言/감성적인畵

울지마 톤즈

oldhabit 2010. 10. 4. 21:52

제목: 울지마 톤즈
장르: 휴먼 다큐멘터리


 ▒ 감독: 구수환
 ▒ 글.구성: 윤정화
 ▒ 내레이션: 이금희
 ▒ 촬영: 윤민섭
 ▒ 수단촬영: 김성미
 ▒ 음악감독: 곽장용
 ▒ 제작지원: 김형진

 ▒ 기획.제작: KBS한국방송
 ▒ 제공.배급: ㈜마운틴픽쳐스
 ▒ 러닝타임: 90분
 ▒ 개봉: 2010년 9월9일
 ▒ 홈페이지: http://www.dontcryformesudan.com/

 


 눈물 젖은 영화… 관객도 펑펑 울었다

고 이태석 신부는 말했다. "신부가 아니어도 의술로 많은 사람을 도울 수 있는데, 한국에도 가난한 사람들이 많은데, 왜 신부가 돼 아프리카까지 갔냐는 질문을 자주 받는다. 특별한 이유는 없다. 다만 내 삶에 영향을 준 아름다운 향기가 있다." 영화 '울지마 톤즈'에서 그 향기를 맡을 수 있다. 부산일보DB

요즘 영화관 CGV서면에 가면 전에 없던 모습을 보게 된다. 20대를 전후한 젊은 층들로 붐볐는데, 나이 지긋한 사람들이 꽤 눈에 띈다. 옛날과는 달라진 영화관 풍경을 어색해 하며 상영관에 들어가는데, 영화를 다 보고 나오는 이들의 두 눈은, 예외 없이 붉어 있다. '울지마 톤즈'라는 영화를 본 것이다.

지난달 9일 개봉해 3주 겨우 지났는데, 6만 명이 이 영화를 봤단다. 상영관도 처음 12곳에서 54곳으로 늘었다. 다큐멘터리 영화로는 이례적인 호응인데, 특별한 홍보활동 없이 순전히 입소문에 따른 것이라 극장가에선 '다큐 기적'이라 부를 정도다. 무엇이 이 기적을 가능케 했나?

지난 1월 마흔여덟의 나이에 암으로 세상을 떠난 이태석 신부. 신은 그에게 많은 재능을 주었다. 의사로, 음악가로, 건축가로, 교사로서의 재능. 이 신부는 그런 자신의 모든 재능을 바쳐 온몸 다해 전쟁과 가난에 찌들어 영혼이 메마른 아프리카 수단의 톤즈 마을 사람들을 사랑했다.

아프리카에 온몸 바치다
지난 1월 선종한
이태석 신부의 48년 삶

"가난한 이가 내겐 예수"

휴가차 한국에 들러 우연히 받은 건강검진에서 암, 그것도 말기라는 판정을 받고도 다음날 톤즈 후원 공연에서 환한 웃음을 보여 줄 수 있는 이! 그는 그렇게 아름다운 사람이었다.

영화에서 그는 놀라운 말을 한다. "힘없고 가난한 그들이 다 내게는 예수님입니다." 이는 가난한 사람 중에서도 가장 가난한 사람을 사랑했던 테레사 수녀가 했던 말과 똑같다. 두 사람의 말은 예수의 말과 겹친다. 예수는 말했다. "당신들이 나의 형제들인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입니다."(마태복음 25장 40절)

사람들은 묻는다. 신은 이토록 아름다운 사람을 왜 그토록 일찍 데려가셨냐고? 하지만 그 또한 신의 신비일 테다. 신은 이태석 신부의 짧은 생애를 통해 무엇을 보여주려 했던 것일까.

눈물을 수치로 여기는 톤즈의 사람들은 이태석 신부의 죽음 소식에 마침내 눈물을 떨어뜨리고 만다. 그를 보는 한국의 관객들도 눈물을 훔친다. '울지마 톤즈'가 사람을 울리는 것이다. 눈물은 영혼을 정화시킨다. 영화를 보고 난 사람들은 이구동성으로 말한다. "어떻게 살아야 할지, 무엇을 해야 할지 고민하게 됐다."

