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따뜻한 책
작가 이기철
출판 민음사
발매 2005.01.30
행간을 지나온 말들이 밥처럼 따뜻하다
한 마디 말이 한 그릇 밥이 될 때
마음의 쌀 씻는 소리가 세상을 씻는다
글자들의 숨 쉬는 소리가 피 속을 지날 때
글자들은 제 뼈를 녹여 마음의 단백이 된다
서서 읽는 사람아
내가 의자가 되어줄께 내 위에 앉아라
우리 눈이 닿을 때까지 참고 기다린 글들
말들이 마음의 건반 위를 뛰어다니는 것은
세계의 잠을 깨우는 언어의 발자국 소리다
따뜻한 책 中
날아가 닿는 곳 어디든 거기가 너의 주소다
조심 많은 봄이 어머니처럼 빗어준 단발머리를 하고
푸른 강물을 건너는 들판의 막내둥이 꽃이여
너의 생일은 순금의 오전
너의 본적은 햇빛 많은 초록 풀밭이다
달려가도 잡을 수 없던 어린 날의 희망
열다섯 처음 써본 연서 같은 꽃이여
너의 영혼 앞에서 누가 짐짓 슬픔을 말할 수 있느냐
고요함과 부드러움이 세상을 이기는 힘인 것을
지향도 목표도 없이 떠나는 너는
가장 큰 자유를 지닌 풀밭 위의 나그네
보오얀 몸빛, 버선 신은 한국 여인의 모시 적삼 같은 꽃이여
너는 이 지상의 가장 깨끗한 영혼
공중을 날아가도 몸이 음표인
땅 위의 가장 아름다운 소녀들
민들레 꽃시 全文
나는 그의 팔에 안겨 잠도 자고 밥도 먹고 하늘도 쳐다 보고
어둠 속에 별이 몇 개나 떴는지를 살피고
무엇보다 나는 그의 가슴에 안겨
내가 좋아하는 시인들의 이름을 출석부처럼 껴안고
색동옷 같은 시집의 시들을 소리 내어 읽고
밑줄도 치고
그러다가 날아간 새가 그리우면
새의 부리가 쪼아놓은 한 자락에 연필 글씨로 시도 쓴다
집 中
신발마다 전생이 묻어 있다
세월에 용서 비는 일 쉽지 않음을
한 그릇 더운 밥 앞에서 깨닫는다
어제는 모두 남루와 회한의 빛깔이다
저무는 것들은 다 제 속에
눈물 한 방울 씩 감추고 있다
저녁이 끌고 오는 것이 어찌 어둠 뿐이랴
따뜻한 밥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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