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춘수의「꽃」
―한국의 명시 비평·8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香氣에 알맞는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 ―「꽃」전문
「진달래꽃」이 소월에게 명성을 안겨준 것처럼 독자들로 하여금 김춘수(金春洙 ; 1922~2004)를 기억하게 만든 작품은 바로 이 「꽃」이라고 할 수 있다.
비교적 초기에 제작된 이 작품은 작자의 개인적인 기호와는 무관하게 독자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사실 김춘수 자신은 이 작품에 대해 별로 의미를 부여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그가 지향해 왔던 무의미 계열의 작품들과는 거리가 멀기 때문이다.
소녀적 감성에 호소하는 센티멘털한 낭만적 작품이기는 하지만 사랑과 존재의 의미를 환기시키는 가작으로 평가할 만하다.
작품의 의미 구조는 다음과 같이 단순하다.
1) 내가 그의 이름을 부르기 전 그는 ‘몸짓’에 불과했다.
2) 내가 그의 이름을 부르니 그는 나의 ‘꽃’이 되었다.
3) 누가 내 이름을 불러다오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4) 우리들은 서로에게 그 무엇― ‘눈짓’이 되고 싶다
감정의 갈등이나 정서의 굴절 같은 것도 별로 보이지 않는다.
내가 대상(그)을 인식하기(이름을 부름) 전에는 대상은 나에게 아무런 의미도 없는 존재(몸짓)였으리라.
내가 대상을 인식하고부터 나와 대상의 관계는 새롭게 이루어지고 대상은 비로소 나에게 가치 있는 존재(꽃)로 드러나게 된다.
존재의 가치는 서로의 관계 속에서 형성된다.
타자의 인식에 의해 나의 존재 의의도 드러내고 싶다.
누군가의 사랑을 받으며 나도 그의 소중한 존재이고 싶다.
우리들은 서로에게 소중한 존재로 자리하고 싶다.
대강 이러한 의미를 지닌 작품이다.
그렇다. 세상에는 많은 사람들이 존재하지만 그들 모두가 나에게 한결같이 소중하지는 않다.
나와 어떤 관계를 갖느냐에 따라 나에게 소중한 존재가 되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한다.
그 관계는 나의 관심의 소산이다.
내가 어떠한 관심을 갖느냐에 따라 우리는 연인이 될 수도 있고 생면부지의 남으로 머물고 말 수도 있다.
사물과 나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내 정원에 옮겨 심은 한 그루 매화나무는 내게 소중한 존재가 되지만 내 시야 밖에 자리한 이역의 수많은 수목들은 내게 별 의미가 없다.
나도 다른 사람들의 관심의 대상이 되고 싶다.
그래서 그의 소중한 존재로 사랑 받고 싶다.
이 작품은 이러한 우리의 보편적이고 근원적인 욕망을 노래하고 있으므로 많은 사람들의 흉금을 울린 것으로 보인다.
이 「꽃」은 시집 『꽃의 소묘』(1959),『부다페스트에서의 소녀의 죽음』(1959)등에 수록된 것과 1982년 이후에 간행된 전집들에 수록된 내용이 약간의 차이를 지닌다.
끝에서 두 번째 행의 ‘나는 너에게 너는 나에게’가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로 바뀌고, 마지막 행의 ‘의미’가 ‘눈짓’으로 교체되었다.
뒤에 출간된 전집의 작품을 개정된 정본으로 볼 수 있을 것 같다.
그런데 아무래도 그 ‘눈짓’이라는 시어가 마음에 좀 걸린다.
‘의미’라는 관념어보다는 감각적이라고 생각해서 그렇게 바꾸었을지 모르지만 작품 전체로 보았을 때 조화롭지 못한 것 같다.
제1연에서의 ‘몸짓’은 부정적인 의미를 담고 있는데 비해 제4연의 ‘눈짓’은 긍정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
물론 ‘몸짓’은 무의미한 형상쯤으로 이해할 수 있고, ‘눈짓’은 서로의 영교(靈交)나 전심(傳心)의 동작쯤으로 해석을 못 하는 바는 아니다.
하지만 규모가 큰 ‘몸짓’을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하면서, 규모가 작은 ‘눈짓’을 궁정적인 의미로 사용하는 것이 어딘지 좀 어색해 보인다.
뿐만 아니라, ‘눈짓’은 앞의 제2, 3연에서 제시된 ‘꽃’에 상응한 소중한 존재를 표상해야 하는 시어다.
아니, 꽃보다도 오히려 더 강렬한 느낌을 주는 시어가 ‘눈짓’의 자리에 놓였어야 하리라.
그래야 제4연의 제2행에서 ‘무엇’이 되기를 강조하는 문맥에도 어울린다.
그런데 그 ‘무엇’을 ‘눈짓’이라고 명명하며 마무리를 짓는 것은 실로 맥이 풀리는 서술이 아닐 수 없다.
계속 반복해서 사용하는 것이 단조롭다고 생각되어 ‘꽃’ 대신 아마 ‘눈짓’을 끌어다 썼으리라.
추상적인 말이기는 하지만 차라리 ‘사랑’이나 ‘생명’쯤으로 바꾸어 썼더라도 오히려 더 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게 바꾸어 놓으면 너무 통속적인가?
그렇다면 좀더 적절한 다른 시어를 찾아내지 못할 것도 없으리라.
