言/사모하는惠

alclsto

oldhabit 2010. 10. 11. 20:25

 

                                             

 

 

 

 
▲ 2009학년도 스타니스랍스키 연기원 4학년 워크샵 공연 <미친 새> 포스터

 

 

 

 

 

내가 <미친새>라는 이 소설을 읽은 지가.. 그러니까 1970년대초, 긴급조치니 3선개헌이니.. 박정희 독재정권이 마지막 발악을 하던 때였다. 이 작품이 그해 여름 <현대문학>이라는 간행물에 실렸는데, 서점에 나오자마자 당시 중앙정보부에서 모조리 수거를 해갔고 박양배 작가는 잡혀들어갔고, 그 문학지는 한참동안 정간이 되었다.

얼마후 이 작품이 일본 <문예춘추>라는 간행물에 실려, 일본어로 된 작품을 다시 한국어로 번역하여 갱지에 복사해서는 '의식있는' 몇몇 학생들만 몰래 돌려읽은 기억이 있는 소설이다. 

줄거리는 이렇다.

어느 시골 농가의 자그마한 닭장에, 키워서 팔 요량으로 시장에서 사온 중닭 한마리가 들어온다. 들어오는 날부터 줄곧 이상한 행동만 보이는 이 닭은 스스로를 <새>라고 말한다. "나는 새다. 나는 닭이 아니다!" 라는 헛소리를 내뱉으며 거침없이 행동한다.

닭장안에는 기존의 질서와 규범이 있는데, 이 닭은 왕초 수탉만 올라가는 회에도 거침없이 올라가고, 아침에 주인이 주는 모이를 왕초가 먼저 먹고 나중에 먹어야하는데, 거침없이 자기가 먼저 먹는다. 다른 닭들은 이 닭을 이상하게 여기고 <미친새>라고 부르며 톡톡히 신고식을 치른다.

 

그렇게 얻어터지고 찢기고 해도 그는 아랑곳없이 자기뿐만 아니라 모든 닭들은 원래 <새> 였는데 인간들이 수백년을 걸쳐오면서 '너희는 새가 아니다.'. '너희는 새가 아니다 ... 닭이다.'라는 말에 세뇌가 되서 우리가 닭이 되었다고, 그래서 날지못하게 되었다고.. 말도되지 않는 말을 되풀이 한다.

그러면서 모두 앞에서 나는 시범을 보인다. 비록 완벽하지는 않지만 그 모습은 왕초에게 어떤 깨달음을 준다. 그러면서 다른 닭들 역시 모두 자신들이 <새>였다는 생각을 하게된다.

아울러 미친닭은 자신이 ... 제대로 숨도 쉴 수 없고, 움직이기조차 어렵고, 밤도 대낮처럼 밝힌 전등 밑에서 제대로 잠도 못자면서 알을 낳아야 하는 기업형 양계장에서 태어나 여기까지 오면서 보고 겪은 여러가지 일들을 그들에게 들려준다.

닭들은 자유롭게 살 수있는 곳으로 날아가야 한다는 미친새의 말에 동조한다. 그렇게 미친새와 왕초를 중심으로 닭들의 날기 연습은 시작된다. 그러면서 닭들은, 주인이 던져주는 모이를 받아먹기만 하면 조만간 살이 쪄서, 발가벗겨 시장바닥에 상품으로 팔릴 것이라는 말에 단식을 단행한다.

모이를 먹지않은 주인이 이상히여겨 읍내에서 수의사를 데려와 닭들을 검사한다. 한마리, 한마리.. 닭의 눈과 항문을 살펴본 수의사가 이 미친닭과 수탉이 이상하다고 지목한다. 그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집주인은 그 닭의 모가지를 비틀어 발로 밟아 죽인다.


.................. 



그들만의 League!

사목이란, 내가 나를 사목하는 거외에 다른 사목은 없다고 믿는다. 이 말은 내가 나를 사목할 때 항상 그분이 곁에 오셔서 나를 사목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체험한 분들은 알리라.

사실, 한국 가톨릭에 훌륭한 사제들 있긴 있다. 그 존함을 일일이 거론하긴 힘들지만, 그분들이 쓰신 책을 통해서 또는 강연을 통해서, 삼보일배를 통해서, 용산참사같은 약자에 대한 동참을 통해서, 정의구현을 위해서 ... 등등. 이러한 신부님들은 우리들에게 너희는 <닭>이 아니라 <새>이다.라는 인식을 일깨워주신 분이다. 그 분들의 수고를 어찌 잊으랴!

