東京明期月良 夜入伊遊行如可
入良沙寢矣見昆脚烏伊四是良羅
二 隱吾下於叱古二 隱誰支下焉古
本矣吾下是如馬於隱 奪叱良乙何如爲理古
셔블 발기 다래 밤드리 노니다가
드러자 자리 보곤 가라리 네히어라
둘흔 내해엇고 둘흔 뉘해언고
본대 내해다마난 아자날 엇디하릿고
서울 밝은 달에
밤 늦도록 놀며 지내다가
들어와 자리를 보니
가랑이가 넷이로구나
둘은 내(내 아내) 것이었지만
둘은 누구의 것인고 ?
본디 내 것이다만은(내 아내이지만)
빼앗긴 것을 어찌하겠는가.
(위의 한시는 이두문으로 한자의뜻과 음을 혼용하여 나타낸 글이다.)
서라벌 밝은 달밤에
밤 깊도록 놀고 지내다가
들어와 잠자리를 보니
다리가 넷이로구나
둘은 내(내 아내) 것이지마는
둘은 누구의 것인고
본디 내 것이다만은(내 아내이지만)
빼앗긴 것을 어찌하리
처용가는 신라 헌강왕 때 처용이 지은
8구체의 향가로 삼국유사에 실려 전함.
아내를 범한 역신(疫神)에게
인간으로서 분노하지 않은
처용의 행위에 감복한 역신은
"내가 공의 아내를 흠모하여 지금 잘못을 범하였는데,
노하지 않으시니 감격하여 아름답게 여기는 바입니다.
이후로는 맹세코 공의 모습을 그린 그림만 보아도
그 집에는 들어가지 않겠습니다."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나라 사람들은 처용의 형상을
문에 붙여서 사귀(邪鬼)를 쫓고 경사(慶事)를 맞는 표시로 삼았다 -불꽃카페 펌-
고려사 충혜왕조와 신우조에는 처용희를 즐겨 추었다는 기록이 전해진다.
처용무는 중요무형문화제 39호로 지정되어 있다.
왕은 울주군 문수산 동쪽 기슬의 좋은 땅을 가려 절을 세우게 하고 망해사(望海寺)라 불렀다.
망해사를 신방사(新房寺)라고도 했는데 지금은 소실되어 절터와 주춧돌만 남아있다.
울산시 울주군 청량면에 있는 망해사의 대웅전 벽에는 이러한 창건설화가 그려져 있다.
망해사는 신라 헌강왕 때에 동해 용왕을 위해 세운 절이라고 삼국유사에 기록돼 있어, 이 부도들도 그 때 세워졌다고 전해진다.
원래 동서로 나란히 2기가 있었으나 동쪽 부도는 오래 전에 무너져 땅에 방치되던 것을 지난 1960년 11월에 다시 세웠으나
상륜(불탑의 꼭대기에 있는 쇠붙이로 된 원기둥 모양의 장식)은 모두 없어졌다.
처용 마을의 전설
처용 마을 앞을 흐르는 작은 개울이 끝나고 바다로 유입되는 지점의 해변 가까운 수중에 넓쩍 바위라고 부르는
사방 3∼5m 정도 되는 멧방석처럼 생긴 바위가 있다. 이 바위 위에는 사람의 엉덩이 자국이 선명하게 찍혀 있는데,
신라가 망국의 길로 접어들 무렵에 처용이 매일 나타났다고 한다. 용왕의 아들로서 인간 세상에 발을 들여 놓게된 이후
다시는 용궁으로 돌아가지 못하게된 처용이 이곳에 앉아 하염없이 먼바다를 바라보며 시름에 잠겨 있었다고 한다.
바위 위에 흔적이 남을 정도로 오랜 시간 동안 앉아서 기울어 가는 국운을 혼자의 힘으로 어쩔 수 없음을 한탄하며
또 용궁의 아름다운 추억들을 떠올리곤 하였다. 그러다 세월이 흐른 어느 날 그는 어디론가 떠나가고
다시는 이곳에 나타나지 않았다고 한다.
(질문: 처용가, 도화녀와 비형랑에 나오는 여자의 정절은 무엇일까?
답변: 출처에 적힌 싸이트 가시면 처용가와 도화녀와 비형랑에 대해서 자료를 얻으실 수 있습니다.
처용가는 서정문학의 향가에 있고, 도화녀와 비형랑은 서사문학의 설화모음에 있습니다.
본인이 직접 읽으면서 느끼는 점을 정리해보는 것이 정답이 아닐까 싶습니다.
제 생각을 덧붙이자면,
유교의 이념을 정치적으로 채택한 조선시대에 와서야 지금 생각하는 정조관념이 생긴 것이지,
중세시대는 연애와 결혼은 자유로운 것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도화녀의 이야기를 보면 여성의 재혼이 자유로웠을 것으로 추정되며,
처용가에서는 여인의 자유분방한 성생활(?)을 엿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두 이야기가 모두 특출난 미모를 가지고 있는 여성을 그림으로서,
유교시대가 현모양처상을 이상형으로 꼽는 것과는 상당히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처용가에서 부인의 외도를 보고도 소극적으로 대처하는 처용의 모습을 보면,
여성이 남성에 예속되었다기 보다는 동등한 지위에 있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만약, 조선시대에 이런 일이 벌어진다면, 당장에 끌려나와 물매를 맞고 죽었겠지요..)
뭐.. 조금의 비약도 있습니다만...)
비형랑(鼻荊郞, 581년 ~ ?)은 누구인가?
삼국유사에 따르면, 비형랑은 진지왕이 사량부의 미인 도화녀(桃花女)와 사통하여 낳은 자식이다. 579년에 진지왕은 도화녀를 불러 후궁으로 삼으려 했다. 그러나 도화녀는 남편이 있다며 거절하였다. 그 해 진지왕은 폐위되어 죽었다. 2년 뒤인 581년, 도화녀의 남편이 죽자 진지왕의 귀신이 도화녀에게 나타나 사통하였다.
이 이야기를 듣게 된 진평왕은 비형랑을 불러 궁중에 살게 하고 15세 때 집사(執事) 벼슬을 주었다. 그런데 비형랑은 밤마다 궁궐을 빠져 나가 밖에서 놀았다. 이에 왕은 병사들을 파견해 지켜보게 하니, 비형랑은 귀신과 놀고 있었다. 이에 왕이 비형랑을 시켜 강에 다리를 놓게 하니 하룻밤 사이에 다리가 완성되었다.
하루는 진평왕이 비형랑에게 묻기를, 귀신 중에 정사를 도울 만한 자가 있느냐고 했다. 이에 비형랑은 길달(吉達)을 추천하였다. 당시 각간 임종이 자식이 없어 왕은 길달로 하여금 임종의 양자가 되게 하였다. 임종은 길달을 시켜 흥륜사(興輪寺) 남쪽에 문루를 짓게 하고, 길달이 거기에서 밤마다 자니, 사람들은 이를 길달문이라고 불렀다. 어느 날 길달이 여우로 변해 도망치니 비형랑이 귀신을 시켜 이를 잡아 죽였다. 이후로 귀신들이 비형랑을 두려워하여 모두 달아났다.
이에 당시 사람들이 비형랑을 우러러 노래를 지어 불렀다 한다.-검색-
도화녀 =도화랑은 누구인가?
《삼국유사》에 나오는 미녀. 신라 진지왕이 그녀를 탐내자 두 남편을 섬길 수 없다고 거절하였는데, 왕과 남편이 모두 죽은 뒤 진지왕의 혼령과 동거하여 아들 비형(鼻荊)을 낳았다고 한다. -검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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