수천수만의 사람들을 앞에 앉혀 놓고 신을 믿어라 소리 높여 외치는 것이 무슨 소용인가. 수만 마디 설교나 강론으로 사람의 눈물을 흘리게 할 수 있는 것인가.

예수가 그리스도인 것은 그 '말씀'에 있지 아니하다. '가장 작은 이'들을 온몸으로 사랑했고, 그 사랑을 사람 사람의 마음에 꽃피워 놓음으로써 자신을 부활시켰고, 또 그것이 구원임을 보여주었기에 그리스도다. 이태석 신부도 그랬다. 그와 동시대를 살았음에 감사드린다. 이 또한 신의 은총이고 신비일 테다.

임광명 기자 kmyim@busan.com

 

  • 아프리카 오지 수단에 자신의 모든 것을 헌신한
    한국의 슈바이처, 故 이태석 신부가 남긴 마지막 선물…
    위대한 사랑의 감동 휴먼 다큐멘터리 <울지마, 톤즈>!

    2010년 2월, 아프리카 수단 남쪽의 작은 마을 톤즈. 남 수단의 자랑인 톤즈 브라스 밴드가 마을을 행진했다. 선두에선 소년들은 한 남자의 사진을 들고 있었다. 환하게 웃고 있는 사진 속 한 남자… 마을 사람들은 톤즈의 아버지였던 그의 죽음이 믿기지 않는다며 눈물을 흘렸다. 그들은 세계에서 가장 키가 큰 딩카족이다. 남과 북으로 나뉜 수단의 오랜 내전 속에서 그들의 삶은 분노와 증오 그리고 가난과 질병으로 얼룩졌다. 목숨을 걸고 가족과 소를 지키기 위해 싸우는 딩카족. 강인함과 용맹함의 상징인 종족 딩카족에게 눈물은 가장 큰 수치다. 무슨 일이 있어도 눈물을 보이지 않던 그들이 울고 말았다. 모든 것이 메마른 땅 톤즈에서 눈물의 배웅을 받으며 이 세상 마지막 길을 떠난 사람, 마흔 여덟의 나이로 짧은 생을 마감한 故 이태석 신부다. 톤즈의 아버지이자, 의사였고, 선생님, 지휘자, 건축가였던 쫄리 신부님, 이태석…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 온몸 다해 그들을 사랑했던 헌신적인 그의 삶이 스크린에서 펼쳐진다.

    꽃처럼 아름답고 향기로운
    그의 인생이 이제 온 세상을 울린다!


    이영화의 키워드 : 종교, 감동

    수단의 슈바이처, 쫄리 신부님...
    당신은 사랑입니다.

    故 이태석 신부의 감동 휴먼 다큐멘터리
    [ INTRO ]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
    (마태 25,40)


    신부가 아니어도 의술로 많은 사람을 도울 수 있는데
    한국에도 가난한 사람들이 많은데
    왜 아프리카까지 갔냐는 질문을 자주 받는다.

    특별한 이유는 없다.
    다만, 내 삶에 영향을 준 아름다운 향기가 있다.

    가장 보잘것없는 이에게 해준 것이
    곧 나에게 해준 것이라는 예수님 말씀,

    모든 것을 포기하고 아프리카에서 평생을 바친 슈바이처 박사,

    어릴 때 집 근처 고아원에서 본
    신부님과 수녀님들의 헌신적인 삶,

    마지막으로 10남매를 위해 평생을 희생하신 어머니의 고귀한 삶,
    이것이 내 마음을 움직인 아름다운 향기다.




    [ About Movie ]

    남부 수단의 절망의 황무지, 톤즈를 아시나요?
    아프리카 오지 톤즈의 희망 故 이태석 신부를 만나다!

