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연명-
자! 벼슬에서 물러나 내 집의 논밭으로 돌아가자. 전원이 황폐하고 있거늘, 어찌 돌아가지 않을 것이냐? 이미 내가 잘못하여 스스로 벼슬살이를 했고 따라서 정신을 육신의 노예로 괴롭혔거늘 어찌 혼자 한탄하고 슬퍼만 해야 하겠는가?
지난 일은 공연히 탓해야 소용이 없음을 깨닫고 또한 앞으로 바른 길을 좇는 것이 옳다는 것을 알았노라. 사실 내가 길을 잃고 헤매기는 했으나 아직은 그리 멀리 벗어난 것은 아니다. 그리고 이제는 각성하여 바른 길을 찾았고 지난 날의 벼슬살이가 잘못이었음도 깊이 깨달았노라.
집으로 돌아가는 배는 출렁출렁 가볍게 옷자락을 타고 떠 가며, 표표히 부는 바람은 옷자락을 불어 날리고 있다. 어서 집으로 가고 싶은 심정으로 길가는 행인에게 앞으로 길이 얼마나 남았는가 묻기도 하고, 또 새벽 일찍 길에 나서며 아직도 새벽빛이 희끄무리한 것을 한스럽게 여기기도 한다.
마침내 저 멀리 나의 집 대문과 지붕이 보이자, 나는 기뻐서 뛰었다. 머슴 아이가 길에 나와 나를 맞고, 어린 자식은 문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뜰 안의 세 갈래 작은 길은 온통 잡초에 덮이어 황폐했으나, 아직도 소나무와 국화는 시들지 않고 남아 있다. 어린 아이의 손을 잡고 방 안으로 들어가니, 술단지에는 아내가 정성드려 담근 술이가득차 있다.
술단지와 술잔을 끌어 당기어 혼자서 자작하여 술을 마시며, 뜰의 나무 가지들을 보며 즐거운 낯으로 미소를 짓는다. 또 남쪽 창가에 몸을 실리고 남쪽들을 내다보며 마냥 활개를 펴고 의기양양한 기분이 되고, 참으로 사람은 무릎을 드리울 만한 좁은 내 집에서도 충분히 안빈낙도할 수 있음을 실감한다.
전원을 매일 거닐며 손질을 하자 제법 운치있게 되었다. 또 대문 있기는 해도 찾아오는 사람이 없으니 노상 닫혀져 있다. 지팡이를 집고 이리저리 소요하다가 아무 곳이나 내키는 대로 앉아 쉬기도 하고 때로는 고개를 높이 추켜 올리고 먼 곳을 바라보기도 한다.
야심 없는 구름은 산 골짜기로부터 유연하게 높이 떠 오르고, 날기에 지친 새들은 저녁에 제집으로 돌아올 줄 안다. 마침 해도 어둑어둑 저물어 들어가려 할 무렵, 나는 외로운 소나무를 어루만지며 서성대고 맴돌고 있노라.
돌아왔노라! 이제부터는 세속적인 교제를 그만두고 속세와 단절된 생활을 하리! 속세와 단절된 생활을 하리! 속세와 나는 서로가 어긋나고 맞지를 않거늘, 내 다시 수레를 타고 무엇을 찾아다닐까 보냐!
일가 친척들과 정이 넘치는 이야기를 기쁜 마음으로 주고 받으며, 한편 혼자 있을 때는 거문고나 책을 가지고 우울함을 해소한다. 농부가 나에게 봄이 왔으니, 앞으로는 서쪽 밭에서 농사를 지어야 할 거라고 말한다.
포장친 수레를 타고 육로를 가기도 하고, 또 혹은 혼자서 조각배를 짓고 물길을 따라 멀리까지 농사를 지으러 간다. 배를 타고 강물을 따라 구불구불 깊은 골짜기로 들어갔다. 다시 이번에는 우툴두툴 높고 험한 산을 넘기도 한다. 나무들이 싱싱하니 즐거운 듯 뻗어나 자라고, 샘물들은 졸졸 솟아나 흐르기 시작한다.
