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를 초월한 시인의 열정 앞에서
―강인한 시인의 <입술>과 젊음의 시
장경렬 (서울대 영문과 교수)
1
아일랜드의 시인 예이츠가 「자아와 영혼의 대화」(“A Dialogue of Self and Soul)라는 시를 쓴 것은 그의 나이 65세 경이었다. 이 시에서 ‘자아’는 “세월의 흐름에도 녹슬지 않고 / 여전히 면도날처럼 날카롭고 여전히 거울처럼 반짝이는 / 사토의 옛 검”을 앞에 놓고, “궁전의 어느 여인의 옷자락에서 잘라 내 / 나무로 된 칼집을 둥글게 감싸놓은 / 꽃무늬로 수놓은 낡은 비단천이 / 너덜너덜하고 빛이 바랬지만 여전히 칼을 보호할 수 있음”을 확인한다. 그런 ‘자아’를 향해 ‘영혼’은 세속적 관심사에서 벗어나 초월적 명상의 세계로 들어갈 것을 권유한다. 하지만 ‘자아’는 ‘영혼’에 저항하여 “다시 한 번 죄를 범할 권리”를 주장한다. 이때 너덜너덜하고 빛이 바랜 천으로 감싼 칼집은 물론 시인의 늙고 노쇠한 육체를 암시하는 것일 수 있고, 아직도 녹슬지 않은 채 날카로운 칼은 시인의 정신을 암시하는 것일 수 있다. 정신이 아직 시퍼렇게 살아 있음을 의식하며 시인은 “눈먼 사람들끼리 서로 치고 받는 곳, / 개구리 알이 우글거리는 눈먼 사람의 도랑 속으로 / 내던져지는 것이 삶이라 하더라도, 여전히 다시 살기를, / 만족스러운 마음으로 삶을 온통 다시 살기를” 희망한다. 대학생 시절 필자는 노(老)시인의 이 시에서 삶에 대한 열정을 확인하고 한편으로 놀라워했고 또 한편으로 감동했었다. 모름지기 나이를 먹으면 삶에 대한 관조의 시 세계를 펼칠 법하지만, 예이츠는 그렇지가 않았던 것이다. 어쩌면 삶에 대한 이 같은 열정과 젊음의 마음이야말로 시인을 시인답게 만드는 것이 아닌가 생각되기도 했다.
2
최근 강인한 시인이 내놓은 시집 <입술>을 읽는 도중 필자는 문득 예이츠의 이 시를 떠올리게 되었는데, 60대 후반의 나이에 들어선 그의 시 세계에서도 예이츠의 시에서 느꼈던 삶에 대한 열정과 젊음을 확인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우선 시집의 제목부터가 예사롭지 않다. ‘입술’이라니? 입술은 인간의 신체 부위 가운데 그 어느 것보다 더 예민한 감각 기관으로, 일반적으로 육감과 관능을 상징하는 부위가 아닌가.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입술의 이미지는 육체적으로 더없이 활기에 차 있는 젊은이의 시 세계에 어울리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바로 이 입술이라는 단어는 그의 시집의 제목일 뿐만 아니라 이번 시집에 수록된 작품들 가운데 한 편의 제목이기도 하다.
매미 울음소리
붉고 뜨거운 그물을 짠다
먼 하늘로 흘러가는 시간의 강물
저 푸른 강에서 첨벙거리며
물고기들은
성좌를 입에 물고 여기저기 뛰어오르는데
자꾸만 눈이 감긴다
내가 엎질러 버린 기억의 어디쯤
흐르다 멈춘 것은
심장에 깊숙이 박힌
미늘,
그 분홍빛 입술이었다.
