讀/삼국유사읽기

처용가 (신라 향가) [處容歌]

oldhabit 2010. 9. 30. 12:10
처용가 (신라 향가)  [處容歌]

 

 

 
신라 헌강왕 때 처용(處容:?~?)이 지은 8구체 향가.
 
〈삼국유사〉 권2 처용랑 망해사(處容郞望海寺)조에 전한다.
헌강왕이 개운포(開雲浦) 바닷가로 놀이를 나갔다 돌아가는 길에 물가에서 쉬고 있는데 동해 용왕이 조화를 부렸다.
왕이 용을 위해 절을 지으라고 명하자 조화를 멈춘 용은 왕 앞에 나와 인사했다.
동해 용의 일곱 아들 중 1명이 왕을 따라 서울에와 정사를 보좌했는데 그의 이름이 처용이었다.
왕은 그의 마음을 잡아두기 위해 미녀를 아내로 맺어주고 급간(級干) 벼슬을 내렸다.
처용의 아내는 매우 아름다워 역신(疫神)이 사모했다.
역신은 사람으로 변해 처용이 없는 밤에 그의 아내를 찾아와 동침했다.
처용이 외출했다가 집으로 돌아와보니 자기 아내의 잠자리에 두 사람이 누워 있었다.
이에 〈처용가〉를 지어 부르며 춤을 추면서 그 자리를 물러나왔다.
처용이 물러나자 역신은 모습을 드러내 무릎을 꿇고 "제가 공의 아내를 사모해 오늘 밤 범했습니다.
그런데도 공은 성난 기색을 보이지 않으니 참으로 감복했습니다.
 맹세하건대 이후로는 공의 모습을 그린 화상만 보아도 그 문 안에는 들어가지 않겠습니다"라고 말했다.
이때문에 사람들은 문간에 처용의 얼굴을 그려 붙여 사귀(邪鬼)를 물리치고 경복(慶福)을 맞아들였다고 한다.
향찰(鄕札)로 기록되어 있는데 양주동의 해독에 근거하여 현대역을 하면 다음과 같다.
"동경 밝은 달에/밤드리 노닐다가/들어와 자리 보니/다리가 넷이어라/둘은 내 것이런만/둘은 뉘 것인고/본디 내 것이다만/빼앗긴 걸 어찌하릿고." 먼저 달 밝은 밤에 늦게까지 놀았다고 하여 뒤에 오는 아내의 간통 현실과 대조를 이루었다.
간통장면과 그에 대한 처용의 심리반응을 다리 수를 세는 것으로 묘사했다.
이러한 표현법은 민요에서 흔하게 사용하는 것으로 이 노래가 민간에 그 원천을 두고 있음을 보여준다.
결국 처용은 "이미 빼앗긴 걸 어찌하겠느냐"며 체념하고 만다.
그러나 이러한 체념이 역신과의 대결에서 패배로 끝나게 하지 않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역신의 마음을 감동시켜 승리하게 만들었다.
현실의 갈등 상황 속에서 일단 한 걸음 뒤로 물러나는 미덕(美德)과, 폭력 앞에 춤과 노래로 대처하는 여유를 보여주었다.
한국인의 심성과 지향가치를 알게 해주는 구절로 자주 인용되기도 한다.
이 노래는 그 배경설화의 문맥을 떼어내고 이해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그동안 처용설화에 대한 연구는 왕성하게 전개되어왔는데,
처용을 무당·화랑·불자(佛子) 또는 지방호족의 자제, 이슬람 상인 등으로 규정하기도 했다.
이에 따라 작품의 배경과 사상이 달리 이해되었다.
배경설화와 관련해서 볼 때 이 노래는 사귀를 물리치고 복을 비는 굿에서 연유한 것이라고 봄이 타당할 것이다.
처용이라는 신격의 가면을 쓰고 춤을 추는 사람이 역신의 가면을 쓰고 춤을 추는 사람을 물리치는 과정을 행동으로 보여주는 굿이 나라의 안녕을 비는 국가적 행사로 치러졌던 것으로 보인다.
연극적인 내용, 구성, 의미를 갖춘 굿에서 〈처용가〉는 아내를 빼앗긴 후 처용의 고민을 노래로 표현한 것이다. -브르태니커 검색-
 