    아프리카에서 가장 큰 나라인 수단은 1956년 독립 직후부터 집권층인 소수의 아랍계와 피지배층인 다수의 원주민 사이의 끝없는 내전으로 모든 것이 황폐해져 있는 상태다. 80년대 남부에서 석유가 발견된 이후 이를 차지하기 위해 내전은 더 격화되었다. 특히 반군이 점령하고 있는 남부 수단은 절망의 황무지라 불리 울 만큼 심각한 피해를 입고 있다. 어린 소년들은 소년병이란 명목하에 군대에서 착취당하고 있으며, 느닷없이 시작되는 전쟁의 불안감과 더욱 심해지는 폭력성으로 인해 국민들은 두려움으로 가득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다. 또한 악성 말라리아와 콜레라등의 전염병으로 인해 수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어가고 있다. 강한 햇빛과 습기 많은 우기를 가진 자연환경과 질 낮은 위생 상태, 기본적인 먹거리의 부족 등으로 인해 상상을 초월할 만큼 빠르게 퍼진 전염병은 전쟁 만큼이나 톤즈 사람들을 괴롭히고 있다. 오지 여행가이자 국제 구호전문가인 한비야씨도 근래에 가본 곳 중 남부 수단의 상태가 가장 최악이었다고 고백했을 만큼 깊은 절망에 빠져 있는 톤즈. 그 지옥 같은 곳에 그들의 유일한 희망이 되어준 한 사람이 있었다. 2001년 로마 교황청에서 사제 서품을 받고 남부 수단을 자원해 부임한 이태석 신부. 그는 인제대학교 의대를 졸업하고 인턴 생활까지 마친 의사였으나, 세상의 가장 가난한 곳에서 의술을 펼치고 싶다는 어린시절의 꿈을 포기할 수 없어 뒤늦게 신학대에 진학했고, 신부가 되자마자 톤즈로 향했다. 톤즈 사람들은 그를 쫄리 신부라 불렀다. 그리고 그들의 마음에 그는 희망이라 기억되었다.
    이태석 신부는 지난 1월14일 대장암으로 선종했다. 그의 사망 소식을 전해들은 톤즈는 지금 슬픔에 잠겨 있다. 그들이 기억하는 이태석 신부와 그가 남긴 사랑과 나눔의 의미를 찾아 우리는 다시 톤즈를 찾았다.


    잠들지 않는 톤즈의 병원, 그 곳의 유일한 의사 이태석 신부
    한국의 슈바이처라 불린 그의 투혼이 살려낸 소중한 생명들!

    의사로서의 평탄한 삶을 포기하고 사제의 길을 택한 이태석 신부의 몸과 마음은 아프리카의 가장 척박한 땅, 톤즈로 향했다. ‘내가 많은 것이 부족하지만 무언가 할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 있었다’라고 그는 이야기 했지만 실로 그가 톤즈에서 일궈낸 성과는 대단했다. 한국의 슈바이처라 불리운 이태석 신부는 누구도 가고 싶어 하지 않는 아프리카의 가장 가난한 땅 톤즈로 향하게 된 것을 하느님의 뜻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자신의 삶이 독립된 혼자만의 삶이 아닌 톤즈 사람들의 삶이기도 하다는 것을 주님의 거대한 사랑 안에서 실감하며, 내전과 전염병으로 병든 톤즈에 병원과 학교를 짓기 시작했다. 병원이 생겼다는 소문을 들은 톤즈 사람들은 며칠 밤을 새며 걸어와 치료를 받았고, 그런 환자들을 돌려 보낼 수 없었던 신부님은 잠을 줄여가면서 환자를 맞았다. 하루 종일 쉬지도 않고 치료를 하는 신부님의 투혼으로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건질 수 있었고 병원은 나날이 많은 환자들로 가득 차기 시작했다. 이태석 신부는 병원까지 오지 못하는 환자들을 치료하기 위해 높은 온도에 약한 백신을 아이스박스에 넣어가 직접 환자를 찾아가 접종을 해주었다. 백신을 보존하기 위해서 필요한 냉장고를 사용하기 위해 전기가 없는 톤즈의 건물 지붕에 태양열 집열기를 설치하여 전기의 혜택을 누릴 수 있도록 했다. 그는 환자들의 아픔을 좀 더 잘 듣기 위해 그들의 말인 딩카어도 열심히 배웠다. 모든 것을 혼자서 꾸려가야 했던 이태석 신부의 진료는 그렇게 밤을 새워가며 계속되었다. 병과 싸울 힘조차 없었던 사람들이 그의 사랑과 노력으로 인해 소중한 생명을 이어갈 수 있게 되었다.


