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보시인 -박용래
1. 들어가며
당사실 같은 언어로 떨어진 詩人의 옷을 한 뜸 한 뜸 정성스레 깁고 싶다던 시인 朴龍來는 1925년 음력 1월 14일 충남 논산군 강경읍 놀뫼라 부르던 채운산 기슭에서 박원태와 김정자 사이의 3남 1녀 중 늦둥이 막내로 태어났다. 1943년에 당시 명문이었던 강경상고를 우등생으로 졸업하고 한국은행의 전신인 조선은행 서울 본점에 취직하였다가, 1945년 대전지점 개설에 따라 대전으로 내려온 후 틀에 박힌 사무적인 일에 회의를 느껴 사직하였다. 이후 1946년 대전 시내에 있던 ‘鷄龍義塾’의 상업 겸 국어 교사로 취업하였다. 이때부터 학숙을 운영하는 丁薰과 교사로 있던 朴喜宣, 鄭島石, 元英漢 등과 함께 문학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다. 丁薰, 朴喜宣 등 세 사람은 ‘冬栢詩會’를 만들고 「冬栢」이라는 同人誌를 창간하여 충청문단 최초의 순수문학지인 詩誌를 탄생시켰다. 朴木月과는 시지 기증을 인연으로 만나 평생을 두고 詩作의 영향을 받았으며, 중학교 국어 준교사 자격증을 얻어 대전철도학교에 일자리를 얻고, 1955년에 충남 도립병원 간호사로 있던 李台俊과 결혼하였다.
박용래는 1955년 《現代文學》에〈가을의 노래〉가, 1956년에는〈황토길〉,〈땅〉등이 朴斗鎭에 의해 추천되어 등단한 이후 첫 시집인 『싸락눈』(1969)을 비롯하여 6인 시집『靑蛙集』(1971), 제2시집『강아지풀』(1975), 제3시집『白髮의 꽃대궁』(1979)등을 상재하였다. 1970년 대전북중학교를 마지막으로 교단을 떠난 후 자신의 집을 ‘靑柿舍’라 命名하며 1980년 11월 21일 심장마비로 세상을 타계할 때까지 평생 詩作에만 몰두하였다. 그가 타계한 후 시전집 『먼 바다』(1984)와 산문집 『우리 물빛 사랑이 풀꽃으로 피어나면』(1985)이 간행되었다. 최초로 시를 발표한 지면은 동인지「冬栢」(1946)으로 알려져 있으나, 그의 공인된 문단활동은 《現代文學》지의 추천을 받아 등단한 1956년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으로 보는 것이 좋을 듯 하다. 그렇게 볼 때 실질적인 문학활동이 이른 편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첫 시집을 1969년에 발간한 것을 보면, 그가 얼마나 寡作의 시인이었는지 알 수 있다. 이는 시어의 조탁에서 절제의 미학을 견지하였던 그의 문학적 자세와 무관하지 않을 듯 싶다.
시적 정한의 바탕을 향토 의식에 두고 평소 눈물이 유달리 흔했음을 지칭하는 바 ‘향토의 시인’, ‘눈물의 시인’이라고 불리워졌던 박용래의 시에 대한 평가는 대체적으로 향토적 공간과 토착어 사용에 대한 시인의 의식 탐구에 비중을 두어 왔다. 다시 말해서 이 두 축을 중심으로 해서 故鄕의 문제, 정한과 달관, 回歸意志, 과거 회귀적 상상력 등으로 세분화하여 시적 주제나 시 의식을 탐색하는 경향을 보여 왔다. 1990년대 들어 좀더 시각을 달리한 연구 경향을 보이고 있는데, 시에 대한 기호론적인 방법이나 구조분석을 통한 연구들이 그것이다.
