秋史 金正喜 선생이 쓴 무량수각(无量壽閣)이란 편액은
오늘날까지
두 점이 남아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하나는 추사 55세 때(헌종 6년) 제주도 유배시 대흥사에 들러
초의 스님에게 써준 것으로 선방 건물인 백설당(白雪堂)에 걸려 있다.
장쾌한 필력을 과시한 비후미(肥厚美)를 느끼게 하는 예서이다.
또 다른 하나는 추사 선생의 고향 예산 화암사(華巖寺)에 걸려 있는 편액으로
추사 선생이 제주도 귀양시절인 1846년은
그의 회갑이 되는 해 고향 예산에서 화암사의 중창이 이루어져 9월에 완성되었다.
화암사는 예부터 추사 집안의 원찰(願刹)로, 이를 기념하여 화암사에 써서 보낸 글씨로
추사가 글씨의 이상향으로 여기는 전한(前漢)시대
경명(鏡銘)의 글자를 기본으로 한 예서의 골격에
전서·해서의 풍을 가미한 새로운 조형미가 물씬 풍기는 글씨이다.
사람들은 이 두 글씨를 비교하며 이렇게 달라진 까닭을
대흥사 편액은
젊은시절 좋은 가문과 승승장구하던 학예에 대한 사계의 인정으로
세상 무서울 것 없었던 오만함이 묻어있고
화암사의 편액서는
안동 김문과의 세도다툼에서 밀려나
유배의 고통을 겪으면서 안으로 자기 완성의 표출이
이런 세련미를 갖춘것이라 말하곤 한다
전국 고가(古家)나 사찰(寺刹)에 이와 똑 같은 편액이 많이 걸려 있다.
지난번 다녀 온 부산의 범어사 원효암에서도 보였고
보은의 선병국 고가에서 대흥사 현판을 모각한 같은 편액을 분실했다는 소식도 접했다.
모두 추사의 글씨를 흠모한 사람들이 모각하여 걸어 논 것으로 보는데
여기 운현궁 노안당 사랑방에도 커다란 무량수각의 편액이 걸려있음이 보였다.
스승 추사의 글씨를 좋아한 대원군이 모각한 편액인지는 고증할 수 없으나
대흥사 무량수각 편액을 모각한 글씨인데 오히려 더 세련된 맛을 풍긴다.
궁중의 편액답게 깔끔하고 한 점 티없는 저 글씨...
金正喜, 阮堂이란 관서(款署)가 선명하다.
(운현궁 노안당에 걸린 무량수각 편액)
(대흥사 무량수각 현판)
(예산 화암사 편액 탁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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