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화녀(桃花女)와 비형랑(鼻荊郞)
제25대 사륜왕(四輪王)의 시호(諡號)는 진지대왕(眞智大王)으로, 성(姓)은 김씨(金氏), 왕비(王妃)는 기오공(起烏公)의 딸 지도부인(知刀夫人)이다. 대건(大建) 8년 병신(丙申; 576, 고본古本에는 11년 기해己亥라고 했는데 이는 잘못이다)에 왕위(王位)에 올랐다. 나라를 다스린 지 4년에 주색에 빠져 음란하고 정사가 어지럽자 나랏사람들은 그를 폐위시켰다.
이보다 먼저 사량부(沙梁部)의 어떤 민가(民家)의 여자 하나가 얼굴이 곱고 아름다워 당시 사람들은 도화랑(桃花郞)이라 불렀다. 왕이 이 소문을 듣고 궁중으로 불러들여 욕심을 채우고자 하니 여인은 말한다. “여자가 지켜야 하는 것은 두 남편을 섬기지 않는 일입니다. 그런데 남편이 있는데도 남에게 시집가는 일은 비록 만승(萬乘)의 위엄을 가지고도 맘대로 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왕이 말한다. “너를 죽인다면 어찌하겠느냐.” 여인이 대답한다. “차라리 거리에서 베임을 당하더라도 딴 데로 가는 일은 원치 않습니다.” 왕은 희롱으로 말했다. “남편이 없으면 되겠느냐.” “되겠습니다.” 왕은 그를 놓아 보냈다.
이 해에 왕은 폐위되고 죽었는데 그 후 2년 만에 도화랑(桃花郞)의 남편도 또한 죽었다. 10일이 지난 어느 날 밤중에 갑자기 왕은 평시(平時)와 같이 여인의 방에 들어와 말한다. “네가 옛날에 허락한 말이 있지 않느냐. 지금은 네 남편이 없으니 되겠느냐.” 여인이 쉽게 허락하지 않고 부모에게 고하니 부모는 말하기를, “임금의 말씀인데 어떻게 피할 수가 있겠느냐”하고 딸을 왕이 있는 방에 들어가게 했다. 왕은 7일 동안 머물렀는데 머무는 동안 오색(五色) 구름이 집을 덮었고 향기는 방안에 가득하였다. 7일 뒤에 왕이 갑자기 사라졌으나 여인은 이내 태기가 있었다. 달이 차서 해산하려 하는데 천지가 진동하더니 한 사내아이를 낳았는데 이름을 비형(鼻荊)이라고 했다.
진평대왕(眞平大王)이 그 이상한 소문을 듣고 아이를 궁중에 데려다가 길렀다. 15세가 되어 집사(執事)라는 벼슬을 주었다. 그러나 비형(鼻荊)은 밤마다 멀리 도망가서 놀곤 하였다. 왕은 용사(勇士) 50명을 시켜서 지키도록 했으나 그는 언제나 월성(月城)을 날아 넘어가서 서쪽 황천(荒天) 언덕 위에 가서는 귀신들을 데리고 노는 것이었다. 용사(勇士)들이 숲 속에 엎드려서 엿보았더니 귀신의 무리들이 여러 절에서 들려 오는 새벽 종소리를 듣고 각각 흩어져 가 버리면 비형랑(鼻荊郞)도 또한 집으로 돌아왔다. 용사들은 이 사실을 왕에게 보고했다. 왕은 비형을 불러서 말했다. “네가 귀신들을 데리고 논다니 그게 사실이냐.”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너는 그 귀신의 무리들을 데리고 신원사(神元寺) 북쪽 개천(신중사神衆寺라고도 하지만 그것은 잘못이다. 이것을 황천荒天 동쪽 심거深渠라고도 한다)에 다리를 놓도록 해라.” 비형은 명을 받아 귀신의 무리들을 시켜서 하룻밤 사이에 큰 다리를 놓았다. 그래서 다리를 귀교(鬼橋)라고 했다. 왕은 또 물었다. “그들 귀신들 중에서 사람으로 출현(出現)해서 조정 정사를 도울 만한 자가 있느냐.” “길달(吉達)이란 자가 있사온데 가히 정사를 도울 만합니다.” “그러면 데리고 오도록 하라.” 이튿날 그를 데리고 와서 왕께 뵈니 집사(執事) 벼슬을 주었다. 그는 과연 충성스럽고 정직하기가 비할 데 없었다. 이때 각간(角干) 임종(林宗)이 아들이 없었으므로 왕은 명령하여 길달(吉達)을 그 아들로 삼게 했다. 임종은 길달(吉達)을 시켜 흥륜사(興輪寺) 남쪽에 문루(門樓)를 세우게 했다. 그리고 밤마다 그 문루(門樓) 위에 가서 자도록 했다. 그리하여 그 문루를 길달문(吉達門)이라고 했다. 어느 날 길달(吉達)이 여우로 변하여 도망해 갔다. 이에 비형은 귀신을 무리를 시켜서 잡아 죽였다. 이 때문에 귀신을 무리들은 비형의 이름만 들어도 두려워하여 달아났다.
당시 사람들은 글을 지어 말했다.
성제(聖帝)의 넋이 아들을 낳았으니, 비형랑(鼻荊郞)의 집이 바로 그곳일세.
날고 뛰는 모든 귀신의 무리, 이곳에는 아예 머물지 말라.
향속(鄕俗)에 이 글을 써붙여 귀신을 물리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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