본 논고는 이러한 연구들의 주안점을 염두에 두면서 박용래 시의 미학적 변별성이 이미지의 독창적인 구조에 기인한 것으로 파악하여, 이미지의 공간현상학적 관점으로 그의 시 세계를 조망해 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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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박용래(朴龍來) 시인은 일제 중엽인 1925년에 충남 강경에서 출
생한다. 일제 시대에 강경상업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은행원·교사를
전전하다가 1955년 《현대문학》에 [가을의 노래]로 추천을 받기 시
작한다. 이어 1956년 [黃土길], [땅] 등으로 3회 추천을 완료한다.
1969년에 "오늘의 한국시인선집"으로 첫시집 {싸락눈}을 발간하고,
1975년에 "오늘의시인총서"로 둘째 시집 {강아지풀}, 1979년에 "현대시
인선"으로 셋째 시집 {白髮의 꽃대궁}을 발간한다. 그 사이인 1970년
에는 한성기, 임강빈, 최원규, 조남익, 홍희표 등과 6인시집 {靑蛙集}
을 발간하여 충청 향토시단에 새로운 반향을 일으키기에 이른다.
1961년에는 제5회 충청남도 문화상을 수상하고, 1969년에 《현대시
학》제정 제1회 작품상을 수상한다. 1980년 교통사고로 작고한 후,
《한국문학》 제정 제7회 한국문학작가상을 수상한다. 그후 1984년 10
월에 3권의 시집과 유고작을 모아 "창비시선"으로 시전집 {먼 바다}를
발간하고, 같은 해 10월 27일 대전 보문산 사정공원에 박용래시비가
건립·제막된다.
1.2 고전적인 이론이지만, 엘렉과 와른의 {문학이론}에 의하면, 작
가연구는 생산된 작품의 해석에 빛을 던져 주는가 여부에 따라 그 가
치가 결정된다고 한다. 작품 속에서 시인은 가치를 형성하고 창작하
지만, 이 가치의 발견·음미·판단·향유는 독자에게 맡겨진다. 이런
의미에서 독자가 작품의 가치구현에 참여한다는 개념에서 이 글은 출
발한다.
시인 박용래는 무엇을 어떤 목소리로 노래했는가? 이에 대한 대답
을 하기 위해 박용래 시에 나타난 주제의식·수사적 특징을 중심으로
간략하게 정리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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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용래 시는 곧잘 그의 특별한 행적, 즉 '눈물'과 관련되어 말해졌다. 그가 빈번하게 서슴없이 흘렸다는 '눈물'은 그의 시를 한, 애상, 비애 등등의 단어와 연결짓는 하나의 단초였다. 인간 박용래를 박용래답게 만드는 것의 핵심이 그의 '눈물'에 있을 수는 있다. 그러나 박용래 시를 박용래 시답게 만드는 핵심에 '눈물'이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눈물의 범주 즉 비애, 한 등등의 정서와 관련된 시인들은 무수히 많기 때문이다. 박용래 시를 박용래 시답게 만드는 요소는 정서의 문제보다는 정서를 말하는 방식의 문제와 더 관련된다. 그 방식이란 다름 아닌 바라보기의 방식 또는 관조의 방식이다.
자주 쓰는 말 중에 '신서정'이란 말이 있다. 그런데 '신서정'처럼 정체가 불분명한 말이 있을까. 과연 '새로운 서정'이라는 것이 가능한 것일까?라는 근본적인 의문조차 풀리지 않는 용어가 '신서정'이다. 아마도 신서정이란 말이 가능하려면 '서정' 그 자체에서보다는 서정을 말하는 방식의 문제에 방점을 두어야 할 것이다. 서정을 말하는 방식의 새로움을 보여주는 시에서 가장 두드러진 시 중의 하나가 박용래 시이다. 박용래가 김소월 이후의 한국 현대 서정시에서 김소월의 방식으로부터 가장 먼 곳에 있기때문이다. 박용래 시에 두드러진 '바라보기 또는 관조의 태도' 만큼, '신서정'이란 말이 왜 가능한지를 선명하게 설명할 수 있는 근거를 한국 서정시에서 찾기란 어렵다.