그러나, 이 분들 지금 어디에 있는가? 어느 신부님은 가르치던 대학강단에서 쫒겨 나고, 교회에서 인가한 출판사에선 책도 못내게하고... 이거 누가 그랬나? 평신도들이 '닭'이기를 바라는, '닭으로 세뇌되어 있기를 바라는, 우리의 본성이 원래 '닭'이 아니라 '새'라는 비밀을 아는 걸 원치않는 '삯꾼 성직자'들이 바티칸에다 고자질을해서 그렇게 된 것 아닌가? 

 

솔직히 표현하면, 대도시 교구 성당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이런 '신부 라이센스'만 소지하고 있는 신부, 무늬만 신부, 신부인 척하는 신부들에게 '니들 엿이나 한번 먹어봐라!' 하는 심정으로 글을 썼는 바, 몇몇 덜떨어진 한국인이 외국에 나가서 불미스러운 짓을 하면 일반화의 법칙에 따라 싸잡아서 'ugly korean!'으로 한국인 전체가 욕을 먹는 것과 같이 뭉뚱그려 글을 쓸 수 밖에 없지 않느냐. 위의 존경하는 신부님들은 본인이 해당 없는 글이라는 것을 아실 것이다. 

그럼 양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 2003년 맨체스터대학 연구팀이 만들어낸 예수의 얼굴. 2000년 전 유대인 농부의 두개골을 재료로 법의학 기술과 컴퓨터그래픽으로 만들었다고 한다.
성서에 나오는 "99마리 양보다 우리를 뛰쳐나간 한마리의 양!"에 대한 비유! 아마, 예수님이 목축사회인 유대에서 태어나지 않고 농경사회인 '조선땅'에서 태어 나셨더라면 다른 동물을 들어 비유하셨을 것이다. 

이  비유에 대한 나의 묵상은 이렇다. 예수는 '자신'이 정결례니, 단식이니 하는 인간을 옥죄는 율법이 지배하는 그당시 유대사회라는 담을 뛰어넘은 한마리 힘쎈 양이었다. 그가 그 울타리를 뛰어넘어 "드넓은 하늘과 같은 나라"(하늘나라)를 선포하였을 때 누가 달려왔는가? 하느님이 달려와서 소리쳤다. "너는 내 아들, 사랑하는 내 아들!'이라고... 예수가 이 음성을 똑똑히 들었다는 게 성경에 나와 있다.

따라서 이 비유는 다른 비유와 달리 '예수님의 체험'이 실린 비유이다. 그러면서 오늘도 예수님은 우리들에게 '한마리 길 잃은 양'이 되라고 말씀하신다.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사회나 '교회'가 나에게 주입한 '모든것'을 과감하게 던저버리라고 하신다. 너희들이 '가시덩쿨'에 찔려 신음하면 내가 너희를 구원하여 어깨에 둘러메고 집으로 가겠노라고.

 

그렇다면, 예수님이 '독사의 자식'이라고, '회칠한 무덤'이라고 꾸짖는 오늘날의 교회, 사제들에게는 이 비유가 성경에서 빼버리고싶은 구절이리라.

그런데 그대들(신부들)은 어떻게 가르치는가? 목자니 양이니 하는 문자를, 문자 그대로 금과옥조로 받들어 지난 2,000년동안 검은 양인지, 흰 양인지, 염소인지, 늑대인지 소속도 불분명한 사제들이 자신들은 목자요, 평신도는 양이라는 말도 되지 않는 '이데올로기'를 만들어 지금껏 세뇌시켜 오지 않았는가?

예수는 진정, "너희는 <닭>이 아니라 <새>"라는 것을 가르치신 분이다. 그런데 오늘날 그대들은 어떻게 가르치느냐? 새같은 소리하구 있네! , 너희들은 '원죄'로 인하여 애초 '닭'으로 태어났느니라. 너희들이 새가 되려면 사제인 나로부터 '사목'인지, '사육'인지를 받아야 하느니라! ... 이거 아닌가? 그래서 '새'가 된 평신도들이 있는가? 그대들부터 '새'가 아닌데.

어느 산골마을 초등학교 저학년 교실이다.


"양이 우리에 10마리가 있어요. 그 중 1마리가 우리를 뛰쳐나가면, 우리에는 양이 몇마리 남아 있을까요?" 하고 선생님이 학생들에게 물었다. 학생들이 저마다 손을 들어 9마리가 남았다고 답했다. 그런데 맨 뒤에 있던 한 학생이 조용히 일어나서 말했다.(아마 목축업을 하는 집안 자식인듯) "선생님! 우리에는 한 마리도 남아있지 않아요. 양들은 한 마리가 담을 넘으면 죄다 우르르 담을 넘어요." 

