言/젖지않을江

저마다 별

oldhabit 2008. 9. 2. 15:43

           저마다 별 

 

                         -도종환-

 

 

유리창 밑에서 잠을 자려고 이불과 요를 들어 옮기노라면 기분이 좋아진다.

음력으로 하순을 넘기면서 점점 그믐에 가까워져 가면 저녁에 달이 안뜨기 때문에 밤하늘에는 별만 총총하다.

내가 잠을 자려고 이불을 펴는 곳은 한쪽 벽 전부가 곡면유리로 되어 있다.

불을 끄고 누우면 머리 위에서 발끝까지 별이 가득하다.

주위에 집도 없고 가로등이나 신호등 같은 것도 없다.

오직 별빛만 반짝인다.

이렇게 깊은 산속에 누워서 별을 바라보며 잠 잘 수 있다는 것이 얼마다 복 받은 일인가. 내겐 너무나 과분한 축복이다.

다른 사람들에게도 이 별을 보여주었으면 좋겠다.

혼자 보기엔 너무 아깝고 미안하다는 생각이 든다.

별은 저마다 중심이다.

몇 개의 별들이 모여 저마다 귀여운 짐승이 되기도 하고 물고기나 삼각형이 되기도 하며 아름다운 처녀나 천년을 이어오는 신화의 주인공이 되기도 한다.

그 별들은 일정한 물결을 따라 흘러간다.

저마다 배가 되어 밤하늘을 저어간다.

노도 없고 닻도 없지만 나란히 서쪽으로 흘러가는 게 보인다.

잠자리에 들었을 때 건넛산 위에 다정하게 손을 잡고 떠 있던 삼형제별이 자다 깨보면 하늘 중턱에까지 옮겨 와 있고 새벽이면 추녀 끝을 넘어간다.

그런데 그 별들이 대장별의 지휘를 받으며 일사분란하게 항해를 하는 것 같지는 않다.

그저 몇 개씩의 별들이 모여 손에 손을 잡고 편안하게 자기들끼리 여행을 가는 것처럼 느껴진다.

페가수스는 자기가 동쪽 하늘의 중심이고 안드로메다는 안드로메다 대로 물병자리는 불병자리 대로 염소자리는 염소자리대로 자기가 하늘의 중심이다.

저마다 다 중심을 이루고 있다.

그것들이 모여 별밭을 이루고 은하를 이룬다.

나는 그런 별들의 나라가 좋다. 밤이 점점 깊어지고 깊은 밤의 정점에서 날이 바뀌고 별들도 많이 배를 저어갔다 싶으면 그때쯤 그믐달이 모습을 드러낸다.

잘 다듬어진 고운 눈썹 같은 그믐달, 그 달을 말없이 호위하며 몇 발짝 뒤에서 따라오는 북두칠성, 그들은 어둑새벽이 오면서 별들이 미명의 수평선을 무사히 다 넘어가는지 지켜본다.

그리고 북두칠성까지 하늘의 수평선을 다 넘어가면 그믐달 혼자 서늘해진 새벽하늘을 지킨다.

아침 해가 뜨기 전까지의 몇 시간 새벽 하늘의 중심은 은빛 달이다.

해가 뜬 뒤에도 얼마쯤은 더 자리를 지키다 소리 없이 몸을 감춘다.

우리가 사는 세상도 저마다 자기들이 중심인 세상으로 바뀌어 가고 있다.

힘 있는 지도자를 중심으로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한데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제 중심은 여러 개로 나뉘어져 있다.

눈에 보이는 큰 권력도 그렇게 나뉘어 있지만 우리 생활의 여러 부분도 크고 작은 별자리들이 모여 그물코를 이루고 있는 모습이다.

온라인과 오프라인에서 마음이 같은 사람들이 모임을 이루고 취향이 같은 사람이 모이고 색깔이 비슷한 사람끼리 모여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있다.

한 사람이 여러 갈래로 연결되어 있기도 하고 크고 작은 사람들의 동네가 모여 태양계가 되고 은하계가 되어 있다.

