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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행복한 불행한 이에게-카프카의 편지 1900∼1924 / 프란츠 카프카 지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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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커튼이 드리워진 창문 뒤에서 그림책을 가지고 노는 어린애 같았지. 이따금 그 아이는 창 틈으로 길거리를 언뜻 보고, 그러고는 곧 그 귀중한 그림책들에 되돌아가는 것이야.”
카프카<사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카프카적으로 생각하고 느낄 필요가 있다. 물론 이것은 셰익스피어나 괴테의 글을 읽을 때에도 마찬가지지만 이들 작가와 대부분의 많은 작가들의 글이 보다 보편적인 이해를 요구하고 있으며, 그러한 이해에 기대어 또 다른 이해로 나아갈 수 있는 데 비해 카프카의 글은 보편적인 것들에서 누락되어 있는 것, 그 사이에 위태롭게 끼어 있는 것, 그리고 그것들을 허물고 무효로 만드는 것들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카프카가 우리에게 전해주는 이야기와 이미지와 문장 속에는 최종적인 해석을 방해하고 지연시키는, 또 다른 비유로만 파악하고자 할 수는 있지만 끝내 파악할 수 없는 암시와 비의들로 넘쳐나는데 그것들 또한 붙들려고 할수록 우리의 이해로부터 빠져나간다.
“트리시 사람들은 묘하게들 살아가고 있어, 그러니 내가 오늘 나의 지구본 위에서 트리시의 대략적 위치에다가 붉은 점을 표시해 놓았다 해도 하등 놀라운 일이 아니오.”
그 점에 있어 카프카의 세계는 그것을 포착하려는 우리의 노력에 의해서라기보다는 그것 스스로가 현현하는 식으로, 카프카적인 비유를 들자면, 어떤 거실의 어둠 속에 서 있던 날개를 펼친 공작이 어떤 조명에 의해 모습을 드러내듯 우리 앞에 불쑥 나타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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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카프카가 활동한 프라하의 칼레르 다리. 카프카는 "보헤미안의 고색창연한 수도인 프라하는 나의 문학적 어머니"라고 말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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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프카를 해석하는 데 있어 공식처럼 얘기되는 불안·소외·부조리 등의 코드를 지참하고 그의 작품에 다가서는 것은 지나치게 안이한 것일 뿐만 아니라 그의 세계의 핵심으로부터 비껴가게 하는 것일 수도 있다. 오히려 우리는 카프카가 자신과 주위 사물과 세계와의 때로는 불편하거나 무안하거나 절망적이거나 유쾌한 사이에서 발생한 것으로 묘사한 지극히 사소한 것들에서, 가령 그가 늘어놓는 종기와 류머티즘과 삔 엄지발가락에 대한 불평 속에서, “짐승과 다를 바 없이 살아가고 있다”는 엄살 속에서, 동생 엘리에게 보낸 편지에 실린 “내 행복이 마음에 걸리거든 이제 만족해도 좋을 거야”라는 표현의 능청 속에서, 그리고 부드러운 빈정거림과 귀여운 심술 속에서 관념을 넘어서 있거나, 관념의 이전에 있는 그의 세계의 핵심을 엿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그의 소설이 일반적인 의미의 소설로부터 끝없이 이탈하려고 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일반적인 형식의 편지로부터 벗어나 있는 그의 편지들은 카프카의 세계를 이해하는 데 많은 단서들을 제공하고 있다.
실제로 카프카는 거의 광적인 편지 쓰기를 통해 자연스럽게 습작을 했으며, 1900년과 1924년 사이에 주로 친구 막스 브로트와 주변 사람들에게 쓴 편지의 많은 부분들이 장차 쓰여지게 될 그의 소설의 소묘로 읽힐 수 있다. 우리는 그 특성상 내밀할 수밖에 없는 그의 편지를 통해 그의 소설의 바탕이 되는 그의 일상적인 사고 작용의 기제와 그의 문체에 자연스럽게 배어 있는 그의 기질적인 특성을 확인할 수 있고, 그를 인간적으로 좀 더 가깝게 느낄 수 있다.
“나는 잠시 졸도해서 의사에게 소리 지르는 기쁨도 잃은 채, 그의 소파에 누워야 했고, 그리고 그동안-그건 매우 이상한 느낌이었다네-마치 손가락으로 치마를 아래로 잡아당기려는 한 소녀가 된 듯한 느낌이 들었다니까.”
여전히 카프카의 세계는 이와 같은 기이하면서도 아름다운 문장들 속에 무한한 용적으로 매장되어 있으며, 누군가의 손에 의해 채굴되기를 기다리고 있다. 한여름 대낮에 낮잠을 잘 때 퇴침으로 쓰기에 알맞은 부피의 이 번역서를 내는 데 가담했을 모두의 노고에 경의를 표해 마땅한 이 두꺼운 책을 읽은 후면 카프카가 이 편지 속에서 묘사한, 어느 짧은 낮잠 후 눈을 떴을 때 그의 어머니가 정원에 있는 한 여인에게 무엇을 하고 있냐고 묻자 “정원에서 간식을 들고 있는 중이어요”라는 대답을 들으며 느끼는 삶의 낯설음이 주는 놀라움을 느낄 수도 있을 것이다.
(정영문·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