만물이 때를 만나 무럭무럭 자라는 것이 좋다. 그러나 내 자신은 이렇게 새봄을 맞는 사이에 차츰 인생의 종점으로 다가가서 죽을 것이니 감개무량하게 느껴진다. 아! 이제는 나의 인생도 그만인가 보다!
내 몸을 이 세상에 맡기고 살 날도 앞으로 얼마나 될지? 그러나 어찌 나의 마음을 대자연의 섭리에 맡기고 죽으나 사나 좇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이제 새삼 초조하고 황망스러운 마음으로 욕심내고 바랄 것이 무엇이 있겠느냐? 현실적으로 나는 부귀도 바라지 않고 또 죽은 후에 천제가 사는 천국에 가서 살 것이라고 기대도 하지 않는다.
때가 좋다. 행각되면 혼자 나서서 거닐고, 또 때로는 지팡이를 세워 놓고 김매기도 한다. 동쪽 언덕에 올라가 조용히 읊조리고, 맑은 시냇가에서 시를 짓는다. 모름지기 천지조화의 원칙을 따라 죽음의 나라로 돌아가자! 또 천명을 감수해 즐기다면, 그 무엇을 망설일 것인가.
--- 장기근 편역 도연명에서...
歸去來兮 귀거래혜
돌아가리라! 전원이 황폐해지려 하니 어떻게 돌아가지 않겠는가? 이미 마음을 형체의 사역(使役)으로 삼았으니 어찌 실심하여 홀로 슬퍼하고만 있으리요? 지난 일은 바로잡을 수 없음을 깨닫고 오는 일은 따를 수 있음을 알겠도다. 참으로 길을 잃었으나 그래도 멀지 않아서 오늘이 옳고 어제가 잘못되었음을 깨달았도다. 배는 흔들흔들 가벼이 떠오르고 바람은 살랑살랑 불어 옷깃을 흩날리도다. 나그네에게 앞길을 물으니 새벽빛이 희미함을 한스러워하도다. 이윽고 내 집이 눈에 들어와 기뻐서 뛰어가노니, 심부름하는 아이는 반갑게 맞이하고 어린 것은 문 앞에서 기다리는도다. 세 가닥 뜰안 길은 황폐해져 가나 소나무와 국화는 오히려 예와 같구나. 어린 아들의 손을 잡고 방안으로 들어가니 술이 있어 항아리에 가득하여 술병과 잔을 가져와 혼자서 잔질하다가 뜨락의 나뭇가지를 보고 웃음을 머금는다. 남쪽 창에 기대어 오만함을 부치니 무릎이나 펼 만한 방이 오히려 편안함을 알겠도다. 매일같이 정원을 거니는 것으로 취미를 삼고, 문이야 달았으되 언제나 잠겨 있다. 지팡이를 짚고서 거닐다가 쉬다가 가끔 머리를 들어 멀리 바라보니 구름은 무심히 산등성이에서 피어 오르고,새는 날기에 지치면 돌아올 줄을 아는구나. 햇빛은 가물가물 막 어두워지려 하는데 외로이 선 소나무를 어루만지며 서성대도다. 돌아가리라! 사귐을 그만두고 교유(交游)를 끊어야지. 세상이 나와 서로 맞지 않으니 다시금 수레를 타고 무엇을 구하리요? 친척 간의 정담을 기뻐하고 거문고와 책을 즐기면서 시름을 녹이노라. 농부가 내게 봄이 왔다고 일러 주니 이제부터 서쪽 밭에서 일을 하게 되었구나. 혹은 휘장을 친 수레를 타고, 때로는 홀로 떠 있는 배의 노를 저어서, 깊은 산 골짜기의 시내를 찾고 험한 산길의 언덕을 넘으니, 나무는 즐거운 듯 꽃이 피려 하고 샘물은 졸졸졸 비로소 흘러 내린다. 만물이 제철 맞음을 부러워하면서 나의 삶이 끝나감을 느끼는도다. 그만두어라. 몸뚱이를 우주 안에 붙여 둠이 다시 몇 때나 되겠는가. 어찌 마음대로 가게 내버려 두고 머무는 대로 맡기지 않고 어찌하여 서둘러 어디로 가고자 한단 말인가. 부귀는 내가 원하는 바 아니며 황제 계신 서울이야 기약할 수 없도다. 좋은 시절 생각하며 외로이 걷기도 하고, 혹은 지팡이를 세우고서 김매고 북돋기도 하노라. 동쪽 언덕에 올라 휘파람을 불고, 맑은 물에 다다라서 시도 짓노라. 애오라지 자연의 조화에 따라 돌아가니 무릇 천명을 즐기되 다시 무엇을 의심하랴.