집중화가 잘 되지 않고 통일성도 떨어지며 개인화 파편화 되어간다고 걱정하는 소리가 들리고, 그게 사실이기도 하지만 좋은 점도 많다.

개인이 전체의 작은 부품에 지나지 않고 뛰어난 능력을 가진 사람 밑에서 늘 조역으로밖에 서 있지 못하던 사람들이 다 저마다 자기 삶의 주인공이 되어가는 모습이 우선 좋다.

영웅만 주목 받고 나머지 인물들은 영웅을 위해 말없이 희생해야 하던 시대가 아니라 저마다 별이 되어 자기 역할과 자기 이름을 소중히 여기는 시대로 바뀐다면 그것도 좋은 일이다.

나도 오랫동안 변두리의 삶을 살아온 사람이다.

실용적인 관점에서 보면 나는 참 인생이 안 풀리는 사람이다.

그림을 그리고 싶었지만 그 길로 갈 수 없었고, 공부를 하고 싶었지만 어려서부터 경제적인 어려움 때문에 제대로 하지 못했다.

성적에 맞추어 진학을 한 게 아니라 가정환경을 따라 지방으로 학교를 옮겨 다녔으며, 어렵사리 박사과정을 마치던 해에 감옥에 끌려가야 했고, 겸임교수를 하고 있는데 중학교로 복직발령을 받았다. 사

랑은 불행한 결말로 끝이 나고, 일생에 단 한 번 많은 돈을 벌 수 있는 기회가 왔는데 그걸 버리고 돈 안 되는 길을 선택하였으며, 권력이 내미는 손길을 잡지 않았다.

나라고 왜 중심으로 들어가고 싶지 않았겠는가. 그러나 나는 변두리를 선택했다.

내가 서 있는 곳을 먼저 사람답게 살 수 있는 곳으로 바꾸는 일이 중심으로 들어가는 일 못지않게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내세울만한 이렇다할 학벌도 경력도 가지지 못했다.

그러나 나는 그런 모든 운명 앞에서 나를 포기하거나 자학하지 않았다. 그것이 불운이든 불행이든 절망이든 모두 시와 문학으로 바꾸었다.

그리고 내가 있는 곳이 내 삶의 중심이면 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어느 곳에 가서 문학 강연을 하든 어디에 글을 발표하든 나 자신을 소개할 때 내가 변두리 사람임을 한 번도 숨기지 않았다.

내가 있는 곳이 어디든 그곳이 중심이라고 생각했다.

지금 내가 잠자는 이 적막한 첩첩 산중도 우주의 중심이다.

오랫동안 중심에 자리 잡고 있는 사람은 지금까지 누렸던 힘과 권위를 조금 내려놓고 이름 없는 존재로 물러나 있던 사람들의 목소리가 더 반영되고, 그렇게 조금씩 평등을 향해 나아가야 한다.

그리하여 나만 소중한 게 아니라 내 옆에 있는 사람, 내가 만나는 사람이 다 나처럼 소중한 사람이라는 걸 알게 되는 세상이 왔으면 좋겠다. 사람을 수단으로 여기지 말고, 사람을 내 욕심을 채우기 위한 도구로 생각하지 않고, 사람이 가장 크고 값진 재산이라는 걸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

이 세상의 모든 일들이 다 사람과 사람이 모여서 하는 일이고 사람을 잃으면 가장 큰 것을 잃는 것이란 걸 늘 기억하며 살았으면 좋겠다.

사람은 저마다 별이다. 별에 붙인 학벌, 출신, 지역, 성별, 재산, 지위로 별을 평가하지 말아야 한다.

그 자체로 소중한 줄 알아야 한다.

능력과 사람됨은 볼 줄 모르고 겉에 드러나는 헛된 이름표와 계급장과 외피로 사람을 판단하는 어리석음에서 벗어나야 한다. 왕별 하나만 반짝이는 밤하늘 보다 살아 있는 모든 별이 다 반짝이며 빛나는 하늘이 더 아름답다.

큰 별도 있고 작은 별도 있으며 눈에 금방 뜨이는 별도 있고 희미한 별도 있지만 그런 별들이 모여 은하를 이룬다.
오늘밤도 하늘은 아름다운 별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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