    사랑을 가르치는 거룩한 돈보스코 초. 중 고등학교,
    내 집처럼 느껴지는 정이 넘치는 학교를 꿈꾸다!

    병원이 자리를 잡아가자 이태석 신부는 톤즈에서 이루고 싶은 또 하나의 꿈을 펼쳐놓기 시작한다. 소년병으로 끌려가는 아이들과 전쟁으로 피폐해진 상황 속에서 할 일이 없는 아이들을 구제하기 위한 학교를 만들기로 한 것이다. 학교가 없어 배우지 못하고 그로 인해 가난이 대물림 되고 있는 톤즈의 현실을 조금이나마 바꿔보기 위해 그는 예수님의 사랑이 깃든 학교를 만들기로 한다. 병원과 마찬가지로 톤즈 사람들과 함께 만든 학교는 고등학교 과정까지 한 교정에 있는 톤즈의 유일한 학교로 완성되었다. 이태석 신부는 직접 수학과 음악을 가르쳤고, 케냐에서 교사 자격증이 있는 교사들을 선발해 데려와 학생들을 가르쳤다. 톤즈 돈보스코 초. 중 고등학교(12년 과정)는 남부 수단에서 가장 실력 있는 학교로 알려지기 시작했다. 보통 다른 학교들은 오전에 간단한 수업을 하고 선생님이 없을 경우 수업을 하지 못하기도 하면서 오후 12시면 모든 과정이 끝나는데 돈보스코 초. 중 고등학교는 항상 선생님들이 수업을 하고 있고, 고등학교의 수업은 3시까지 알찬 수업으로 짜여져 있어 많은 아이들이 오고 싶어하는 학교가 되었다. 수업의 열기 또한 대단하여 고등학교 3학년 수업의 경우 한 교실에서 120명의 학생이 비좁게 모여 앉아 수업을 들었다. 학교 근처에는 기숙사도 만들어서 집이 먼 아이들이 숙식을 해결하며 학교에 다닐 수 있도록 배려했다. 오랜 전쟁으로 몸과 마음이 부서진 톤즈의 아이들은 이태석 신부의 꿈이 담긴 학교에서 드디어 자신들의 미래를 꿈꿀 수 있게 되었고 사랑을 배우게 되었다.


    꿈을 현실로 만드는 사람,
    한센인의 아픔을 함께 하다!

    이태석 신부의 형인 이태영 신부는 그가 의사의 길을 버리고 사제의 길을 선택한 데에는 ‘다미안 신부’의 영향이 가장 컸다고 말했다. 이태석 신부는 초등학교 5학년 때 성당에서 상영해준 ‘다미안 신부’의 일대기를 다룬 영화를 보고 그와 같은 삶을 살겠노라 다짐했다. ‘다미안 신부’는 한센병 환자들이 모여 살던 하와이 근처 ‘몰로카’ 섬에서 몸을 사리지 않고 한센인들을 돌보다가 자신도 한센병에 걸려 48세에 하느님의 품에 안겼다. 이태석 신부는 어린시절의 다짐을 잊지 않고 톤즈의 한센인들의 상처받은 마음과 몸을 어루만졌다. 톤즈 중심가에서 20분 정도 떨어진 인적 드문 곳에 위치한 한센인 마을은 그가 찾기 전까지 초가집에 지하수조차 없던 곳이었다. 그는 그 곳에 벽돌 집을 짓고 지하수를 끌어올린 펌프 시설을 만들었다. 그는 톤즈에서 단 하나뿐인 앰뷸런스를 타고 한센인 마을을 찾았다. 차 소리가 나면 나무막대기를 집고 걷는 손과 다리가 성하지 않은 어른과 아이들이 몰려 나온다. 이태석 신부는 그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 주고 직접 고름을 짜내고 붕대를 감아주며 발에 깊은 상처를 입은 환자들을 위해 직접 만든 신발을 신겼다. 처음으로 한센인이 아닌 다른 누군가의 따뜻한 손길을 느낀 그들에게 이태석 신부는 사랑 그 자체였다. 이태석 신부가 없는 지금, 그들은 그의 사진을 보자마자 너나 할것 없이 사진에 입을 맞추며 애통한 눈물을 쏟아냈다. 자신들을 환자가 아닌 인간으로 대해준 그에 대한 그들의 그리움은 안타까운 절규 그 자체였다. 그들은 이태석 신부를 ‘영원한 아버지’라고 불렀다.