99마리는 왜 '카운트'하는가? 그들은 율법에 쩔은 골수 유대 근본주의자 인 것을.

이렇듯, 예수는 위험한 인물이었다. 따라서 오늘날 교회는 "예수는 안 가르치고 교리만 죽어라 가르친다고" 김유철 선생이 <가톨릭뉴스 지금여기>에서 말씀하신 적이 있다.

예수는 위험한 인물이었다. 저 위의 소설에서 주인 손에 모가지가 비틀려 발에 밟혀 죽은 닭처럼, 예수도 그렇게 죽지 않았는가? 그런 예수를 가르치고 그런 예수를 살자.

지금도 그 소설,<미친새>의 마지막 문장이 뇌리에 선명하다. 주인의 발에 밟혀 죽지않고 살아남은 닭들의 독백이 이명처럼 들린다. "우리는 <새>가 아니었나벼. .. 우리는 <닭>인가 벼 ......."

아래는 오버랩 된 '에코(Echo)다.

" 그럼 양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 그럼 양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 그럼 양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마지막으로 졸시 한편 소개한다. 

 

미친 예수 _idot

 

예수의 측근들이 그를 찾아 나섰다.
왜냐하면 <그가 미쳤다.>는 소리가 나돌기에 ...

<그는> 미쳤다.
그는 정결예식, 단식, 율법 ..등,
당시의 사회가, 종교가 사람들을 옥죄 온 규정들을 깔아 뭉갠다.
아니 오히려, 진탕 먹고 마시며 존재하는 관습, 예식을 거슬러
이방인과 어울리고,
낙인찍힌 죄인, 세리들과 먹고 마시고,
음란한 여자의 접근과 접촉도 마다하지 않으며
누구나, 아무나 하고 부대끼며 그들과 함께 뒹군다.

<그는> 종교를 위한, 예식이니 율법이니 하는 것 보다
우리 곁에서 우리와 함께 살고있는 이웃의 실재적인 삶만이 주된 관심이었다.

그리고,
<그는> 철저함의 광기(狂氣)를 부르짖는다.

살인은 나쁘다. 하지만 타인을 향해 내뱉는 저주가 바로 살인이라고 ..
간음하는 것도 나쁘지만, 음탕한 마음으로 여인을 바라보는 생각이 벌써 간음이라고 ..
악인들과 왈가왈부 대처하지 말고, 오히려 그들을 위해 기도 하라고 ..
도벽에 시달리지 말고 차라리 손, 발을 잘라 버리든지, 눈을 빼어 던져 버리라고 ..
기도할 때 남을 의식하여 경건한 척 하지말고,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보이지 않게 하라고 ..
자선을 베풀 때 동네방네 나팔 불지말고, 오른 손이 한 것을 왼 손이 모르게 하라고 ..
단식을 할 때 피곤하고 거룩한 표정을 짓지말고, 오히려, 얼굴을 깨끗이 씻고 환한 표정으로 하라고 ..
성전에 나가 주님을 경배하고, 예물을 바치기 전에, 먼저 자신이 누구와 껄끄런 관계에 놓여 있는지 생각 하라고 ..

그의 철저함의 <광기>는,
종교적인 인간이 .. 무엇을, 얼마나, 어떻게 성취하고
얼마나 길고, 장엄하게 믿고 따르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인간의 실존적인 태도에 신앙인의 존재와 행방이 <어떤 자세로> 놓여야 하는지를 추궁한다.

정말로, 우리가
몸을 다하여, 마음과 힘과 정신을 다하여
진실하고 간절하게 그리고 철저하게, 자신의 존재를 의식하며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그분>께 향하여 있는지 ..

그 <미친 예수>는
사람의 마음이,
그 사심없는 마음이,
그 아무것도 없는 마음이 ..
진실로 <아무것도 아닌 게 인간>임을 선포한다.

그리고 나머지는
그냥 공짜로 철철 넘치도록 베푸는 <그분>의 사랑이라고 ...

 

 

 

 

독자기고-idot-

' > 사모하는惠' 카테고리의 다른 글

열명의 문둥병자와의 대화  (0) 2010.11.17
alclsdptn  (0) 2010.10.11
침묵과 고독은  (0) 2010.09.30
하나님의 오랜 습관  (0) 2010.04.18
하나님을 놓아주자  (0) 2010.04.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