박용래 시에 나타나는 바라보기의 태도는 '무심'의 경지로서 대상을 관조하는 방식에 가깝다. '무심'의 경지로서 바라보기란 외부의 개입없이 대상을 그 자체로만 관조하는 태도이다. 이를두고 칸트는 무관심적 경험이라 말한다. 이때 무관심은 대상에 대한 관심이 결여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매혹적인 산물로서 미적 대상에 주의를 집중하는 것이다. 그래서 감각적 희열, 도덕적 개선, 과학적 지식 및 유용성에 대한 관심과는 다른 미적 대상에 대해 순수한 관조적 관심을 가지는 것이다. 이때 대상을 바바보는 태도는 관심의 배제가 아닌 어떤 특정 태도에 치우침이 없는 태도이다. 대상의 표피를 걷어내고 그것의 실재를 바라보는 방식이다.
한국 현대시에선 세계를 주체의 정서 또는 의지의 자장 안으로 흡입하려는 진술방식이 주를 이룬다. 주체로의 합일 식의 시적 진술은 근대화 또는 과학화하는 시대적 조류와 밀접하게 연관된다. 근대적 주체 달리말해 데카르트적 주체는 주체가 이해가능한 영역 안의 정확히 설명할 수 있는 것들만을 가치 있는 무엇으로 말하는데, 한국 현대시의 화자란 대체로 이러한 주체의 범주에 포함되는 존재들이다. 한국 현대시에서 근대적 주체의 탄생은 모든 세계의 영역을 탈성화 시키는 것과 관련된다. 동양 전통의 미의식이란 여백 또는 침묵의 지대를 의미 생성의 중요한 수단으로 생각하는 虛實相資(실(有)은 반드시 허(無)에 의하여 존재하며, 허도 반드시 실에 의하여 존재한다), 不劃之畵(그려지지 않는 부분을 통해 형상의 본질을 보여준다)등의 미의식이었다. 조선의 한시가 중시한 의경미 또한 이와 관련된다. 의경미는 시인이 자연 경물을 관찰한 다음 생각을 옮겨 묘(妙)를 얻고 또한 情과 景을 융화시켜서 얻어낸 미적 경계인데, 이러한 의경미가 언외지의를 생성하게 하는 바탕이 된다. 세계의 본질이란 하나의 선명한 의미로 고정되는 것이 아니라 경물 스스로의 자율적 관계 맺음에 의해 무궁무진하게 '淸新'되며 언어 너머의 의미로 확산된다는 미의식이다. 이는 대상과 주체의 거리를 전제로 한 관조의 시선을 바타으로 해야 가능하다. 주체의 시선이 세계의 본질까지 닿기 위해선 세계에 대한 시인의 주관성이 개입되면 안된다. 주체의 주관성은 주체와 세계의 관계를 주체와 객체의 관계로 이분화하고, 주체의 시선으로 동일화 시킨 세계의 모습만을 표상하는 걸로 귀착되기 때문이다.
근대적 주체는 언외지의를 생성하게 하는 여백의 지대를 탈성화시켜 언내지의를 생성하는 세계를 창출한다. 이대 언내지의는 주체의 강력한 힘에 의해 규정된 풍경의 관계들에 의해 생성된다. 따라서 세계는 탈성화되며 사물화된다. 그러한 사물들로 이루어진 풍경은 전 단계화는 다른 새로운 풍경이었다. 그런데 박용래의 시는 한국 현대시에 여백의 지대를 복원시킨다. 박용래 지신이 "사물을 구태여 해석하려 하지 않는다. 다만 언제까지나 조용히 응시할 뿐"(「遮日의 봄」이라고 말했듯이 무심의 경지로서 외부의 개입 없이 세계를 그 자체로만 온전히 바라보고 이를 통해 근원에 다가서려는 관조의 태도가 여백의 복원을 가능케 한다. 가령 다음의 박용래의 시 같은 경우이다.