歸去來兮(귀거래혜) 돌아가야지
요점정리 지은이 : 도연명(陶淵明)
내용 연구 형체(形體): 몸뚱이를 뜻함.
歸去來兮 귀거래혜
이해와 감상 이 작품은 도연명이 진나라 심양도 팽택 현령으로 재직하던 41세 때 지은 작품이다. 다섯 말 쌀의 봉급을 위해 상급 기관의 관리들에게 굽신거려야 하는 벼슬을 사직하고 집으로 돌아오면서 그 결의를 술회한 작품이다. 처음에는 고향의 전원이 황폐해졌음을 걱정하여 거기에 돌아가겠다는 결심을 밝힌다. 집에 돌아간 그는 한적한 생활에 만족을 느끼고 마음 속으로 즐거워 한다. 앞으로의 생활에서도 자연의 추이에 몸을 맡기고 유유자적하면서 살겠다는 뜻을 말한다. 안심 입명의 경지에 도달한 모습을 보인 것이다. 또 어떤 분을 이 글을 진나라가 망한 다음 두 임금을 섬길 수 없다는 지조를 나타낸 것으로 이해하기도 한다. 글의 마지막에서 '자연의 조화에 따라 돌아가니 무릇 천명을 즐기되 다시 무엇을 의심하랴' 한 대목에서는 도연명의 인생관이 나타나 있다.
심화 자료 귀거래사(歸去來辭) 歸去來辭는 중국 진(晉)나라 시인 도연명(陶淵明)이 지은 운문(韻文). 405년(진나라 의회 1) 그가 41살 때 마지막 관직이었던 팽택현(彭澤縣)의 영(令)자리를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올 때의 심경을 노래한 것으로 초사체(楚辭體)를 따른 전문(全文) 240여 자(字)는 각운(脚韻)이 다른 4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귀거래혜(歸去來兮)>로 시작되는 제l장은 관리생활을 떠나 고향으로 돌아가는 심경을 읊었고, 제2장은 집에 도착한 기쁨을 노래했다. 제3장은 고향에서의 생활과 그곳에서 얻은 철학을 담았으며, 제4장은 자유를 누리면서 자연의 섭리에 몸을 맡겨 살아가는 것이 좋겠다는 자신의 모습을 노래했다. 이 작품을 쓴 동기를 밝힌 서문에는 원래 성격에 맞지 않는 관직을 누이동생의 죽음을 구실로 그만둔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양(梁)나라의 소명태자(昭明太子) 소통(簫統)의 《도연명전(陶淵明傳)》에는, 감독관의 순시를 의관속대(衣冠束帶)하고 맞이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오두미(五斗米;적은 봉급)를 위해 향리의 소인에게 허리를 굽힐 수 없다고 하며 그 날로 사직하였다고 전한다.
