言/사는이치知

책 - 쓰레기가 되는 삶들

oldhabit 2010. 9. 6. 02:55

<쓰레기가 되는 삶들> 지그문트 바우만, 새물결

 

포스트모더니즘과 세계화란 결국 자본의 세계화로 드러나고 말았다. 80년 말 사회주의 국가들의 몰락은 모더니즘의 정치적 기획이 실패로 끝나는 느낌을 주었고, 결과적으로 경제의 전제를 확증하는 역할을 하기도 하였다. 이런 일련의 과정을 통해 우리는 국가가 자본에 항복하는 모습을 여러차례 목격하게 되었다. 한국사회의 구조조정과 imf 관리도 그 한 예였다. 과거 국가가 경제의 횡포로부터 개인을 보호하고자 마련했던 복지정책은 하나씩 후퇴하면서 사회국가적 기능이 쇠퇴하였다. 대신, 국가가 자본의 원리를 관철하는 하수기구 역할을 하면서 위험도가 높아지고, 불안에 대한 국가의 경찰기능이 강화되면서 요새국가의 기능이 강화되고 있다. 이것이 이 책에서 지그문트 바우만이 쓰레기를 생산하게된 현대적 조건으로 언급한 것들이다.

이 책에서 자주 나오는 말은, 극단적 소비사회가 유행을 낳고, 인간도 소모품처럼 취급되면서 잉여의 두려움 강화된다는 것이다. 잉여의 발생은 국가의 내부와 외부에서 동시에 일어난다. 대표적인 사례가 망명과 이민, 난민자들이고, 실업자와 홈리스들이며, 바로 우리 자신의 불안이다.

책을 읽으며 내가 특히 주목했던 부분은, 영원이 상실되고 단절과 분절 속에 우리가 더욱더 소비자본주의의 노예가 되어 살고 있다는 점이다. 밤하늘과 산과 바다 등 자연의 압도 앞에 외경을 느끼고 겸허해질 줄 알던 사람들과 이런 모든 것들을 익스트림 스포츠의 배경정도로 바라보는 현대인의 오만한 자기중심성은 비교할 가치도 없다. 현대는 분명 자연과 존재의 신성에 대한 모독의 세기이다. 비록 영원이 실재 관념이 아니더라도, 그것은 나를 압도하는 자연이 동시에 보증하는 역할을 한다. 인간의 무기력과 유한을 상쇄한다고 할까? 

바우만이 이 책에서 어떤 대안을 제시하는 건 아니다.

그는 진단을 할 뿐.

최근 내가 좀더 호기심을 갖는 것은 <무지한 스승>을 쓴 자크 랑시에르다. 그는 암울한 현실에 장밋빛 대안을 제시하지 않지만, 자기의 등불을 켜고 시대를 견디는 법을 알려주는 것 같다. 만인의 평등과 자유, 그리고 존엄은 추상적으로 계량화할 수 없는 것이다. 랑시에르가 숫자 노름인 선거민주주의와 민주주의의 허위를 비판하는 것은 타당해보인다. 경제로부터 정치가 제 역할을 할 수 있는 것은 과연 더 강한 국가로서 되는 것도 아니다. 물론 그런 노력도 해야겠지만. 왜냐하면 정치란 개인이 자기의 삶의 주체로서 의지를 행사해나가는 모든 노력이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아나키스트적 랑시에르의 사유가 좀더 호감 간다.

 

 

= 차례 =

 

서문

01 태초에 설계가 있었다
질서 구축 과정이 만들어낸 쓰레기

02 ‘그들’ 너무 많은가?
경제 발전이 만들어낸 쓰레기

03 각각의 쓰레기는 각각의 처리장으로
지구화가 만들어낸 쓰레기

04 쓰레기 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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