 
 
처용가 (處容歌)


東京明期月良 夜入伊遊行如可

入良沙寢矣見昆脚烏伊四是良羅

二 隱吾下於叱古二 隱誰支下焉古

本矣吾下是如馬於隱 奪叱良乙何如爲理古

셔블 발기 다래 밤드리 노니다가
드러자 자리 보곤 가라리 네히어라
둘흔 내해엇고 둘흔 뉘해언고
본대 내해다마난 아자날 엇디하릿고


서울 밝은 달에
밤 늦도록 놀며 지내다가
들어와 자리를 보니
가랑이가 넷이로구나
둘은 내(내 아내) 것이었지만
둘은 누구의 것인고 ?
본디 내 것이다만은(내 아내이지만)
빼앗긴 것을 어찌하겠는가. 


(위의 한시는 이두문으로 한자의뜻과 음을 혼용하여 나타낸 글이다.)
 
 
 
(처용가 원문 해설)

                  서라벌 밝은 달밤에
                  밤 깊도록 놀고 지내다가
                  들어와 잠자리를 보니
                  다리가 넷이로구나
                  둘은 내(내 아내) 것이지마는
                  둘은 누구의 것인고
                  본디 내 것이다만은(내 아내이지만)
                  빼앗긴 것을 어찌하리

                  처용가는 신라 헌강왕 때 처용이 지은
                  8구체의 향가로 삼국유사에 실려 전함.

                  아내를 범한 역신(疫神)에게 
                  인간으로서 분노하지 않은
                  처용의 행위에 감복한 역신은
                 "내가 공의 아내를 흠모하여 지금 잘못을 범하였는데,
                  노하지 않으시니 감격하여 아름답게 여기는 바입니다.
                  이후로는 맹세코 공의 모습을 그린 그림만 보아도
                  그 집에는 들어가지 않겠습니다."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나라 사람들은 처용의 형상을
                  문에 붙여서 사귀(邪鬼)를 쫓고 경사(慶事)를 맞는 표시로 삼았다  -불꽃카페 펌-

 

 

 

景賢堂私宴圖속의 처용무(호암미술관소장)

고려사 충혜왕조와 신우조에는 처용희를 즐겨 추었다는 기록이 전해진다.

처용무는 중요무형문화제 39호로 지정되어 있다.
 
 

 


처용 전설이 전해오는 영축산 망해사(望海寺)

왕은 울주군 문수산 동쪽 기슬의 좋은 땅을 가려 절을 세우게 하고 망해사(望海寺)라 불렀다.
망해사를 신방사(新房寺)라고도 했는데 지금은 소실되어 절터와 주춧돌만 남아있다. 

 
울산시 울주군 청량면에 있는 망해사의 대웅전 벽에는 이러한 창건설화가 그려져 있다.
망해사는 신라 헌강왕 때에 동해 용왕을 위해 세운 절이라고 삼국유사에 기록돼 있어, 이 부도들도 그 때 세워졌다고 전해진다.
원래 동서로 나란히 2기가 있었으나 동쪽 부도는 오래 전에 무너져 땅에 방치되던 것을 지난 1960년 11월에 다시 세웠으나
상륜(불탑의 꼭대기에 있는 쇠붙이로 된 원기둥 모양의 장식)은 모두 없어졌다.

 

 

 

처용 마을의 전설

처용 마을 앞을 흐르는 작은 개울이 끝나고 바다로 유입되는 지점의 해변 가까운 수중에 넓쩍 바위라고 부르는
사방 3∼5m 정도 되는 멧방석처럼 생긴 바위가 있다. 이 바위 위에는 사람의 엉덩이 자국이 선명하게 찍혀 있는데,
신라가 망국의 길로 접어들 무렵에 처용이 매일 나타났다고 한다. 용왕의 아들로서 인간 세상에 발을 들여 놓게된 이후
다시는 용궁으로 돌아가지 못하게된 처용이 이곳에 앉아 하염없이 먼바다를 바라보며 시름에 잠겨 있었다고 한다.
바위 위에 흔적이 남을 정도로 오랜 시간 동안 앉아서 기울어 가는 국운을 혼자의 힘으로 어쩔 수 없음을 한탄하며
또 용궁의 아름다운 추억들을 떠올리곤 하였다. 그러다 세월이 흐른 어느 날 그는 어디론가 떠나가고
다시는 이곳에 나타나지 않았다고 한다.