도연명 陶淵明 陶淵明 (병)Tao Yenming (웨)Tao Yenming. 365~427. 중국의 대표적 시인으로 이름은 잠(潛). 호는 오류선생(五柳先生). 연명은 자이다. 동진(東晉) 말기부터 남조(南朝)의 송(宋:劉宋이라고도 함) 초기에 걸쳐 생존했다. 생애 강주(江州) 심양군(尋陽郡:지금의 장시 성[江西省] 주장[九江]) 시상현(柴桑縣:지금의 싱쯔 현[星子縣])에서 태어났다. 그의 가문은 대대로 남방의 토착 사족(士族)으로, 북조로부터 내려온 귀족이 절대적 실권을 장악하고 있던 당시의 남조 사회에서는 영달의 길에서 소외된 압박받는 계층이었다. 그러나 도연명이 평생 동경했던 증조부 도간(陶侃:259~334)은 동진 초에 장사군공(長沙郡公)·대사마(大司馬:최고군사령관)까지 승진했고, 할아버지 도무(陶茂)도 무창(武昌)의 태수(太守)로 재임했다. 그러나 아버지는 은둔생활을 했기 때문에 이름조차 알려져 있지 않다. 어머니는 정서대장군(征西大將軍) 환온(桓溫)의 장사(長史:막료장)였던 맹가(孟嘉)의 넷째 딸이었다. 도연명은 그 사이에서 태어난 외동아들이었던 것 같다. 도연명의 첫번째 관료생활은 29세 때 자기가 살고 있던 강주의 좨주(祭酒:州의 교육장)로 취임한 것이었으나 곧 사임했다. 2번째 관료생활은 35세 때 당시 진(晉)나라 최대 북부군단(北府軍團)의 진군장군(鎭軍將軍)인 유뢰지(劉牢之)의 참군(參軍:참모)으로 취임한 것인데 이것 역시 곧 그만두었다. 3번째는 유뢰지의 휘하를 떠난 직후, 36~37세 무렵 형주(荊州:지금의 장링[江陵]) 자사(刺史) 환현(桓玄)의 막료로 취임한 것이다. 그러나 며칠 안되어 모친상을 당해 고향인 심양으로 돌아가 3년상을 치렀다. 이후 강주자사·참군 및 팽택(彭澤) 현령(縣令) 등의 관료생활은 고향에서 가까운 심양군 안에서 지냈다. 도연명이 10여 년에 걸친 관료생활을 최종적으로 마감하고 은둔생활에 들어간 시기는 의희(義熙) 원년(405) 11월 41세 때였다. 그는 팽택 현령이 된 지 겨우 80여 일 만에 자발적으로 퇴관했다. 퇴관의 결정적인 동기에 관해서는 다음의 유명한 일화가 있다. 그해말에 심양군 장관의 직속인 독우(督郵:순찰관)가 순찰을 온다고 하여 밑의 관료가 "필히 의관을 정제하고 맞이 하십시오" 하고 진언했더니, 도연명은 "오두미(五斗米:월급) 때문에 허리를 굽혀 향리의 소인을 섬기는 일을 할 수 있을손가"라고 말한 뒤 그날로 사임하고 집에 돌아갔다고 한다(〈宋書〉 隱逸傳). 또 한편으로 이때의 사퇴 동기에 관해서 도연명 자신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취임해서 어느 정도 되자 집에 돌아가고 싶은 기분이 들었지만 그럭저럭 벼가 익거든 빠져나가려고 생각하던 차에 누이의 부음이 들려오자 조금도 참을 수 없게 되어 스스로 사임하고 집에 돌아왔다"(〈歸去來辭〉 序). 이때 나온 작품이 유명한 〈귀거래사〉·〈귀전원거오수 歸田園居五首〉이다. 이리하여 도연명은 이후 죽을 때까지 20여 년 간 은둔생활에 들어갔다. 고향에 은거한 지 3년째 되는 해에 갑작스런 화재로 생가가 타버리자 그는 일가를 거느리고 고향을 떠나 주도인 심양의 남쪽 근교에 있는 남촌(南村:또는 南里)으로 이사해서 그곳에서 만년을 보내게 되었다. 이사한 후 술을 좋아하던 그는 차츰 빈궁한 생활로 접어들었다. 그러나 이사를 함으로써 잃어버린 것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는 강주의 장관 왕홍(王弘)을 비롯해서 은경인(殷景仁)· 안연지(顔延之) 등 많은 관료·지식인과 친교를 맺을 수 있었다. 