―「입술」 전문
“매미 울음소리”가 있고, “하늘”이 있다. 필경 어느 여름날 시인은 누운 자세로 멍하니 하늘에 눈길을 주고 있고, 온통 그의 주변을 채우고 있는 것은 “매미 울음소리”뿐이리라. 이 같은 정황을 시인은 강(江)을 연상케 하는 갖가지 이미지로 형상화하고 있다. “매미 울음소리”는 “붉고 뜨거운 그물”로, “먼 하늘”은 “시간의 강물”이 흐르는 곳으로, 또한 추정컨대 기억의 편린들은 “물고기”로 형상화되고 있다. 시인은 눈을 감은 채 기억을 더듬다가 문득 “심장에 깊숙이 박힌 / 미늘”을 의식한다. 사전적 정의에 따르면, ‘미늘’은 “낚시 끝의 안쪽에 있는, 거스러미처럼 되어 고기가 물면 빠지지 아니하게 된 작은 갈고리”(한글과 컴퓨터 전자 사전)를 말하거니와, 시인의 심장에 깊숙이 박혀 빠지지 않은 “미늘”은 다름 아닌 “그 분홍빛 입술”이다. 이때의 “분홍빛 입술”이 구체적으로 누구의 것을 지시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필경 과거에 시인을 매혹시키던 어느 여인의 입술일 수 있으리라. 어쩌면 빛 바랜 천으로 감싸 놓은 칼집과 같은 것이 나이 든 시인의 육체이겠지만, 예리한 칼날처럼 살아 있는 그의 정신은 여전히 가슴 깊이 박힌 ‘미늘’ 하나―그것도 관능적이고 육감적인 뉘앙스를 강하게 전하는 “분홍빛 입술”―로 인해 격렬한 아픔을 느끼고 있는 것이다.
아마도 시인의 나이에 대한 정보를 지니지 않은 채 이 시를 읽었다면, 어찌 이 같은 시를 환갑을 훨씬 넘긴 시인의 작품으로 추정할 수 있겠는가. 시인의 젊은 마음을 「입술」보다 더 생생하게 보여 주는 시가 있다면 이는 「감전 1」일 것이다. 이 시에서도 우리는 역시 그 어떤 젊은이 못지 않게 열정과 사랑에 괴로워하는 시인과 만날 수 있다.
눈도 오지 않는 겨울
하늘에 기대어 벚나무 소나무 허리 굽히고
피워야 할 마지막 꽃인 듯이
호수의 깊은 데를 들여다본다
저 아래 잠든 돌 심지에 문득 불이 붙어
벼락치듯
그리운 사람아
그대는 내 가슴속 어디에 숨어
꿈도 없는 긴 밤을 지피는 시퍼런 불꽃인가
일만 평 드넓은 호수는 살얼음을 끌어당기고
차가운 햇빛 아래 글썽이는 눈물이나 흉내내며
멀리서 물비늘을 쏘아 보내는데
어찌할거나 어찌할거나
속수무책으로 그리운 그대를 앞에 두고
먹먹하게 나는 물 속 깊이 갇혀 있을 뿐이니.
―「감전 1」 전문
이 시에서 배경을 이루고 있는 것은 “눈도 오지 않는 겨울”―즉, 황량하고 메마른 겨울―이다. 겨울을 배경으로 호수가 있고, 그 호수를 허리 굽힌 채 들여다보는 나무들이 있다. 이윽고 첫째 연을 통해 제시된 호수는 둘째 연에 이르러 시인의 마음과 겹쳐진다. 어떤 관점에서 보면, 호수 자체가 시인의 마음을 형상화한 것이라 할 수도 있겠다. 아울러, 시인의 마음속 깊이 “저 아래” 자리잡고 있는 “잠든 돌”은 “그리운 사람”에 대한 시인의 기억 또는 상념을 암시하는 것일 수 있거니와, 어느 한 순간 “잠든 돌 심지에 문득 불이 붙”는다. “그리운 사람”이 기억 저편 어딘가에 숨어 있다가 “벼락치듯” 살아나 “꿈도 없는 긴 밤을 지피는 시퍼런 불꽃”이 되어 “잠든 돌 심지”에 불을 붙인 것이다. 두 번 반복되는 “어쩔거나”라는 말이 암시하듯, 시인은 이로 인해 “속수무책으로” 아파하고 괴로워한다. 도대체 무엇이 왜 “잠든 돌 심지에 문득 불이 붙”이는가. 아니, 무엇 때문에 이 같은 “감전”(感電)의 순간이 시인에게 찾아오는 것일까. 또한 무엇 때문에 이런 순간을 겪으면서 시인―그리고 때때로 우리 모두들―은 어쩔 줄 몰라 하며 괴로워해야만 하는가. 이 물음에 대한 시원한 답을 할 수 없기에 시인은 시를 쓰는 것이고 사람들은 그의 시를 읽는 것이리라. 아니, 바로 답을 할 수 없는 물음을 촉발하는 순간―도저히 합리적 설명이 불가능한 미묘한 순간―이 문득 우리의 마음을 엄습하기에, “눈먼 사람들끼리 서로 치고 받는 곳, / 개구리 알이 우글거리는 눈먼 사람의 도랑 속으로 / 내던져지는 것이 삶”이라 해도 삶은 삶으로서의 의미를 갖는 것이리라.
