言/오래묵을詩

무등을 보며

oldhabit 2008. 5. 24. 11:50

            무등을 보며 
 

                           -서정주-

 

 

  가난이야 한낱 남루에 지나지 않는다.
  저 눈부신 햇빛 속에 갈매빛의 등성이를

  드러내고 서 있는
  여름 산 같은
  우리들의 타고난 살결 타고난 마음씨까지야

  다 가릴 수 있으랴.
 
  청산이 그 무릎 아래 지란(芝蘭)을 기르듯
  우리는 우리 새끼들을 기를 수밖엔 없다.
 
  목숨이 가다가다 농울쳐 휘어드는
  오후의 때가 오거든,
  내외들이여 그대들도
  더러는 앉고
  더러는 차라리 그 곁에 누워라.
 
  지어미는 지애비를 물끄러미 우러러보고
  지애비는 지어미의 이마라도 짚어라.
 
  어느 가시덤불 쑥구렁에 놓일지라도
  우리는 늘 옥돌같이 호젓이 묻혔다고 생각할 일이요
  청태(靑苔)라도 자욱이 끼일 일인 것이다.
 


 

5연으로 된 《무등을 보며》전문이다. 6·25전쟁 직후 광주 조선대학교에서 형편없는 대우를 받으며 교수생활을 하던 시절, 물질적·정신적인 허기를 달래며 쓴 시이다. '눈부신 햇빛 속에 갈매빛(진초록빛)의 등성이를 드러내고 서 있는 여름산'처럼, 한낱 가난 때문에 우리들의 본질이 남루해지지는 않는다. 그러므로 '무릎 아래 지란(향초)'을 기르는 무등산처럼 우리들도 자식들을 기르며, 부부의 정을 나누며 살아가다가 달관과 여유로운 자세로 인생의 오후를 받아들이자는 내용이다. 그래서 가시덤불 속에 뉘어질지라도 옥돌처럼 호젓하게 묻혔다고 위안을 삼자고 노래하고 있다. 세사에 시달리면서도 짐짓 세상을 관조(觀照)하는 시인의 태도를 엿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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