그가 후세에 이름을 남길 수 있었던 것도 후에 남조 송의 내각과 문단의 지도자가 된 왕홍과 안연지를 친구로 두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도연명의 시문으로 현재 남아 있는 것은 4언시(四言詩) 9수, 5언시 115수, 산문 11편이다. 이중 저작연대가 명확한 것이나 대강 알 수 있는 것은 80수뿐이다. 그밖의 것은 중년기 이후, 즉 그가 은둔생활을 보낸 약 20여 년 간에 지어진 것으로 추측된다. 작품 도연명의 작품으로 가장 특색있고 후세까지도 중시되고 있는 것은 말할 나위도 없이 5언시이다. 우선 5언이라는 형태는 육조시대를 통해 시인들이 특히 애호한 보편적인 형식이었고 그의 시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러나 그의 시가 특히 주목되고 애송되는 까닭은 고요하고 자연스러운 읊조림과 멀리 세속의 티끌을 넘어서서 맑고 깊은 운치를 칭송하는 시의 경지 때문이다. 예부터 특히 유명한 〈음주이십수 飮酒二十首〉 중의 제5수를 예로 들어보자. "마을 안에 엮어 놓은 오두막집, 그래도 시끄러운 수레소리 들리지 않네/어떻게 하면 이렇게 되는가요? 마음이 멀면 사는 곳도 외진다오/동쪽 울타리 밑에서 국화를 꺾어 드니 그윽이 보이는 남산(南山)/산기운이 석양에 아름답고 나는 새들도 무리지어 돌아가누나/이 가운데 있는 참뜻, 설명하려고 하나 이미 말을 잊었도다." 여기에서는 자연의 경치와 하나로 융합되는 마음속에서 대자연의 진실 가운데로 침잠하는 도연명의 담담한 자태를 엿볼 수 있다. 시의 표현에 있어서도 당시 궁정 문단에서 유행하던 화려한 기교와는 정반대로 거의 기교라고 할 만한 것 없이 자기의 감회를 자연스럽게 읊조리고 있다. 이렇게 자연스러운 표현을 지향하며 자연스러움과 순박함을 동경한 도연명의 문학은 그의 시에서만 표출된 것이 아니었다. 그의 〈귀거래사〉·〈도화원기 桃花源記〉·〈오류선생전 五柳先生傳〉 등의 산문도 역시 같은 표현방식으로 지어진 주옥 같은 작품들이다. 이들 산문 가운데 특히 〈오류선생전〉은 후세에 도연명 상(像)을 형성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자전적인 작품이다. 도연명의 시문에는 확실히 고요하고 맑은 심경을 읊조린 작품이 많다. 그러나 이러한 세속을 초월한 작품이 그의 시문 전부를 차지하고 있지는 않다. 편수가 그다지 많지 않고 또 후세에 그렇게 유명한 작품이 되지는 못했어도 그의 시문 가운데에는 쇠락한 운명의 슬픔을 읊은 것이라든가 가난한 생활의 괴로움을 호소한 것, 행복한 세상사람들을 부러워한 것, 죽음의 공포를 두려워한 것 등 세속적인 작품도 적지 않다. 도연명이 그 생애를 통해서 스스로 정신생활의 이상으로 여긴 것은 앞에 들은 〈음주이십수〉의 시에도 나오는 ' 진'(眞)의 경지였다. 이 '진'이라는 개념은 도연명의 경우 철학적·사상적인 것이라기보다 문학적·감성적 색채가 강했던 것으로 생각되는데, 내용적으로는 자연 그 자체를 의미하는 '순'(淳)이라든가 '박'(朴)이라는 개념으로 바꿔도 좋을 것이다. 더욱 구체화해서 말하면 하늘 높이 자유로이 나는 '새'나 깊은 물 밑에서 자유로이 헤엄치는 '물고기'의 경지가 이에 해당한다. 이는 '지교'(智巧)나 '대위'(大僞)와는 정반대의 개념이기도 하다. 요컨대 도연명이 말하는 '진'은 개인의 완전한 자유를 의미하는 것이며, 복희(伏羲)·신농(神農)이 다스리던 이상적 상고시대에서만 찾아볼 수 있는 것이다. 도연명은 중국 역사상 거의 유일한 본격적인 은일시인이었으므로 그에 대한 후세의 평가는 매우 높다. 