실로 “어찌할거나”라는 물음 아닌 물음을 되뇌는 정황은 단지 시인만의 것일 수 없다. “그리운 사람”이 문득 마음에 떠오르는 순간 우리 모두가 되뇔 수밖에 없는 물음 아닌 물음이 “어찌할거나”일 수 있다. 하지만 이 시가 깊은 울림의 시가 되고 있음은 이처럼 물음 아닌 물음을 되뇜으로써 누구나 어느 순간 느낄 법한 마음의 아픔을 대신 드러내 주고 있기 때문만은 아니다. 이 시의 마지막 부분에 가서 시인은 자신을 “물 속 깊이 갇혀 있을 뿐”인 상태에서 “속수무책으로” 괴로워하고 있는 존재로 그리고 있거니와, 물 속에 갇힌 채 답답해하는 시인의 이 같은 마음을 더할 수 없이 극적으로 드러내고 있다는 점에서도 이 시는 깊은 울림의 시가 되고 있다. “나”를 가두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닌 “일만 평 드넓은 호수”로, “살얼음을 끌어당기고 / 차가운 햇빛 아래 글썽이는 눈물이나 흉내내며 / 멀리서 물비늘을 쏘아 보내는” 호수는 무엇보다도 “살얼음”으로 덮여 있기에 그 속이 들여다보이기도 한다. 따라서 “벚나무 소나무”는 “허리 굽히고 / 피워야 할 마지막 꽃인 듯이 / 호수의 깊은 데를 들여다”볼 수 있다. 하지만 “살얼음”은 동시에 “호수의 깊은 데”와 호수 위쪽의 세계를 가로막는 역할도 하거니와, 물 속에 갇힌 “나”는 바로 그 얼음 때문에 그만큼 더 답답해할 수밖에, 속수무책으로 괴로워만 할 수밖에 없는지도 모른다. 아울러, 얼음으로 가로막혀 있기에 “벚나무 소나무”는 “나”의 답답함에 그만큼 더 무심할 수밖에 없는지도 모른다. “나”의 답답함과 관계없이 황량하고 메마른 겨울의 세상은 그처럼 무연(無緣)하게 존재하는 것이다.
앞서 우리는 호수가 시인의 마음을 형상화한 것일 수 있다고 말한 바 있다. 그렇다면, “내”가 호수에 갇혀 있다는 말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내가 내 마음 안에 갇혀 있다’라는 말은 논리적으로 부자연스러운 것일 수 있기 때문에 우리는 이 같은 물음을 던질 수 있는 것이다. 물론 ‘내가 내 마음 안에 갇혀 있다’라는 말은 논리적으로 부자연스러운 것일 수 있다. 하지만 ‘나를 가두고 있는 내 마음’이라는 표현은 시적으로 어색할 것이 하나도 없다. 호수와 같은 내 마음 안에는 나도 모를 내가 무수히 존재해 있을 수 있고, 바로 그 무수한 나 가운데 하나가 “그리운 사람”을 문득 떠올리는 나일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바로 그 ‘나’는 평소에 “잠든 돌”로 존재하지만 그 “심지에 문득 불이 붙”기도 한다. 그 불을 붙이는 것은 바로 “꿈도 없는 긴 밤을 지피는 시퍼런 불꽃”으로서의 “그리운 그대”―즉, “내 가슴속 어디에 숨어” 있는 “그리운 그대”―다. 어쩌면 나이든 사람에게 “피워야 할 마지막 꽃”일 수도 있는 그리움이라는 “불”에 어찌할 바를 몰라하는 이가 바로 시인 강인한 자신일 수 있다.
누군가에 대한 그리움을 가슴 저미게 담고 있는 동시에 드러내고 있는 「감전 1」은 정녕코 시인의 젊은 마음이 가능케 한 시라고 할 수 있다. “돌”과 “마음”을 병치시키고 있는 또 한 편의 뛰어난 시가 있으니, 그것은 바로 「빈 손의 기억」이다.