내리는 사람만 있고
오르는 이 하나 없는
보름 장날 막버스
차창 밖 꽂히는 기러기떼,
기러기 땔 보아라
아 어느 강마을
殘光 부신 그곳에
떨어지는가
- 「막버스」전문
시「막버스」에서 "막버스", "기러기떼", "강마을"의 관계를 알려주는 서술어는 최소화되어 나타난다. 서술어를 제어함으로써 세계를 바라보는 화자의 목소리를 통어한다. 화자의 목소리에 의해 의미화되는 세계의 풍경이 아니라, 풍경을 이루고 있는 "막버스", "기러기떼", "강마을"이라는 체언들 서로가 자율적 관계를 맺음으로써 스스로 의미를 생성하는 풍경이 된다. 의미를 규정하는 화자의 목소리가 제어됨으로써 체언과 체언 사이에는 여백이 가능해지고 그 여백의 통로로 체언의 의미가 생성되는데, 이때의 의미란 언외지의가 된다. 언외지의란 "정말 진짜 시를 쓰고 싶다. 언어를 망각하고 싶다. 꽝꽝나무 같은 단단한 의미"(나의 시, 나의 메모)라고 말했던 것처럼 결국 체언과 체언 사이의 언어를 망각할 줄 아는 내공을 박용래의 시가 가지고 있기에 가능한 것이다.
언외지의는 곧 의미의 개방을 의미한다. 의미를 구체화하는 것으로 종결되는 것이 아니라 종결부분에서 그것을 다시 확산시키는 것이다. "잔광 부신 그곳"이 어디인지, 어떻게 하면 갈 수 있는지 아니면 갈 수 없어서 절망스러운지 여부까지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어느"의 지점에서 화자는 목소리를 멈춘다. 그것이 "기러기 떼"가 "꽂히는" "강마을"을 하나의 완결된 모습으로 한정되지 않게 만든다. "강마을" 스스로 그 모습을 변주하게 만든다. 여기가 박용래 시가 한국 현대시의 근대적 시선이 사장시켰던 聖의 풍경을 복원시키는 지점이다. 신비로움은 또는 성스러움의 영역을 굳이 이성적, 과학적 시선으로 모두 밝힌다고 해서 진리에 가까워졌는가는 회의적이지 않았는가.
구 절 초 (九節草)
누이야 가을이 오는 길목
구절초 매디매디 나부끼는 사랑아
내 고장 부소산 기슭에
지천으로 피는 사랑아
뿌리를 대려서 약으로도 먹던 기억
여학생이 부르면
마아가렛 여름모자 차양이 숨었는 곳
단추구멍에 달아도
머리핀 대신 꽂아도 좋을 사랑아
여우가 우는 추분(秋分) 도깨비불이
스러진 자리에 피는 사랑아
누이야 가을이 오는 길목
매디매디 눈물 비친 사랑아. /박 용 래
시인의 가슴 속에는 저마다 시를 불러일으키는 상처가 담겨 있는 듯합니다.
상처가 시의 힘이 되는 것일까. 박용래 시인에게는 ‘홍래 누이’에 대한 아프고
서러운 기억이 일생 동안 맘 속에 상처로 남게 됩니다.
어쩌면 어머니보다도 더 시인을 살갑고 사랑스럽게 대해 주었던 홍래 누이,
홀아비에게 시집간 누이는 첫아이를 낳던 중 난산 끝에 그만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사랑하던 누이를 잃은 슬픔이 결국 박용래 시인으로 하여금 ‘눈물의 시인’이 되게 합니다.
‘구절초 나부끼는 사랑, 매디매디 눈물 비친 사랑’의 슬픔을 함께 느낄 수 있을 듯 하다.
박용래(朴龍來:1925-1969) 시인. 충남 부여 출생.
강경상고 졸업. 1956년 985172;현대문학 추천으로 문단에 등단.