    총 대신 악기를 든 아이들
    브라스 밴드가 만들어낸 희망의 기적!

    톤즈에서 내전은 끝났지만 평화는 오지 않았다. 여전히 군인들이 점령하고 있는 그 곳의 아침은 군대의 구호소리와 함께 시작된다. 전쟁과 가난에 찌든 아이들의 마음이 음악으로 치유될 수 있길 바랬던 이태석 신부는 그가 오래도록 꿈꾸던 일을 실행에 옮겼다. 그것은 바로 35인조 브라스 밴드를 만드는 것이었다. 모든 악기를 자신이 먼저 스스로 배워 아이들에게 가르치고, 악보를 만들고 한국 살레시오에서 보내준 단복을 입혔다. 총 대신 악기를 든 톤즈의 아이들은 곧 남부 수단의 유명인사가 되었다. 브라스 밴드는 정부 행사에도 초청 받았다. 남부 수단 대통령이 개최한 리셉션에서 연주를 선보인 브라스 밴드는 정부 공무원들로부터 큰 호응을 이끌어냈다. 아이들은 지금도 새벽이면 모여서 연습을 한다. 이태석 신부가 만들어준 악보를 보고 선배들이 후배를 가르치며 밴드를 꾸려 가고 있다. 아무런 꿈도 가질 수 없었던 아이들에게 브라스 밴드는 희망의 상징이 되었다.




    [ Director’s note ]

    울지마 톤즈가 만들어 지기까지,
    이태석 신부가 남긴 사랑의 흔적을 찾아가는 여정.

    올해 1월 우연히 이태석 신부의 선종 소식을 접하고 의사라는 직업을 버리고 신부의 길을 택한 그의 삶에 호기심을 가지게 되었다. 모든 사람들이 가기를 꺼려하는 아프리카 톤즈를 찾아간 이유 또한 궁금했다. <울지마 톤즈>는 그러한 궁금증에서 시작되었다. 마흔 여섯의 길지 않은 이태석 신부의 삶을 알아가는 여정은 그의 어머니로부터 시작되었다. 이태석 신부의 어머니는 신부님의 어린시절에 대한 기억, 어렵게 키운 아들이 의대에 진학했을 때의 기쁨과 사제가 되어 아프리카로 떠나겠다고 했을 때 겪었던 갈등에 대해 이야기 하기 시작했다. 이미 이태석 신부의 누나와 형을 하느님의 사람으로 보낸 어머니는 의지했던 아들의 선택을 쉽사리 지지해 줄 수 없었다. 어머니는 솔직한 심정을 드러내며 먼저 떠나보낸 아들 이야기에 눈물이 끊이지 않았다. 그 후, 만나게 된 이태석 신부의 지인들 또한 그의 이야기를 하며 눈물을 감추지 못했다. 국내 취재를 끝낸 순간 모두 이태석 신부에게 깊게 빠지게 되었다. 그리고 그가 그토록 사랑했던 톤즈가 너무나 궁금했다. 하지만 부족간의 전쟁이 시작된 남부 수단의 치안 상황으로 인해 바로 떠날 수 없었다. 우선 수단 어린이 장학회를 통해 건네 받은 40여개의 6mm 테잎을 전달 받아 현지에서 촬영할 내용들을 꼼꼼히 정리하기 시작했다.