내가 가만히 손에 집어 든 이 돌을
낳은 것은 강물이었으리
둥글고 납작한 이 돌에서 어떤 마음이 읽힌다
견고한 어둠 속에서 파닥거리는
알 수 없는 비상의 힘을 나는 느낀다
내 손안에서 숨쉬는 알
둥우리에서 막 꺼낸 피 묻은 달걀처럼
이 속에서 눈뜨는 보석 같은 빛과 팽팽한 힘이
내 혈관을 타고 심장에 전해 온다
왼팔을 창처럼 길게 뻗어 건너편 언덕을 향하고
오른손을 잠시 굽혔다가
힘껏 내쏘면
수면은 가볍게 돌을 튕기고 튕기고 또 튕긴다
보라, 흐르는 물 위에 번개 치듯
꽃이 핀다, 핀다, 핀다
돌에 입술을 대는 강물이여
차갑고 짧은 입맞춤
수정으로 피는 허무의 꽃송이여
내 손에서 날아간 돌의 의지가
피워내는 저 아름다운 물의 언어를
나는 알지 못한다
빈 손아귀에 잠시 머물렀던 돌을 기억할 뿐.
―「빈 손의 기억」 전문
이 시의 배경을 이루는 것은 강변이다. 어느 날 강변에서 시인은 “둥글고 납작한” 돌을 하나 주워 든다. 그리고 그 돌을 강물 위로 던져 물수제비를 뜬다. 그것이 이 시의 표면을 장식하는 이야기의 전부다. 하지만 이처럼 간단한 이야기는 시인의 시적 시선을 통해 한 토막의 아름다운 동영상(動映像)으로 바뀐다. 우선 시인이 주워 든 돌은 그의 시선을 통해 하나의 숨쉬는 생명체로 살아난다. 돌에서 “어떤 마음”을 읽기도 하고 “견고한 어둠 속에서 파닥거리는 / 알 수 없는 비상의 힘”을 느끼기도 하는 시인의 “손안에서” 그 돌은 하나의 “숨쉬는 알”이 된다. 그리하여 시인은 “둥우리에서 막 꺼낸 피 묻은 달걀처럼 / 이 속에서 눈뜨는 보석 같은 빛과 팽팽한 힘이 / 내 혈관을 타고 심장에 전해”옴을 느끼기도 한다. 이처럼 “마음”과 “힘”을 동시에 느끼게 하는 “돌”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 이 물음에 대한 답을 위해서는 이어지는 시행들에 유의할 필요가 있는데, 시인은 돌을 강물 위로 “힘껏 내”쏜다. 돌을 힘껏 내쏘아 물수제비를 뜨는 과정―말하자면, “수면”이 “가볍게 돌을 튕기고 튕기고 또 튕”기는 과정―에 “흐르는 물 위에 번개 치듯 / 꽃이 핀다, 핀다, 핀다.” 어디 그뿐이랴. “강물”은 “돌에 입술을 대”고 “차갑고 짧은 입맞춤”을 한다. 하지만 그 입맞춤을 통해 시인이 보는 것은 “수정으로 피는 허무의 꽃송이”다. 결국 전체적인 그림을 그리는 경우, 이 시에서 시인이 손에 쥐는 “돌”은 시인의 마음을 뜻하는 것일 수도 있고 또 시인이 세상에 선보이는 시를 뜻하는 것일 수도 있으며, “강물”은 시인이 대면한 채 살아가는 세상을 뜻하는 것일 수 있다. 한편, 시인이 세상에 투사한 마음 또는 시심이 강물과도 같이 흘러가는 세상의 표면 위에 잠깐이나마 그려 놓는 파문이 “수정으로 피는 허무의 꽃송이”일 수 있다.