‘눈짓’보다는 좀 덜 간지러운 말로…
(원로시인 임보님의평)
이육사의 「절정」
매운 季節의 챗죽에 갈겨
마츰내 北方으로 휩쓸려오다
하늘도 그만 지쳐 끝난 高原
서리빨 칼날진 그 우에 서다
어데다 무릎을 꿇어야 하나?
한발 재겨디딜 곳조차 없다
이러매 눈감아 생각해 볼밖에
겨울은 강철로 된 무지갠가 보다. ―「절정」전문
『원본 이육사전집』(집문당, 1986)에 수록되어 있는 이육사(1904∼1944)의 현대시는 총 33편에 불과하다. 기록에 의하면 1930년부터 작품 활동을 시작했으니 14년 동안의 시작(詩作)인 셈인데 과작이라 아니할 수 없다. 그러나 대부분의 작품이 상당한 수준을 유지하고 있는 가작들이다. 『文章』(1940.1.)에 발표되었던 「절정」은 「광야」와 더불어 육사의 대표작으로 자주 거론되고 있는 수작이다. 소품이긴 하지만 생존의 절박·처절함이 극적으로 구현된 작품이다. 작품의 내용을 연별로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제1연 : 화자는 시대의 가혹한 시련에 견디다 못해 드디어 북방으로 밀려왔다.
제2연 : 하늘도 그만 지쳐 창조하기를 끝내버린 고원, 서릿발이 칼날처럼 날카롭게 돋아나 생명체가 안식할 수 없는 불모의 지역인데 그곳에 화자가 선다.
제3연 : 하늘에 기구라도 해야할까 보다. 그러나 그곳은 너무 협소해서 무릎을 꿀 수도 없다. 무릎을 꿇기는커녕 한 발자국 내디딜 여유도 없는 절박한 공간이다.
제4연 : 그러니 차라리 눈을 감고(절박한 현실을 외면하고) 이런 생각으로 마음을 달랠 수밖에 '겨울은 강철로 된 무지갠가 보다'고―.
그런데 이 작품의 마지막 행이 적잖이 난해하다. 두 개의 복합 은유 구조로 되어 있다. '겨울은 무지개다'와 '무지개는 강철로 되어 있다'라는 두 은유의 결합이다. '겨울'과 '무지개'와 '강철'은 어떠한 동질성도 공유하고 있지 않다. 아니 동질성보다는 차라리 이질성이 강해 융화보다는 서로를 거부하는 입장들이라고 할 수 있다. 무겁고 견고한 불변의 특성을 지닌 '강철'과 아름답고 환상적인 가변의 특성을 지닌 '무지개'가 어떻게 연결될 수 있으며, 이런 '강철의 무지개'가 또한 어떻게 매서운 '겨울'과 결합이 가능한가? 논리적으로는 설명될 수 없는 역설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시의 세계에서는 이러한 역설이 허용되기도 한다. 그리하여 시적 언술은 논리적 서술로는 성취될 수 없는 무애(無涯)의 경지에 손을 뻗기도 한다. 아니, 낯선 새로운 세계를 창조해낸다는 표현이 더 적절할지도 모른다.
화자가 살고 있는 시대는 겨울과 같은 냉혹한 추위를 지니고 있다. 그 시대적 혹한은 화자의 능력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강철과 같이 굳고 무거운 요지부동의 정황이다. 그러나 화자는 이 확고부동의 절대적 현실을 한 가닥 무지개와 같은 덧없는 환상이라는 생각으로 극복하고자 한다. 그러나 화자는 무지개를 통해 이 지상이 '덧없음'과 더불어 '아름답다'는 생각을 떨쳐버리지 못한다. 현실에 대한 원망과 체념과 애착의 미묘한 복합 정서를 이중의 은유 구조 속에 담았다. 좀 난해키는 하지만 이 작품의 시안(詩眼)에 해당한 요처라고 할 수 있다.
수작이긴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 작품에도 몇 군데 아쉬운 점이 없지 않다.
첫째, 제2연의 첫 행 '하늘도 그만 지쳐 끝난 고원'은 어딘가 좀 어색한 감이 없지 않다. '하늘도 그만 지쳐 끝난'이 하늘의 상태를 그리는 것이라면 하늘이 고원에 와서 끊기었다는 표현이 된다. 그러나 이 시속의 화자는 대지를 따라 쫓겨오고 있기 때문에 하늘의 상태를 그리는 것이라기보다는 지상의 상태를 그리는 것으로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그렇다면 하늘이 이 대지를 창조하다가 지쳐서 고원으로 마무리를 지었다고 이해할 수 있다. 정확한 표현은 자동사 '끝난'이 아니라 타동사 '끝낸'으로 해야 할 것이다. 그래도 역시 어색하다. 그러니 '하늘'을 '大地'로 바꾸는 것이 어떨까 하는 생각이다. 대지도 지쳐 더 뻗어가지 못하고 고원으로 끝나는 마지막 궁지일 것이 아닌가.
둘째, 제4연 첫 행의 '생각해 볼밖에'는 표현이 너무 미온적이고 체념적이다. 화자의 절박한 심경과 강인한 의지가 누그러들고 말았다. '생각'이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더라도 이어지는 다음의 행이 화자의 발언임은 알 수 있다. 그러니 이 구절은 '입술을 깨물 수밖에' 정도로 표현한다면 최후까지 살아있는 화자의 의지를 담을 수 있을 것 같다.
(원로시인 임보님의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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