그의 친구였던 안연지의 〈도징사뢰 陶徵士〉는 그의 고결한 인품을 칭찬한 것이었고, 〈송서〉 은일전을 비롯한 각 정사(正史)에 있는 도연명의 전기와 양(梁)나라 소통(簫統)의 〈도연명전 陶淵明傳〉 등도 마찬가지였다. 또 이상하게도 화려한 남조 문학의 극치라고도 할 수 있는 '궁체'(宮體)의 시종(詩宗)이었던 양나라의 간문제(簡文帝:503~551)도 형인 소통과 마찬가지로 열렬한 도연명 숭배자였다. 도연명의 인품과 시문은 이미 육조시대에도 높은 평가를 받고 있었던 것 같은데, 양나라 강엄(江淹:444~505)이 한(漢)부터 진송(晉宋)까지의 시인 30명의 시를 모방해서 지은 〈잡체시 雜體詩〉 30수(〈文選〉 권31)에서는 도연명을 조식(曹植)·육기(陸機) 등의 유명한 시인과 나란히 열거하고 있다. 같은 양나라 사람 종영(鍾嶸)의 〈시품 詩品〉에서도 도연명의 5언시에 중품(中品)의 품격을 매겨놓고 또 "고금 은일시인의 으뜸"이라고 판정하고 있다. 그러나 특히 도연명을 중국 역사상 최고의 시인이라고까지 절찬하여 결정적으로 높이 평가한 사람은 북송(北宋)의 위대한 시인 소식(蘇軾:1037~1101, 호는 東坡)이었다. 이렇게 하여 은일의 성자(聖者), 세속을 초월한 대시인으로서의 이상적 도연명 상은 확립되었다. BIE| 岡村繁 글 | 廉丁三 참조집필 참고문헌 귀거래혜사-도연명시선(세계시인선 43) :, 김학주 역주, 민음사, 1975 도연명 : 장기근 편, 대종출판사, 1975 한역 도연명집 〈회귀〉 6 : 차주환, 1990 도연명의 시전집 상·하(서문문고 229-230) :, 우현민 역주, 서문당, 1972 도연명의 문학사상 〈중국어문학〉 11 : 김주순, 영남중국어문학회, 1986 도연명의 가세와 생평고 〈중어중문학〉 6 : 김주순, 한국중어중문학회, 1984 도연명의 생애와 사상 〈한문학〉 2 : 김재우, 1984 도연명론 〈월간문학〉 2·5(5) : 이원섭, 월간문학사, 1969 도연명의 사상과 문예 〈서울대교양과정부 논문집〉 1 : 최완식, 서울대학교, 1969 도연명의 생애 〈문리대학보〉 7 : 차주환, 서울대학교, 1956 陶淵明傳(吉川幸次郞全集7所收) : 吉川幸次郞, 筑摩書房, 1968 陶淵明硏究 : 大矢根文次郞, 早稻田大學出版部, 1967 (출처 : 브리태니커백과사전)
도화원기(桃花源記) 동진(東晋)의 태원연간(太元年間:376∼396)에 무릉(武陵)에 사는 한 어부가 배를 타고 가다가 도화림(桃花林) 속에서 길을 잃었다. 어부는 배에서 내려 산 속의 동굴을 따라 나아갔는데, 마침내 어떤 평화경(平和境)에 이르렀다. 그곳에서는 논밭과 연못이 모두 아름답고, 닭 소리와 개 짖는 소리가 한가로우며, 남녀가 모두 외계인(外界人)과 같은 옷을 입고 즐겁게 살고 있었다. 그들은 진(秦)나라의 전란을 피하여 그곳까지 온 사람들이었는데, 수백 년 동안 바깥세상과의 접촉을 끊고 산다고 하였다. 그는 융숭한 대접을 받고 돌아오게 되었는데, 그곳의 이야기는 입밖에 내지 말라는 당부를 받았다. 그러나 이 당부를 어기고 돌아오는 도중에 표를 해 두었으나, 다시는 찾을 수가 없었다. 이 글의 배경에는 진인동(秦人洞)을 비롯한 실향민 부락의 전설이 담겨 있으며, 도연명이 노자(老子)의 소국과민(小國寡民) 사상을 유려하고 격조 높은 문장으로 그린 것이다. 이 글은 선경(仙境)의 전승(傳承)에 중대한 역할을 하였으며, 그 유토피아 사상은 후세의 문학 ·예술에 큰 영향을 주었다. (출처 : 동아대백과사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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