요컨대, 강변에서 돌을 주워 강물 위로 물수제비를 뜨는 행위는 시인이 세상을 향해 자신의 마음 또는 시심을 투사하는 일에 대한 비유일 수 있다. 하지만 세상과의 “입맞춤”은 “차갑고 짧”을 뿐만 아니라, 이로 인해 피어나는 꽃은 “아름답"지만 이내 사라지고 마는 “허무의 꽃송이”일 뿐이다. 게다가 시인은 “내 손에서 날아간 돌의 의지가 / 피워내는 저 아름다운 물의 언어”를 “알지 못한다.” 그는 다만 “빈 손아귀에 잠시 머물렀던 돌을 기억할 뿐”이다. 세상을 향해 자신의 마음 또는 시심을 투사하는 일이 이처럼 허무한 것일 수도 있다는 깨달음―또한 시인의 마음 또는 시심이 세상과 만나 만들어 내는 꽃송이는 아름다운 것이긴 하지만 동시에 “알지 못”할 “언어”로 이루어진 수수께끼와도 같은 것일 수 있다는 깨달음―에 이르는 시인의 모습에서 우리는 무엇보다도 시인의 내면 풍경을 읽을 수 있으리라. 즉, 시인은 이제 자신의 삶 또는 시 쓰기가 갖는 의미가 어떤 것인지를 관조의 눈길로 확인하고 있는 것이다. 어찌 보면, 여기에서 우리는 이제 세상을 관조할 수 있을 만큼 나이가 든 시인의 마음을 읽을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시인이 세상을 향해 투사하려는 자신의 마음 또는 시심에서 “견고한 어둠 속에서 파닥거리는 / 알 수 없는 비상의 힘”을, “둥우리에서 막 꺼낸 피 묻은 달걀처럼 / 이 속에서 눈뜨는 보석 같은 빛과 팽팽한 힘”을 느끼고 있음에 유의해야 할 것이다. 이 같은 느낌을 전하는 동시에 시인은 “돌”을 “마음”에, 이어서 “숨쉬는 알”에 비유하고 있기도 한데, 이는 비록 그가 세상을 관조할 나이에 이르렀지만 적어도 그의 마음만큼은 아직 새로운 삶을 향해 깨어나는 알처럼 무한한 잠재력과 생명력을 지닌 것임을 확신하고 있기 때문이리라. 다시 말해, 적어도 시인의 마음만큼만은 아직 젊다.
3
강인한 시인은 그의 이번 시집 ?입술?에 올린 “시인의 말”에서 “이 시집 속의 시를 읽으면서 청년을 느낀다면 그게 시인이고, 어떤 시를 읽으면서 중년이나 노인을 느낀다면 그 또한 시인일 것”이라고 말하면서도, “가능하면 나는 처음 시단에 나서는 열렬한 청년의 자세로 시를 썼”음을 고백한다. 그리고 “이 시집에서 나는 청년으로 살고 사랑하였으므로 부디 그 청년을 만날 것을 기대”한다는 말을 덧붙이고 있다. 실로 우리가 그의 이번 시집에서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은 아직 청년의 마음으로 세상을 살아가고 있고 또 시를 쓰는 시인의 모습이었다. 예이츠의 시 구절을 다시 한 번 빌려 말하자면, “세월의 흐름에도 녹슬지 않고 / 여전히 면도날처럼 날카롭고 여전히 거울처럼 반짝이는 / 사토의 옛 검”과 같은 것이 강인한 시인의 마음 또는 시심임을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이다.
“중년”을 벗어나 “노인”의 나이에 들어섰지만 여전히 젊음과 열정의 고백으로 채워진 강인한 시인의 이번 시집에 담긴 시 세계에는 젊음과 열정에도 불구하고 속되거나 지나친 구석이 없다. 바로 그 때문에 그의 이번 시집 속의 시 세계는 시를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시 읽기의 즐거움을 듬뿍 안겨 줄 것으로 확신한다. 동시에 시를 창작하는 시인들에게도 소중한 자극제의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으로 믿는다. 무엇보다도 나이에 걸맞지 않게 이미 노인이라도 된 양 세상을 관조하는 듯한 시 쓰기에 몰두하는 몇몇 젊은 시인들은 강인한 시인의 이번 시집을 읽고 많은 것을 배워야 할 것이다. 아울러, 나이를 무기 삼아 세상을 이미 달관한 듯한 시를 쓰는 일에 자족하고 있는 몇몇 나이든 시인들 역시 시 쓰기에 대한 자기 반성의 기회를 얻어야 할 것이다. 젊음과 열정의 고백으로 채워져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속되거나 지나치지 않은 강인한 시인의 이번 시집 속의 시 세계에 모두를 초대하고 싶다. □
—계간《본질과 현상》2010년 봄호
'言 > 사는이치知'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아나키즘? (0) | 2010.05.12 |
---|---|
아나키즘anarchism (0) | 2010.05.12 |
白馬入芦花(백마입호화) (0) | 2010.02.22 |
천상병 詩集 (0) | 2010.02.15 |
책-학설 ( 후속작으로 역사 본체론.) (0) | 2010.01.2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