그는 향토적인 정서를 눈물겹도록 사랑하는 마음으로,
극도로 간결한 표현과 행간의 여백을 추구하며 시를 씀.
<하관> <강아지풀> <저녁눈>등 다수의 대표작과, 시집 싸락눈(69)
외에 대전에 있는 시인들과의 공동시집 청와집71)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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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 절 초 (九節草)
우리는 흔히들 들국화란 말을 사용하는데 들국화란 가을철에
꽃이 피는 국화과에 속하는 무리들을 통틀어서 부르는 애칭입니다.
그중 우리 나라에서 자생하는 들국화의 가장 대표적인 것이 구절초인 것입니다.
구절초(九節草, 九折草)란 이름은 옛날 아낙들이 음력 9월9일 중양절(重陽節)에 꽃과
줄기를 잘라 그늘에 말렸다가 달여 먹으면 부인병의 예방과 치료를 위한 약으로 썼다고
하는데 특히 9월 9일에 채취한 것이 좋다고 해서 구절초란 이름이 지어졌 다고하지요.
또한 아이를 못 낳는 여성들이 달여 먹으면 아이를 낳는다 하여 선모초(仙母草) 라고도
불리어졌다. 역사적으로 보면 인류가 가꾸어온 가장 오래된 꽃 가운데 하나인 것입니다.
언제부터인지는 정확치 않으나 우리 나라에서도 음력 3월 삼짇날이면 진달래 부침개인
화전과 진달래 술(花酒) 을 먹고, 음력 9월 9일 중양절에는 국화꽃잎을 따서 찹쌀가루로
반죽하여 국화전을 만들어 먹었습니다.
또한 국화술을 빚어 단풍든 산과 계곡을 찾아 시를 쓰고 풍월을 읊으며 제각기
상서롭지 못한 것을 떨쳐버리고 장수를 기원하는 마음으로 국화전과 국화술을 마시며
하루를 보냈는데 이른바 단풍놀이란 것도 여기서 유래했다는 일설이 있습니다.
밝음과 고상함이란 꽃말을 지닌 구절초.
구절초는 예로부터 불로 장수의 영초(靈草)로서 식용, 약용, 관상용으로 널리 이용되었다.
봄에는 새싹의 움을 먹고 여름에는 잎을 먹으며 가을에는 꽃을 먹고 겨울에는 그 뿌리를
먹을 수 있으니 하나도 버릴 것이 없는 식물이 구절초입니다.
구절초는 요리 방법에 따라 국화술, 국화채, 국화전, 국화차 등 다양하게 즐길수 있으며
가을철의 꽃은 화전놀이의 소재로, 그늘에서 말린꽃은 찻속에 넣어서 먹기도 합니다.
국화꽃을 넣어 담근 국화술은 일명 연명주(延命酒)라고 하여 수명을 연장해 주는 장수
식품인 동시에 주술적인 술이기도 한데 국화술은 "밥맛이 나게 하고, 위를 튼튼히 하며,
피로회복과 장에 좋고, 눈알이 딴딴해지며 녹내장도 좋다"하여 건강술로 아주 손꼽았다.
구절초에는 클리샌더민이라는 성분이 있어 전초(全草)를 약용으로 사용,
부인병, 건위, 보익, 신경통, 정혈, 식욕증진, 중풍, 강장, 보은, 등에 효과가 있습니다.
세종 때 발간된 <향약집성방(鄕藥集成方)>에 따르면 구절초는 맛이 달고 오래 먹으면 몸안의
원기와 혈액에 이롭고 몸이 가벼워지며 노화를 예방, 장수하게 하는 약초라는 기록이 있다.
또한 간장열에서 오는 두통, 어지럼증, 눈이 침침해지는 증상과 눈의 충혈을 막고 머리털이
건조해서 잘 빠지는 질병의 치료와 예방에 좋으면 흰 머리칼을 검게 하는 약으로도 쓰였다.