    깊은 슬픔에 빠진 톤즈와의 만남
    수단에 도착해서는 아강그리아에서 선교활동을 펼치고 있던 한만준, 이승준 신부의 도움을 받았다. 두 분 모두 이태석 신부의 영향으로 아프리카까지 오게 되었다고 했다. 든든한 지원군을 만나 취재에 대한 걱정을 잠시 접은 찰나, 톤즈로 가는 길목에서 총격전이 시작되어 길목이 차단되었다. 결국 수단 남쪽으로 돌아가는 항공편을 이용해 비행기를 2번이나 갈아타고 비포장도로를 4시간 가량 달려 겨우 톤즈에 도착할 수 있었다. 전기도 없고, 공동 펌프가 만들어내는 식수를 사용하는 톤즈의 사정은 굉장히 열악해 보였으나 그래도 지금은 많이 발전한 것이라고 했다. 신부님의 흔적이 가장 많이 남아 있는 돈보스코에는 그의 손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었다. 신부님이 없는 병원을 여전히 찾고 있는 사람들 중 한 사람에게 의사도 없는 병원을 왜 찾는지 물었다. 그녀는 자신의 출산을 도와 직접 아이를 받아준 신부님의 죽음을 믿을 수 없다며 몇 시간 동안 그 곳을 떠나지 못하고 눈물을 흘렸다. 이태석 신부가 없는 2010년의 톤즈는 온통 깊은 슬픔과 그에 대한 그리움으로 가득했다.




    [ Beautiful people ]

    사랑이라 불리운 사람,
    이태석 신부를 기억하다.

    이태석 신부는 1962년 부산에서 태어났다. 그의 어머니는 자갈치 시장에서 삯바느질을 하며, 가족의 생계를 꾸려 갔고, 그는 집안일을 도우며 어머니를 기다리는 착한 아들이었다. 집 근처의 성당은 어린 그에게는 좋은 놀이터였다. 그에게 사제의 꿈을 가지게 한 ‘다미안 신부’의 영화를 본 곳도 성당이었다. 또한 성당에서 그는 또 다른 자신의 재능을 발견했다. 풍금을 독학으로 배웠고, 작곡도 했다. 중 3때는 이미 성가를 작곡하기도 했다. 음악과 신앙에 대한 믿음은 가난한 환경의 어려움 속에서도 그가 반듯하게 자라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성실한 학생으로 학창시절을 보낸 그는 의대에 합격했다. 군의관 시절, 그는 가난한 사람을 도우며 살고 싶다는 꿈을 실현하기로 다짐하게 되고, 이미 형제 중 한 명이 사제, 또 한 명은 수녀가 된 상황에서 자신 또한 사제가 되겠노라 어머니에게 어렵게 이야기를 꺼내게 된다. 어머니는 처음에는 반대했지만 그의 굳건한 마음을 저버릴 수 없어 허락하게 되고, 그는 로마에서 사제 서품을 받은 후 살레시오회 수도 사제이자 의사로서 아프리카로 향하게 되었다. 그 후 그의 인생은 온통 톤즈 사람들에 대한 사랑으로 가득 차게 된다. 마흔 여덟의 불꽃 같았던 삶은 2010년 1월14일 그가 그토록 사랑했던 하느님의 곁으로 돌아가며 끝을 맺게 되었다.

    “처음에는 워낙 가난하니까
    여러가지 계획을 많이 세웠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갈수록 같이 있어주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떤 어려움이 닥친다 해도
    그들을 저버리지 않고 함께 있어주고 싶었다.’’
    - 이태석 신부 인터뷰 中
     

     

     

     

     

     

     

     

     
     
     

    이태석 신부님 작사, 작곡
     

     

    십자가 앞에 꿇어 주께 물었네
    추위와 굶주림에 시달리는 이들
    총부리 앞에서 피를 흘리며 죽어가는 이들을

    당신은 보고만 있냐고

    눈물을 흘리면서 주께 물었네

     

    세상엔 죄인들과 닫힌 감옥이 있어야만 하고

    인간은 고통 속에서 번민해야 하느냐고  

    조용한 침묵 속에서 주 말씀 하셨지

    사랑, 사랑, 사랑 오직 서로 사랑하라고

     

    난 영원히 기도하리라 세계 평화 위해

     난 사랑하리라 내 모든 것 바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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