 



(질문: 처용가, 도화녀와 비형랑에 나오는 여자의 정절은 무엇일까?
 

답변: 출처에 적힌 싸이트 가시면 처용가와 도화녀와 비형랑에 대해서 자료를 얻으실 수 있습니다.

처용가는 서정문학의 향가에 있고, 도화녀와 비형랑은 서사문학의 설화모음에 있습니다.

본인이 직접 읽으면서 느끼는 점을 정리해보는 것이 정답이 아닐까 싶습니다.

제 생각을 덧붙이자면,

유교의 이념을 정치적으로 채택한 조선시대에 와서야 지금 생각하는 정조관념이 생긴 것이지,

중세시대는 연애와 결혼은 자유로운 것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도화녀의 이야기를 보면 여성의 재혼이 자유로웠을 것으로 추정되며,

처용가에서는 여인의 자유분방한 성생활(?)을 엿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두 이야기가 모두 특출난 미모를 가지고 있는 여성을 그림으로서,

유교시대가 현모양처상을 이상형으로 꼽는 것과는 상당히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처용가에서 부인의 외도를 보고도 소극적으로 대처하는 처용의 모습을 보면,

여성이 남성에 예속되었다기 보다는 동등한 지위에 있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만약, 조선시대에 이런 일이 벌어진다면, 당장에 끌려나와 물매를 맞고 죽었겠지요..)

뭐.. 조금의 비약도 있습니다만...)

 

 

비형랑(鼻荊郞, 581년 ~ ?)은 누구인가?

 

진지왕의 사생아(私生兒)로, 진평왕 때의 인물이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비형랑은 진지왕이 사량부의 미인 도화녀(桃花女)와 사통하여 낳은 자식이다. 579년에 진지왕은 도화녀를 불러 후궁으로 삼으려 했다. 그러나 도화녀는 남편이 있다며 거절하였다. 그 해 진지왕은 폐위되어 죽었다. 2년 뒤인 581년, 도화녀의 남편이 죽자 진지왕의 귀신이 도화녀에게 나타나 사통하였다.

이 이야기를 듣게 된 진평왕은 비형랑을 불러 궁중에 살게 하고 15세 때 집사(執事) 벼슬을 주었다. 그런데 비형랑은 밤마다 궁궐을 빠져 나가 밖에서 놀았다. 이에 왕은 병사들을 파견해 지켜보게 하니, 비형랑은 귀신과 놀고 있었다. 이에 왕이 비형랑을 시켜 강에 다리를 놓게 하니 하룻밤 사이에 다리가 완성되었다.

하루는 진평왕이 비형랑에게 묻기를, 귀신 중에 정사를 도울 만한 자가 있느냐고 했다. 이에 비형랑은 길달(吉達)을 추천하였다. 당시 각간 임종이 자식이 없어 왕은 길달로 하여금 임종의 양자가 되게 하였다. 임종은 길달을 시켜 흥륜사(興輪寺) 남쪽에 문루를 짓게 하고, 길달이 거기에서 밤마다 자니, 사람들은 이를 길달문이라고 불렀다. 어느 날 길달이 여우로 변해 도망치니 비형랑이 귀신을 시켜 이를 잡아 죽였다. 이후로 귀신들이 비형랑을 두려워하여 모두 달아났다.

이에 당시 사람들이 비형랑을 우러러 노래를 지어 불렀다 한다.-검색-

 

도화녀 =도화랑은 누구인가?

 

《삼국유사》에 나오는 미녀. 신라 진지왕이 그녀를 탐내자 남편을 섬길 없다고 거절하였는데, 왕과 남편이 모두 죽은 진지왕의 혼령과 동거하여 아들 비형()을 낳았다고 한다. -검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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