이와 함께 국화꽃을 베갯속에 넣어 자고 나면 머리가 맑아지고 불면증을 치료하여
단잠을 잘 수 있고 두통이 있거나 눈이 아플 때는 말린꽃을 달여 마시면 효과가 있습니다.
꽃은 8월부터 10월 사이에 흰색, 연분홍색, 진분홍색 등으로 군락을 이루며 개화 기간이 긴
것이 장점이기에 화단 및 가로변 절개지 경사면 등에 심으면 좋은 관상 식물이 될 수 있다.
구절초는 국화과의 여러해살이 숙근초(宿根草)로 키가 40-80cm로 정도 자라지만 50cm내외.
산지의 척박하고 양지 바른곳을 좋아하며 습하고 그늘진 곳외에는 어느 곳에서나 잘 자랍니다.
속명으론 들국화, 창다구이, 고뽕 등 다양한 이름이 있다.
현재 전세계의 국화종은 4천여종, 이로 볼 때 화훼 가운데서 가장 많이 진화된 꽃이라는
장미(약 2만여종) 다음이 국화라고 할 수 있다. 국화과는 전세계적으로 1천여속 2만여 종류가
있는데 그 가운데 우리 나라에는 86속 3백80여 종류가 자생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우리나라의 국화속 식물 중 황색꽃이 피는 종은 단 2종뿐인데 산국과 감국이다. 나머지는 모두
백색이거나 붉은 색을 띤 백색인데 그 가운데서도 꽃이 가장 크면 서 화려한 것이 구절초입니다.
우리 나라에 자생하는 구절초의 유사종으로는 산구절초, 바위구절초, 포천구절초, 한라구절초,
가는잎 구절초, 낙동구절초, 울릉국화, 서흥구절초, 구름국화, 해국, 산국, 감국, 쑥방망이류 등.
국화 중에서도 향기가 가장 출중하고 자태가 은은하고 뚜렷한 구절초 단순 소박하면서도 크고
의연한 모습으로 늦가을의 서리에도 청아하게 꿋꿋이 버텨낸 생명. 하나도 버릴게 없으면서도
구하기가 어렵거나 까다롭지 않은, 늘 우리 곁에 있으면서도 귀하게 쓰이는 구절초입니다
문학의 고향-박용래 시인과 대전 오류동 | |
‘가난한 서민들의 애환’ 서정적으로 노래 | |
한때 나는 한 봉지 붕어빵이였다가 한때 나는 좌판에 던져진 햇살이였다가 중국집 처마밑 조롱 속의 새였다가 먼먼 윤회 끝 이제는 돌아와 오류동의 동전 <오류동의 동전> 朴 시인은 박용래 시인은 1980년 11월 21일 작고하기까지 대전을 중심으로 시인의 삶을 살았다. 충남 부여 출생으로 유년 시절과 1943년 강경상업학교 재학시절을 제외한 이후 줄곧 대전에서 살았기 때문이다. 1955년 시인 박두진의 추천으로 월간지 ‘현대문학’에 ‘가을의 노래’, ‘황토길’ 등 발표하며 등단했고, 55세의 나이로 타계할 때까지 ‘싸락눈’, ‘강아지풀’, ‘먼 바다’ 등 네 권의 시집과 한 권의 산문집을 펴냈다. 한국문학작가상·충청남도문화상·현대시학사 작품상 등을 수상했다. 박용래 시인의 4-5년 후배인 최원규(77) 충남대 명예교수는 20대 초반 무렵인 50여 년 전 박 시인을 만나 30년 가깝게 우정을 나눴다. 박 시인을 처음 만났을 때 그는 빨간 베레모를 쓰고 노을빛 얼굴로 반쯤 취한 모습이었고, 이후 둘은 어울리며 공통분모인 술과 문학에 함께 취했다. 최 원로시인은 “어느 선배 문인의 상갓집에서 열심히 소주를 들고 있었던 박 시인은 술을 마시는 것이 아니라, 마치 술잔을 빨고 핥은 시늉을 하고 있었다”며 “눈물과 콧물로 뒤범벅된 채 무슨 말인지 알 수 없는, 노래를 흥얼거리고 있는 그의 곁에 다가가 술잔을 교환했을 때, 박 시인은 그 당천성적으로 서정적인 기질을 타고났으며 술을 사랑하고 즐기던 습관을 갖고 있던 박 시인은 거의 시와 술로 탐닉하다 마침내 은행을 떠나게 된다. 