향기로웠네.
세월을 비록 흘러갔지만, 규범(規範)은 기울어지지 않았네.
거등왕(居登王)
아버지는 수로왕(首露王), 어머니는 허황후(許皇后). 건안(建安) 4년 기묘(己卯; 199) 3월 13일에 즉위(卽位), 치세(治世)는 39년으로 가평(嘉平) 5년 계유(癸酉; 253) 9월 17일에 죽음. 왕비(王妃)는 천부경(泉府卿) 신보(申輔)의 딸 모정(慕貞)이며 태자(太子) 마품(麻品)을 낳음. <개황력(開皇曆)>에는 “성(姓)은 김씨(金氏)이니 대개 시조(始祖)가 금란(金卵)에서 난 까닭으로 김으로 성을 삼았다.”고 했음.
마품왕(麻品王)
마품(馬品)이라고도 하며, 김씨(金氏). 가평(嘉平) 5년 계유(癸酉; 253)에 즉위. 치세(治世)는 39년으로, 영평(永平) 원년 신해(辛亥; 291) 1월 29일에 죽음. 왕비(王妃)는 종정감(宗正監) 조광(趙匡)의 손녀(孫女) 호구(好仇)로 태자(太子) 거질미(居叱彌)를 낳음.
거질미왕(居叱彌王)
금물(今勿)이라고도 하며 김씨(金氏). 영평(永平) 원년에 즉위. 치세 56년, 영화(永和) 2년 병오(丙午; 346) 7월 7일에 죽음. 왕비는 아궁아간(阿躬阿干)의 손녀 아지(阿志)로, 왕자(王子) 이시품(伊尸品)을 낳음.
이시품왕(伊尸品王)
김씨(金氏). 영화(永和) 2년에 즉위. 치세는 62년, 의희(義熙) 3년 정미(丁未; 407) 4월 10일에 죽음. 왕비는 사농경(司農卿) 극충(克忠)의 딸 정신(貞信)으로, 왕자 좌지(坐知)를 낳음.
좌지왕(坐知王)
김질(金叱)이라고도 함. 의희(義熙) 3년(407)에 즉위. 용녀(傭女)에게 장가들어 그 여자의 무리를 관리로 등용하니 국내가 시끄러웠다. 계림(鷄林)이 꾀를 써서 치려 하므로, 박원도(朴元道)라는 신하가 간했다. “유초(遺草)를 보고 또 보아도 역시 털이 나는 법인데 하물며 사람에 있어서이겠습니까. 하늘이 망하고 땅이 꺼지면 사람이 어느 곳에서 보전하오리까. 또 점쟁이가 점을 쳐서 해괘(解卦)를 얻었는데 그 괘사(卦辭)에 ‘소인(小人)을 없애면 군자(君子)가 와서 도울 것이다’했으니 왕께선 역(易)의 괘를 살피시옵소서.” 이에 왕은 사과하여 옳다고 하고 용녀를 내쳐서 하산도(荷山島)로 귀양보내고, 정치를 고쳐 행하여 길이 백성을 편안하게 다스렸다. 치세는 15년으로, 영초(永初) 2년 신유(辛酉; 421) 4월 12일에 죽음. 왕비는 도령대아간(道寧大阿干)의 딸 복수(福壽)로, 아들 취희(吹希)를 낳음.
취희왕(吹希王)
질가(叱嘉)라고도 함. 김씨(金氏). 영초(永初) 2년에 즉위. 치세는 31년 동안, 원가(元嘉) 28년 신묘(辛卯; 451) 2월 3일에 죽음. 왕비는 진사각간(進思角干)의 딸 인덕(仁德). 왕자(王子) 질지(銍知)를 낳음.
질지왕(銍知王)
김질왕(金銍王)이라고도 함. 원가(元嘉) 28년에 즉위. 이듬해에 시조(始祖)와 허황옥 왕후(許黃玉王后)의 명복(冥福)을 빌기 위하여 처음 시조(始祖)와 만났던 자리에 절을 지어 왕후사(王后寺)라 하고 밭 10결(結)을 바쳐 비용에 쓰게 함. 치세는 42년. 영명(永明) 10년 임신(壬申; 492) 10월 4일에 죽음. 왕비는 김상사간(金相沙干)의 딸 방원(邦媛). 왕자 겸지(鉗知)를 낳음.
겸지왕(鉗知王)
김겸왕(金鉗王)이라고도 함. 영명(永明) 10년에 즉위. 치세 30년, 정광(正光) 2년 신축(辛丑; 521) 4월 7일에 죽음. 왕비는 출충각간(出忠角干)의 딸 숙(淑). 왕자 구형(仇衡)을 낳음.
구형왕(仇衡王)
김씨(金氏). 정광(正光) 2년에 즉위. 치세는 42년. 보정(保定) 2년 임오(壬午; 562) 9월에 신라 제24대 진흥왕(眞興王)이 군사를 일으켜 쳐들어오니 왕은 친히 군사를 지휘했다. 그러나 적병의 수는 많고 이쪽은 적어서 대전(對戰)할 수가 없었다. 이에 동기(同氣) 탈지이질금(脫知尒叱今)을 보내서 본국에 머물러 있게 하고, 왕자와 장손(長孫) 졸지공(卒支公) 등은 항복하여 신라에 들어갔다. 왕비는 분질수이질(分叱水尒叱)의 딸 계화(桂花)로, 세 아들을 낳으니, 첫째는 세종각간(世宗角干), 둘째는 무도각간(茂刀角干), 셋째는 무득각간(茂得角干)이다. <개황록(開皇錄)>에 보면, “양(梁)나라 무제(武帝) 중대통(中大通) 4년 임자(壬子; 532)에 신라에 항복했다.”고 했다.
논평해 말한다. <삼국사(三國史)>를 상고하건대 구형왕(仇衡王)은 양(梁)의 무제(武帝) 중대통(中大通) 4년 임자(壬子)에 땅을 바쳐 신라에 항복했다고 한다. 그렇다면 수로왕(首露王)이 처음 즉위한 동한(東漢)의 건무(建武) 18년 임인(壬寅; 42)으로부터 구형왕 말년 임자(壬子; 532)까지를 계산하면 490년이 된다. 만일 이 기록으로 상고한다면 땅을 바친 것은 원위(元魏) 보정(保定) 2년 임오(壬午; 562)에 해당된다. 그러면 30년을 더하게 되어 도합 520년이 되는 셈이다. 여기에는 두 가지 설(說)을 모두 기록해 둔다.
삼국유사(현대문) (2009-03-29 23:35:09에 MinsooKim가(이) 마지막으로 수정)-직지프로젝트 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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