그 무렵 대전의 거리 곳곳에 누비며 벌인 문학 행각은 많은 문학 청년들에게 선망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고. “신비하리만큼 멋을 간직한 그는 빨간 넥타이에 까만 셔츠가 어울렸고 원시적이며 야성적인 멋이 풍겼습니다. 노을처럼 젖어 있는 취기는 때로는 향기를 품었고, 간혹 술을 마시지 않을 때에도 그를 바라보면 취한 상태인 것 같았지요.(웃음) 빨간 머플러와 까만 베레모, 술을 마실 때는 언제나 잔을 빨아 돌리는 특이한 모습…. 그는 몸 전체로 시를 쓰는 듯한 인상을 풍겼고, 가끔 지나치게 자기 몸을 학대했습니다. 그것은 진하고 독한 알코올과 니코틴으로 전신을 담그는 것이었지요.” 최 교수는 박 시인의 처녀시집 싸락눈에 실린 작품 ‘저녁눈’을 그를 대표할 수 있는 작품으로 꼽았다. ‘늦은 저녁때 오는 눈발은 말집 호롱불 밑에 붐비다/ 늦은 저녁때 오는 눈발은 조랑말 발굽 밑에 붐비다/ 늦은 저녁때 오는 눈발은 여물 써는 소리에 붐비다/ 늦은 저녁때 오는 눈발은 변두리 빈터만 다니다 붐비다’ 최 시인은 “시 ‘저녁눈’은 바로 자기 자신의 모습을 그린 작품으로, 박 시인은 대전의 거리도 번화가는 피해 변두리 쓸쓸한 노동자들이 찾는 대폿집 같은 곳만 골라, 한 달이고 일 년이고 두루 누볐다”고 말했다. “조랑말 말발굽은 바로 가난한 서민들의 애환이 담긴 곳입니다. 여물 써는 소리가 들리는 곳은 바로 그 변두리 아니, 더 나아가 그의 고향 부여의 촌락 어디쯤일지도 모르지요.” 박용래 시인은 대전뿐 아니라 나고 자란 고향 부여에 대한 그리움을 담은 작품을 발표하기도 했다. 그의 작품 ‘겨울밤’은 가슴아프고 슬픈 사연을 지닌 고향집에 대한 추억이 녹아있는 작품이다. 어릴 적부터 몸이 허약했던 그를 위해 따스한 도시락을 챙겨주고, 업어서 키우다시피한 하나밖에 없는 홍래 누나. 시집가고 1년도 못돼 세상을 떠난 누나와의 안타까운 사연이 담긴 고향집에 대한 서정시이다. ‘잠 이루지 못하는 밤 고향집 마늘 밭에 눈은 쌓이리/ 잠 이루지 못하는 밤 고향집 추녀밑 달빛은 쌓이리/ 발목 벗고 물을 건너는 먼 마을 고향집 마당귀 바람은 잠을 자리’ 박 시인의 유고작인 ‘오류동의 동전‘은 시인 박용래를 표현한 자화상이기도 했다. 마침내 그는 호주머니에 몇 잎의 동전만 남긴 채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 최 시인은 “박 시인은 충청도 시인 가운데 가장 슬프고 아름다운 시를 쓰는 시인이요, 몸과 행동으로 한평생 시를 쓴 뼈의 시인”이라며 “그는 가고 없어도 그의 시혼은 이 한밭 하늘을 가득 덮고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김효숙 기자 press1218@daejonilbo.com <저작권자ⓒ대전일보사.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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